◈ 세월에 그냥

百濟 개로왕蓋鹵王의 죽음과 아차산峨嵯山 유적 石槨墓의 見解

鄕香 2006. 8. 11. 16:56

 

삼국유사에 의하면, 『 475년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에 의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함락되자 개로왕(백제의 제21대)은 수십명의 기병과 성문을 나서 피신하다가 고구려의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생포 되었다. 再曾桀婁와 古爾萬年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백제인이기에 개로왕을 알아봤으며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왕에게 침을 세번 뱉었다. 』이는 개로왕의 얼굴을 알아본 상황에서 표출된 분노의 표현이겠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재증걸루가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씩이나 뱉었고 그의 죄를 따졌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개로왕에 대한 私感이 깊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병을 거느리던 시대에 개로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이나 사병제도를 약화 시키는 정책에 반감을 가졌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연루되었던 인물들로서 고구려 군대의 嚮導가 되어 백제를 공격하였던 것이겠습니다.

 

<개로왕의 죽음과 그의 분묘>개로왕은 묶여서 지금의 아차산성인 아단성 밑으로 압송되어 죽었다고 합니다.그의 죽음은 일국의 왕으로서 간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제 왕성이 한눈에 잡히는 아차산성에는 고구려 군대의 총본영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고, 장수왕이 직접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니 묶인 개로왕은 장수왕의 면전에 끌려갔을 터인데, 많은 군사들이 운집하여 있는 공간에서 개로왕의 죄를 묻는 성토가 이루어진 것으로 봅니다. 명분이 중시되는 당시의 사회기류에서 단상에 높이 앉았을 장수왕은 무릎을 꿇린 개로왕에게 그 죄를 물었을 것이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첫째,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예의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에 입각하여, '천손국天孫國'인 고구려에 복속되기는커녕 끊임없이 대항하여왔던 백제의 죄목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성토하였음을 의심할 수 없으며, 백제는 고구려의 예속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공도 하지 않고 오히려 틈만 엿보면서 침입해 왔다는 논리였을 것입니다.

 

둘째, 472년에 북위北魏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장수왕을 비방한 내용을 짚고 넘어갔으리라 봅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 내정에 대한 비방이 많이 들어있어 북위 측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진위를 알아보도록 하였던 만큼, 국서의 내용은 고구려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고 할 때 이 국서에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의 나라임을 말하면서도 고구려를 '이리와 승냥이' 혹은 '큰뱀'이라고 하였고, 장수왕을 가리켜 '조그마한 더벅머리 아이小竪'로 일컬었던 부분을" 고구려 측에서 간과하지는 않았겠지요.

 

셋째, 상표에서 장수왕의 대신강족大臣彊族에 대한 살육행위와 더불어 북위에 쫓긴 북연의 풍씨馮氏 세력이 대거 몰려가 있다고 말하면서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부추긴 문제를 짚었을 것입니다. 즉 북위와 고구려를 이간시키려고 한 글귀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북위는 선비족 탁발규()가 386년에 다시 대를 세웠으며, 그리고 곧 국호를 '위()'라고 고쳤는데, 이를 앞의 삼국 시대 위와 구별하여 '원위()' 또는 '북위()'라고 하였습다. 398년에 탁발규는 수도를 평성(, 산서 대동)으로 옮기고 황제라 칭하여 도무제()가 되었으며, 후연을 물리친 다음 중원으로 들어와 한족 세족을 받아들이고 한족의 정치 제도를 수용하였고, 다음의 명원제() 때도 한인을 중용하여 남조의 송을 공격하여 청주와 연주, 예주 일부를 점령하여 황하 이남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다음의 태무제() 때에는 더 많은 한족 세족을 끌어들여 연합 정권을 구성하여 군사력도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 결과, 먼저 하()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북연과 북량을 차례로 멸망시켜 마침내 분열되었던 화북 지방을 통일하게 되었지만, 3대(代)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여러 민족간에의 문화 경제 토지 문제 등이 정립이 되지 않아 제도와 안정이 필요한 시기였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이후 요동 일대를 장악한 강력한 고구려를 공략하기에는 힘든 상대였음에 472년 백제의 청을 들어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밖에 인국隣國이요 형제 나라인 고구려와 불목한 개로왕의 죄목을 찾아내어 따진 연후에 그의 처형을 단행하였을 것입니다. 5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왕족 중심의 친위체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던 야심적인 백제의 개로왕은 이렇게 죽어갔을 것이며, 이러한 개로왕의 시신에 대한 처리 또한 간단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봅니다.이와 관련해 신라 군대에 피살된 백제 성왕의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의 북청이라는 관청의 계단 밑에 묻고 나머지 부분은 백제에 돌려준 사실이 상기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개로왕의 시신이나 그 일부가 백제에 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지만, 신라의 성왕의 경우와는 달리 고구려의 개로왕에 대한 감정이 극히 나빴던 만큼 희박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개로왕의 무덤은 그가 살해된 아차산 어디에 소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아차산에서 평범하지 않은 이 석곽묘는 규모로나 조성방식으로 볼 때 범상치 않은 인물의 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차산에 얽힌 인물로 이 자리에 묘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생각을 좁혔을 때 떠오르는 인물은 백제의 개로왕뿐입니다. 일단 아차산의 마당바위 쪽의 석곽분의 주인을 개로왕으로 올려놓고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편평한 바위위에 조영된 무덤인데 이는 흔하지 않은 예에 속하는 것으로 死者가 흙을 접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자에게는 흙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흙은 물과 함께 자연의 섭리에서 만물을 생성하는 모태입니다. 따라서 다음 탄생을 대비하여 육신이 마땅히 되돌아갈 곳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부여夫餘는 일부다처제하에서 가부장권을 확립하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기를 매우 엄중하게 처벌한 사실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즉 투기한 여자는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산위에 버려 조수鳥獸의 먹이가 되게 하였는데 매장권을 박탈한 가장 가혹한 처벌입니다. 처가에서 남자에게 당시의 재산인 소나 말을 갖다 바쳐야만 여자의 시신에 대한 매장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그 처벌이 가혹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차산의 암반 위에서 확인된 석곽분 안에 안치된 시신은 영혼의 부활을 박탈하는 일종의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비록 이 석곽분의 조영造營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목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으로는 자연스럽게 개로왕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이 석곽분은 개방되어 있는 문쪽이 아차산성 장대將臺를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대에서 한 눈에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감시하기에 최적의 위치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초목이 자랄 수 없는 바위 위에 있으니 시신이 백제로부터 암암리  탈취되지 못하도록 방지를 위해 감시하기가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또한 곳 이렇게 감시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제2보루입니다. 그러니까 이 석곽묘를 가운데 두고 동남쪽 위치의 장대와 동북쪽에 위치한 2보루에서 낮은 암릉 평편하고 넓은 바위지대 위에 석곽묘를 두고 이중으로 감시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장대(將臺) : 장수가 적정이나 주변산성을 살펴보는 누각이 세워진 높은 지대.>          

 

 

아차산 석곽묘《 阿且山(峨嵯山)石廓墓》

석곽묘가 있는 위치는 아차산성의 장대(將臺)를 향해 부복하는 모습이고 뒤에는 제2보루성이 지켜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석곽묘 옆에 보이는 큰 돌은 열린 입구를 막았던 돌입니다.

 

 

 

아차산2보루에서 내려다본 풍경 중 좌측 하단의 석곽묘와 그 아래 구리시에서 조성한 '대장간마을이 보입니다. 이 대장간마을입구에 여러 기의 고인돌무덤이 있었으나 대장간마을을 조성할 때 사라지고 일부 상석(上石)이 훼손된 채 버려져 있습니다. 뒤에 건물들은 워커힐호텔 건축물이고 위치는 아차산성 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아랫자락입니다. 

 

 

 

 

<아차산2보루((阿且山堡壘)>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가지줄기가 돌출하여 생긴 작은 봉우리(해발276.2m)에 둘레 50m의 원형으로 축성한 작은 보루입니다. 이곳은 미사리와 암사동 등 한강일대를 살펴보기 좋고 동쪽은 암벽이 있어 적의 침투로 부터 방어에 유리합니다. 흩어진 성돌로 최근에 쌓은 돌탑 바로 남쪽에는 치(稚)로 추정되는 성벽 3단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흙으로 덮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성벽 안쪽과 유적 주변에서는 고구려 대표적인 토기로 꼽히는 몸통긴항아리(長胴壺)조각들이 지표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차산2보루에서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입니다. 2보루에서 석곽분까지의 가시거리는100m 정도로 가깝습니다. 2보루 아래 비탈진 암반을 50m 정도 내려가면 범굴사(대성암)입니다. 범굴사 좌측 분지에서 갈라진 우측 가파른 능선아래 넓은 바위지대에 1천년이 넘은 석곽묘가 있는 바위능선의 모습입니다. 석곽묘 앞에 두 남녀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듯이 2보루에서도 석곽묘를 주시해 보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석곽분이 조성된 당시 이렇듯이 중점적으로 석곽분을 감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처럼 철저히 보호 감시한 석곽분의 주인이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음에 자연스럽게 당 시대의 개로왕으로 접목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2보루에서 내려다본 석곽묘와 주변 정경)

 

 

이 길은 아차산성 성벽위의 모습입니다. 장대(將臺 : 將帥가 군졸을 지휘하거나 적정을 살펴보는 돈대.)가 있던 곳이 조만치 보입니다. 

 

 

 

 

 

 

이 장대(將臺)는 아차산성 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북쪽 성벽에 위치합니다.

 

 

 

 

 

 

장대(將臺)의 지반은 잡석으로 2단 원형으로 구성하였습니다.  큰 원으로 1단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2단의 작은 원을 두었습니다. 장대에는 내가 올라온 성 내벽 방향에서 성(城)은 다시 90˚ 로 꺾여 동쪽(한강 쪽)으로 이어지다 워커힐을 감싸고 다시 이 자리로 이어집니다.  

 

 

 

 

 

동쪽(한강 쪽)으로 이어진 아차산성 성벽으로 고구려대장간 마을로 이어지는 능선 위쪽 입니다.

 

 

 

 

 

사진가운데 나무 몇 그루 있는 바위봉우리가, 장대(將臺.樓臺)에서 바라본 아차산2보루(阿且山2堡壘)와 쌀바위입니다. 그 아래 대성암(범굴사)이 있고 그 우측 아래 석곽묘가 있으나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누각이 있을 당시는 석곽묘가 바로 아래 보였을 것입니다. 가시거리는 1백여 m 정도입니다.

 

 

  

고맙습니다. <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