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역대 왕사(朝鮮歷代王史)

<11代 中宗 재위 1505~1544.>~<14代 宣祖재위1567~1608 >

鄕香 2006. 6. 17. 03:10

《11代 中宗》

 

 

 

 

 

 

 

〈11代 中宗1488(성종 19)∼1544(중종39) 재위 1505~1544.〉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성종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며,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고,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하여졌다.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며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하여 기성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하여,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진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문제(僞勳削除問題)를 계기로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신진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고,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대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 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金安老)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尹世昌)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애매한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가 등장하여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김안로가 추방되었으며,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중종대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나와 훈구세력과 신진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상호간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에 삼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한 때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을 공격하는 등의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일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는 동시에 항거왜의 삼포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이 자주 일어났다.  즉, 1522년 5월 추자도왜변(楸子島倭變)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왜변 등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여 인마(人馬)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기왕의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한편, 북방 국경지대의 야인(野人)의 침구도 빈번하여졌다. 1512년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여러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 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하여 북방방어에 노력하였으며,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야인들은 생활여건이 나은 6진·4군지대로 부단히 침입하여 들어와 때로는 만포첨사(滿浦僉使)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같이 남왜북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호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였으며,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특히 비변사는 처음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 이의 방어에 대한 의논을 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화되었다. 이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편조전(鞭條箭) · 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국내의 군사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하여지는 등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조광조 등을 등용하였던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으며, 도성 안의 요승(妖僧) · 무가(巫家)를 적발, 처치하고 새로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주의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 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 二倫行實》·《속삼강행실 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하여 국민교화에 힘쓰고,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그리고 오랜 재위기간 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 즉, 최세진(崔世珍) · 신용개(申用漑) · 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四聲通解》· 《속동문선 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하여 권선징악을 중심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하여 역사 · 지리 · 언어 · 문학 · 사회의 각 방면의 문헌들이 편찬,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 · 《대전속록》 등을 인간하고, 1540년 역대의 실록을 등사하여 사고(史庫)에 배치하는 동시에 1542년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하여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해 7월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에는 전라도 · 강원도 · 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 음식 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관리들의 신래자(新來者)에 대한 침학을 금지하는 등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가 없었다. 특히 중종 때의 특기할 사실은 1530년 4월에 당시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또한,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 · 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泥豆錫) · 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습득해오게 하였으며, 1536년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여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죽었다. 능은 처음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廣州(지금의 강남구)로 이장하고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세 왕비와 빈(嬪)에게서 인종 · 명종을 비롯하여 9남 11녀가 태어났다.

 

 

《제12대 인종(仁宗)》

 

 

인종과 인성왕후 陵 왕릉은 병풍석을 두르고 왕비릉은 병풍석이 없음.

 

 

 

 

 

 

 

《12 代 仁宗 1515(중종 10)∼1545(인종1). 재위 1544~1545 》

 

이름은 호(峼) 자는 천윤(天胤) 이며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어 2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여,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고, 조광조(趙光祖)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해주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동궁으로 있을 당시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긍휼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으며, 서형(庶兄)인 복성군 미(福城君 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하여 모자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려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하여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손수 잠자리를 살폈고,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여짐에 따라 1545년(인종 1)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明宗)에게 전위하고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시호는 헌문의무장숙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 묘호(廟號)는 인종이며, 능은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13代 明宗》

 

 

 

〈13代 明宗 1534(중종 29)∼1567(명종 22) 재위 1545~1567 〉

 

이름은 환() 자는 대양(對陽)이며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의 둘째아들이며 인종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니,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은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으니,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한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이를 구실삼아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으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일대를 횡행하였고,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하여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연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邊協)에게 피살되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이에 즈음하여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 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능은 강릉(康陵)이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

 

 

 

《14代 宣祖》

 

 

 

〈14代 宣祖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재위1567~1608〉

초명은 균(鈞)이라 했고 뒤에 연(昖)으로 개명하였다. 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했다.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하여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치게 되어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다. 한편,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징사(徵士)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超敍)하기도 하였으며, 《유선록 儒先錄》·《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소학》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하기 위하여 《삼강행실 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 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錄勳)의 영전(榮典)까지 받았던 이기(李芑) ·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또한, 명나라 《대명회전 大明會典》 등 중국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선조대까지 200년간이나 전해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시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이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인물로 하는 당쟁이 시작되어 동인(東人) · 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政論)이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고, 이이의 양파조정에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들에 대한 논죄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려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임진왜란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서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자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 다음해 돌아온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던 중,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진을 필두로 각 고을이 무너지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城)의 계획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갔다가 적이 한강을 건너 도성이 무너지자 다시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의주로 피난하여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고, 세자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는 데 열중하도록 하였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무기력하였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첩(勝捷)을 거두고,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등 우리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 장악하였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으며,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 이해 10월 왕이 환도하였다.다음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온 왜군으로 하여금 조총(鳥銃)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사목(軍功事目)을 규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는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자 납속(納粟)을 한 자에게도 납속사목(納粟事目)에 규정한 논공을 설시하도록 하였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 주로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허다하여 조선 후기 신분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임진왜란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에 이르게 되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으며, 곳곳에 산재한 유해(遺骸)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끔 하였다.

정유재란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어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丁酉再亂), 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중에 3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典籍)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서 귀중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며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서 왕이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때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얽어 옮기려고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하였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병(兵)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강한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하였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인품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고,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한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호성(扈聖) · 선무(宣武) · 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 · 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왕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는 유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되었다. 서화에 뛰어났는데,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그것을 알고 선조의 어필(御筆)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능은 목릉(穆陵), 전(殿)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