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代 文宗 1414~1452 > 재위1450~1452.
조선의 제5대왕으로 이름은 향(珦)이고, 자는 휘지(輝之)이다. 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고, 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였고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하였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하였으며, 1445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시대의 정치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하여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宗親) 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言官:臺諫)의 종친에 대한 탄핵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세종의 호불적 경향(好佛的 傾向)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하여 이루어진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內佛堂)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儒者的)인 언관(言官)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하였고, 언로(言路)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朝臣)6품 이상에 대하여는 모두 윤대(輪對)를 허락하였으며,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에 대하여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 東國兵鑑》,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고려사》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국사 高麗國史》 이래 여러 차례 개수(改修)·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며,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하여도 필요한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그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軍政)에 관심이 많았는데,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여 제시하였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의 학문은 유학(儒學:性理學)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하였고, 예·초·해서(隷·草·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며, 능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 6 代 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
아버지는 문종이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비는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이다.1448년(세종 30)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해 문종이 왕세자를 위하여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행할 때,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하여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는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이개, 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이들이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해 윤9월, 저녁 강의에서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묻자 박팽년은 “생각하는 바가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하여 경연에 강의할 때마다 자신의 배움에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허가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 김종서, 정분(鄭苯) 등을 불러 그들에게 자문하여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이해 10월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의 계책에 따라 무사를 거느리고 가서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대궐에 불러와서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작은 아버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은 조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강화의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되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왕의 의사가 무시된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하여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조선도도 朝鮮都圖》, 《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는데, 이는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이었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둔전(屯田)설치계획을 수립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급박한 주변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복위사건의 주동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므로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곧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행할 의무이기도 하였다. 이때 마침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하여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에 의하여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하여 복위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 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 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 7 代 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세종의 둘째아들이며 문종의 아우이다.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 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 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또,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이해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니 7월부터 그는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10월에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은 폭력으로써 정권을 탈취한 사건인데, 하룻밤 사이에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대권을 한 손에 쥐고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이해 8월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으며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1456년(세조 2)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였다. 1457년(세조 3)정월에 비로소 원구단(圓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이해 6월에 상왕(上王: 端宗)을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는데,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가 노산군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奏請)에 따라 이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해에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수하였으니, 즉 태조, 태종, 세종, 문종 4대의 치법(治法) 정모(政謨)를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이고, 후에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의하여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니 최항(崔恒) 등에 명하여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하여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 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키고, 1464년에는 제도(諸道) 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하여 장정(壯丁)의 군적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 1466년에는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으며, 종래의 시직(時職: 현직), 산직(散職)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그만두고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고,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여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까지 하였는데도, 자기에게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은 그 지방출신의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키자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하여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 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문화사업에는 《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 周易口訣》, 《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의 편집, 발간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외국과의 관계는 왜인(倭人)에게는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 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시키고,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 보다는, 다만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의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으니, 이것은 어린 단종 때의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직계제를 시행함으로써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여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1456년 6월에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학문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으니, 이런 까닭으로 국정의 건의규제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는 반면에,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소관의 사무 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에 대비하여 그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으니,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중심으로 운영하였으므로 정부의 중요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으니, 즉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게 되니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고, 따라서 승정원의 기구는 점차 강화되어 이러한 추세하에서 1468년에는 원상제(院相制)의 설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원상은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는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세조대의 정치는 그 실행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하여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마는, 정치발전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 대화정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시호는 혜장(惠莊)이고,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며,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 8 代 睿宗 1450~1469> 재위1468~1469.
세조의 제 2 왕자로 이름은 황(晃) 자는 명조(明照) 초자(初字)는 평보(平甫).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이고, 계비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처음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 3)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壽康宮)에서 즉위하였으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즉위초에는 세조의 유명을 따라 한명회, 신숙주(申叔舟)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고, 이들로 하여금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고,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였다. 이해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1469년 3월 삼포(三浦)에서의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하였으며, 같은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해 6월에 〈천하도 天下圖〉가 이루어졌고, 7월에 《무정보감 武定寶鑑》이 이룩되었다.
9월에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하였으나 반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예종은 28세에 즉위하였으나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이 원상으로서 서정을 의결하였으므로 왕권은 약화된 시기였다. 그러나 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세조의 정치방법에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세조처럼 언관(言官)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여 언관에 대한 좌천·파직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세조시대에서 성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호는 양도(襄悼)이다. 능은 창릉(昌陵)으로 고양(高陽)에 있다.
< 9 代 成宗 1457~1494> 재위1469~1494.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 세조의 長子로 追尊)의 둘째아들로 이름은 혈(娎) 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천품(天稟)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世祖妃)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므로 그를 왕위에 계승하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誥命)을 받았고, 세조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 준(龜城君浚)을 유배시켰다.1474년에 덕종을 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고,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堅)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뒤의 燕山君)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므로,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어서 1482년에는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고려때부터 편찬하여오던《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 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하여 《대전속록 大典續錄》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英陵: 世宗의 능)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 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고, 수령과 변장 임명시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고(怨苦)를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으며,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사림세력(新進 士林勢力)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하여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한 바 있으며,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 에 독서당(讀書堂, 일명 湖堂)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또 편찬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徐居正) 등의《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동문선》,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성현(成俔) 등의《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4천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그의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한쪽에서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회뢰(賄賂)가 성행하였으며,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 일으키게까지 하였다. 그는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인과 딸 11인을 낳았는데,
제10대 왕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제11대 중종이 된 진성대군 역(晉城大君 懌)은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었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 10 代 燕山君 1476~1506> 재위1494~1506.
《연산군 燕山君 墓와 신씨愼氏 墓》
폐비 신씨는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2살 나이에 고모부(姑母夫)인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成大君 훗날 中宗)과 결혼하여 고모인 연산군 부인과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府夫人이 되었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부부인 신씨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지만, 그 녀의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으로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반정군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에 둘 수 없다하여 왕비 신씨(후일 단경왕후로 복위)도 7일 만에 폐비시켜 사저로 쫓아냈다.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고모인 연산군 부인과 함께 19세에 폐비가 되었으니 겨우 7일을 왕비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고모와 조카가 동시대에 모두 왕비에서 폐비가 되었다.
신수근은 누이동생을 연산군에게 시집보내고, 딸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中宗)에게 시집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딸은 왕비가 되었지만, 누이를 생각하면 딸을 버려야 하고, 딸을 생각하면 누이를 버려야 함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중종반정을 거절하므로서 결국 누이와 딸 모두 폐비가 되고마는 비극을 맞았다.
조선 제10대왕으로 휘는 융(㦕)이다. 성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왕이 된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그냥 세자로 삼았다 한다. 그리하여 1494년 12월에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는데, 재위 12년 동안 너무도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므로 폐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 譜》에도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 …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 (炮烙 : 단근질 하기), 착흉(착胸 :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운운하는 말로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 · 병고(兵庫)의 수리, 또는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현명하였던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수도 있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 5∼6년 동안에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물론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도 문제는 있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그렇게 많은 사류들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것은,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 (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 그들의 정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략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던 것이라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즉, 그의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기 위하여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 또 한번의 사화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화의 직접적인 구실은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이 되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이 두 사화의 양상은 모두가 참혹을 극했던 것으로서, 김종직의 경우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을 하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 치사하게 하였고, 기타 윤필상 (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 정여창 (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패륜과 무도함을 극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그러나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 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스러운 일로 생각되던, 이른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며,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고, 기타 이러한 조치들과 관련되었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심은 소란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이것이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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