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한 무덤에 두 종중이 상존하는 < 파주 서곡리 고분벽화(坡州 瑞谷里 古墳壁畵)>

鄕香 2005. 5. 2. 08:27

1989년  어느 날,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에 한 통의 제보가 왔다. 민통선 안에 있는 고분 안에 벽화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도굴된 무덤에 벽화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반도 이남에는 벽화고분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귀중한 문화적 사료적가치가 있는 중요한 일이다. 민통선 안이고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제보자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파주 서곡리 야산이며 비석도 있는데, 한상질의 묘라고 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한병삼 선생도 청주 한씨였으니 관심은 더욱 컸다. 그 당시 제보를 접한 정양모 학예연구실장은 어렵게 청주 한씨 종중을 설득하여 승낙을 얻어 1991년 3월20일, 정양모 실장과 나는 1차적으로 답사를 위해 관계 군부대에 협조 공문를 띄워 안내를 받아 들어간 민통선 안은 발을 옮길 때 앞서서 인도하는 군인의 발자국을 밟으며 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할 공포의 지뢰밭이었다.

인도하는 수색대원의 뒤를 따라 들어가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야산 중턱에 2개의 고분(古墳)이 상하 종대로 붙다시피 가깝게 있었다. 앞 봉분 좌측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문열공 한상질 지묘((文烈公韓尙質之墓)라는 조선시대 전기형식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를 살아 온 '문열공'의 묘를 둘러본 결과 외관상으로는 조선 초기의 평범한 봉분이었다. 박물관의 입장으로는 당시 한병삼 관장이 청주 한씨 문중이므로 조상의 묘를 직접 파헤친다는 일은 정서상으로도 어려운 일이니, 발굴을 피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제보를 받은 정양모 학예연구실장은 발굴단장으로 하고 실질적인 발굴은 문화재연구소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사 등이 1991년 4월6일 발굴이 시작되었다.

4월7일 발굴현장을 답습한 결과 과연 묘안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사방 화강석 벽면에 12명의 인물상이 배치되었고 입구 정면 벽면 중앙에는 묘의 주인으로 추측되는 인물상이 그려졌고 천장에는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그린 성신도가 표현되어 있었다. 북벽과 천장의 별자리는 확연했고 동서남벽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도굴되었을 당시의 훼손이겠다. 고려의 석실묘를 여실히 보여주는 고려 말의 전형적인 무덤이라 하겠다. 그런데 발굴 과정에 석실 입구에서 또 다른 큰 비석이 두 동강난 채 묻혀 있었다. 아주 커다란 ( 너비 750cm, 길이200cm) 비석이 나왔는데, 〈증시창화권공묘비(贈諡昌和權公墓碑)>〉 이라는 그 비문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묘 앞에 세워져 있는 문열공(韓尙質)의 비는 무엇이며,  봉분 안 석실 입구에 묻혀 있던 이 비(碑)는 왜 여기에 묻혀 있었던 것일까?  의문이 깊어갈 쯤 4월12일 묘 주변의 구조를 알기위해 조사하다가 묘 바로 앞 흙속에서 4장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었다. 

〈묘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과 생전의 내력, 묘지의 위치 등을 새겨 기록한 돌로 석실 안에 넣거나 묘 앞에 묻는다.〉 한자 解讀  전문가나 알아볼 전서체(篆書體)이지만, 이미 앞서 석실 입구에서 발굴된 두 동강난 비석에서 본 예감도 있어 살펴보니 "중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 이라는 머릿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은 엄연히 청주 한씨의 '문열공한상질지묘((文烈公韓尙質之墓)'라고 새겨져 있는 무덤에서  권씨의 무덤임을 입증하는 지석이 발굴되었으니 말이다.   

 

묘지석 탁본을 전문가(任昌淳한문학자)에 보내서 판독한 결과 묘지명의 주인공은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 때의 문신으로 창화공 권준(權準1281-1352)이었다. '권준'이 죽은 1352년 사위 홍언박의 간청으로 당대의 문인이었던 이인복이 지은 것이다. 또한 묘지 앞에서 발견된 묘지석의 파편 일부가 석실 안에서도 발견됨으로 인해 묘실 밖에서 발견된 지석은 원래는 무덤 안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판독된 묘지명의 내용으로 알 수 있었던 놀라운 사실은 묘지명의 주인 권준과 묘지 앞에 세워진 묘비의 주인 한상질은 외손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권준'의 둘째 아들 '권적'의 사위가 '한상질'의 아버지인 한수(1333~1384)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려사를 살펴보면 당시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격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사랑하는 왕비 노국공주가 죽은 후로는 '신돈'에게 정치를 맡기고, 김흥경이라는 총신을 사랑했고 그를 통해 미남의 귀족자제들을 선발하여 구성한 '자제위' 라는 기관을 두어 왕위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권진'도 그 중 한 일원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정신적으로 피폐되어 왕비와 궁녀 그리고 '자제위'와 문란한 성관계를 가졌으며 자제위 중 홍륜이 왕비인 익비를 임신시키게 되었으며, 이 사실을 내시 최만생이 왕에게 밀고를 하였는데,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을 시킨 홍륜과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말하자 내시 최만생이 죽임을 당할 두려움으로 홍륜 등에게 알렸고, 그날 밤 만취한 공민왕은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제위' 권진과 한안 등도 공모자로 처참되고 그의 아버지 권염도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배후 세력이 음모하여 죄를 권진 등에 뒤집어 씌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역사적 진실이야 어떻든 이때 죽은 '권진'이 이 무덤의 주인인 권준의 증손자이다. 이에 따라 1374년 권진의 숙부 권적의 사위인 청주 한씨 문경공 한수(한상질의 부)가 몰락한 처가를 수습해 권진의 증조부인 권준의 제사를 잇게 되었다. 권준은 생전에 현재 묘지가 있는 곳을 장지로 유언하였다. 이 묘지는 현재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112 임야 만구천평 중 이십여평 정도가 묘역으로 현재 청주 한씨 문중의 명의로 되어 있다.

 

<1991년3월20일 필자가 정양모 실장과 함께 답사 중 비석을 살펴보고 있는 장면>

 

 

<권준의 묘 바로 위에 위치한 묘를 살펴보고 있는 장면>

 

 

 

『 권씨 종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 사건으로 멸문지하의 위기에서 권씨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

권준 할아버지의 제사를 외손간인 청주 한씨 집안의 한수에게 부탁 했을 것이 아니겠느냐! "고,』

그렇다면 청주 한씨 가문이 외손간인 권준의 제사를 지내 주다가 한수의 아들 한상질(1400년 사망)의 무덤으로 오인 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무덤 앞에 서 있는 한상질의 비석은 1700년대에 세운 것입니다.

 

『 또한 600년을 조상의 묘로 알고 제사를 올려 왔던 청주 한씨 문중은 맑은 하늘에서 벼락같은 소식이었음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문인 한안(자제위)이라는 분도 그 당시 권진과 함께 시해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권씨 제사를 지낼 수 있었겠느냐? "고, 』

 

 《 발굴 당시 나의 우려대로 이 사건은 법정 소송으로 번졌고, 법원은 발굴조사보고서와 발굴된 묘지석과 고려 풍의 벽화 등을 들어 이 묘의 주인이 권준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고, 한씨 종중은 '발굴조사보고서'가 잘못 됐다며 대법원에 상고 하였으나 고고학적 판결을 통해 권준의 묘임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

 

이 무덤의 주인공은 고려때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을 지낸 권준(權準1281~1352)으로 벽화는 그가 사망한 1352년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 벽에 그려진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무덤을 수호하는 역활에 의미를 가지며 천장에 그려진 별들은 죽은 사람이 향하게 되는 천상의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벽화의 주제는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것이었다.

서곡리(瑞谷里) 고분벽화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은 무덤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북벽 인물상이다. 인물은 호방한 필치의 간략한 백묘법(白描法)의 묵선(墨線)으로 표현되었는데 얼굴이나 관모, 의복에 부분적으로 붉은 색으로 칠함으로써 벽면에 변화의 생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매와 위엄있는 표정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어 강렬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이와 유사한 고려 벽화로는 개성 수락암동(水落岩洞) 1호분과 고려 공민왕능(恭愍王陵)의 12지신상을 들 수 있다. 

이 벽화는 당나라 이래의 전통적인 고려 불화의 화려하고 섬세한 양식과는 다른 고려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추정 주인공(推定主人公) 북벽인물상(西壁人物像) 》

이 무덤의 벽화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앉아 있는 인물로 (正坐人物) 근엄 엄숙해 보이며 

무덤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벽 크기 108×202cm

 

이 묘실의 벽화는 바탕에 회칠 등 아무런 덧칠이 없이 생돌벽 바탕에 그려져 있다.〉

 

 

《서벽 인물상(西壁人物像)》

이 인물상은 붉은 색 모(帽)를 쓰고 두 손에 홀을 쥐고 입구쪽을 향하여 서 있다.

 

벽 크기 108×394cm.

 

〈 파주 서곡리 고분벽화(坡州 瑞谷里 古墳壁畵)〉

고려(高麗)-《14世紀 中葉》京畿道 坡州郡 津東面 瑞谷里 所在. 

 

 

<한상질(韓尙質)>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할아버지는 호부상서 공의(公義)이고 아버지는 후덕부판사(厚德府判事) 수(脩)이며 어머니는 권적(權適)의 딸이다. 동생이 개국공신 상경(尙敬)이며, 손자가 세조 때의 공신 명회(明澮)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했다. 그뒤 형조판서·우부대언·우상시·예문관제학을 역임했다. 1390년(공양왕 2년) 천추사(千秋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같은 해 12월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 (西使使))가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주문사(奏聞使)로 명에 파견되어 '조선'이란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돌아왔다. 다음해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使)로 임명되었고, 그후 경상도관찰출척사·예문춘추관대학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文烈公 韓尙質의 兄은  嘉善大夫漢城府尹商議議政府事이었으며 바로 밑에 弟 상경(商敬)은 임신년(壬申年 1392) 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世子師西原府院君, 막내 동생 商德은 戶曹參判을 歷任하였다. 그리고 손자가 有名한 忠成公 韓明澮다.

 

 〔참고〕

 

형조판서(刑曹判書 )

조선시대 소송 형옥등의 일을 관장한 정2품  형조의 수장(首長)

형조의 장관은 다른 5조()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전서()라 하고 위계도 정3품이었으나 1405년(태종 5) 판서로 고치고 정2품(正二品)으로 올렸다. 그 후 1894년 형조가 법무아문()으로 개칭되면서 법무대신으로 고쳤으며 위계도 칙임관(勅任官)이라 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사(兵使)라고도 한다. 병마절도사의 전신(前身)은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서 고려 말 454545창왕(昌王) 때부터 파견되기 시작하여 1466년(세조 12) 병마절도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방의 군사조직을 도별로 체계화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병마도절제사가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건국 후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그기능도 확충 정비되었다. 병마절도사로 개칭된 다음 1472년(성종 3) 관찰사(觀察使)가 따로 이 병마절도사를 겸하면서 병마절도사 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두 15명으로 충청도 · 경상좌우도 · 전라도 · 평안도 · 영안남북도에 각각 1명씩 모두 7명의 전임관(專任官)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을 단병사(單兵使)라 하였으며, 그 밖에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兼兵使)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 ·강원도 ·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선조 26)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병마절도사는 병영을 설치하고 그 아래 병마우후(兵馬虞侯)와 군관들, 그리고 많은 아전 ·노비공장(工匠)들을 거느리는 한편 유방군(留防軍)을 통솔하였는데, 이렇게 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설치된 곳을 진관(鎭關)체제에서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보통 무신으로 덕망을 갖춘 자가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처음에는 경직(京職)을 가진 채로 임명되다가 1477년(성종 8)부터 정식 녹봉을 받는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영안남북도의 병마절도사는 각각 북청부사(北靑府使)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겸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평상시에는 지방군의 무예훈련과 습진(習陣), 무기의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軍裝) 점검, 성보(城堡)등 군사시설의 수축 등을 엄격히 살펴서 국방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치를 취한 뒤 중앙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도민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잡거나, 도적을 체포하고 내란을 방지 · 진압하는 일도 병마절도사의 중요한 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