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代 太祖》
《太祖大王 健元陵》
봉분에 억새를 입혔다.
승하하시기 전 태어나고 젊은 시절 꿈을 펼치고 호령하시던 함흥땅에 묻히시기를 원하셨으나 한양에서 그 먼 땅에 모실 수가 없어 현 구리시 동구동에 장례를 모시고 고향의 추억의 상징적인 억새를 함흥에서 떠와 봉분에 입혀 위안을 드렸다.
홍살문에서 마주 보이는 정자각 지붕위로 태조의 봉분이 보인다.
장명등을 위시한 모든 석물들이 품격이 장엄하고 웅대하다. 능침을 두른 호석에는 금강령과 금강저 연꽃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둘려져 있다.
《1代 太祖 1335∼1408 》 (재위1392~1398)
조선을 세웠으며, 이름은 성계, 호는 송헌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의 벼슬을 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私兵)2, 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 제일 먼저 입성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과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대파,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 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명을 인솔, 평안도 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무렵 여진족은 삼선(三善), 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시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그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뒤 동북면원수지 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 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우왕 3)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출진,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하였다.
1384년 동북면 도원수 문하찬성사(東北面 都元帥門下 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이 해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한때 철령鐵嶺 이북이 원나라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반환을 요구하여 서로 대립했다. 이에 최영은 명과의 실력대결을 주창하여 우선 전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명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반면 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전쟁능력 · 시기 · 효과 등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첫째, 군량미 · 군사규모 등에서 명과 대결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전쟁시기를 여름철로 잡은 것은 잘못인데, 이 시기에 전쟁을 벌이면 농사를 망칠 뿐만 아니라 농민의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셋째, 거국적으로 대군을 원정시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
넷째, 당시 장마철이므로 전투하기에 불편하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강력한 반론을 내세우며 요동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결국 원정이 단행되어 최고사령관 최영을 8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각각 임명했다. 1388년 5월 원정군이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는 휘하 장병의 절대적인 지지와 조민수의 동의를 얻어 회군을 단행했다.
그해 6월에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처음에는 종실 중에서 국왕을 택하려 했으나 조민수 · 이색의 주장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곧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무렵 그는 신흥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으며,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보내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1393년(태조 2)3월 15일부터 국호를 朝鮮으로 하였다.
왕사(王師) 무학(無學: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정하였다.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 사직, 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 北門), 흥인문(興仁門: 東大門), 숭례문(崇禮門: 南大門), 돈의문(敦義門: 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 소덕문(昭德門), 창의문(彰義門)· 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한편으로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하여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착하고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1398년 태조의 와병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 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 그들을 제거하였으며, 곧이어 방석, 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 · 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하였다.
태조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셨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을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노여움은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셨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노여움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셨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셨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 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
《2代 정종(定宗》
《2代 定宗 1357~1419 》 (재위1399~1400).
태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경(曔), 초명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다.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 월성부원군 (判禮賓寺事 贈門下左侍中 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고, 슬하에 15군, 8옹주를 두었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으며, 1389년(창왕 1)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 (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아래에서 격파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 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 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책봉문제가 제기되자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하였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었다. 그 1개월 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에 의하였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 않았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고,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귀를 약화시켰으며,
1400년 2월 이른바 제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
(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계속하여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 · 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또,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고,
11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노비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擊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을 삼았지만,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셨고,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셨다.
1419년(세종 1)12월 온인공용 순효대왕(溫仁恭勇 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4월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 순효대왕(恭靖溫仁 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오랫동안 묘호(廟號)가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풍덕에 있다.
《 3代 太宗 》
《3代 太宗 1367~1422》 (재위1401~1418.)
이름은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齊)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고, 왕대비(王大妃: 공민왕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게 한 뒤 이성계를 등위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을 뿐,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되었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해 옴에 따라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흔) 모만(侮慢)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 대명관계를 타결하고 귀국하였다.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세자로의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정하여 1등이 되었고,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 · 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 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 윤목(尹穆), 유기(柳沂) 등을 각각 목 베었다. 그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 (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 · 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기도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 · 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 · 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 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 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 - 의정부 - 육조의 국정체제를 왕 - 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1403년과 1406년에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이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 · 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 · 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留都府), 6부(府), 5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74도호부(都護府), 73군(郡), 154현(縣)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 · 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 · 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 (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 영길도를 황해, 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 · 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 · 소 · 부곡도 가까운 군 · 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하고,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특지(特旨)로써 기능을 헤아려 서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內侍衛)를 설치하였으며, 10사(司) 중 9사를 시위사(侍衛司)로 개편하였다. 군사 지휘체제에 있어서는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하여 왕명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게 하였고,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시키면서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누어서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한편, 지방군은 1409년 11도(道)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고, 1415년경까지 해안을 중심한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을 정비하였으며, 1410년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 공사노, 교생 등으로 잡색군(雜色軍)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내륙을 수호하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侍衛牌)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하여 강화하였고,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소선 10척씩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고,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척을 새로 만들었으며, 1413년부터 1415년까지는 거북선(이순신의 그것과는 구조가 다름)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선저(船底)에 석회를 발라 충해를 방지하는 축선법(畜船法)과 선저를 연기로 그을려서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烟熏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법 · 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양전사업으로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量田)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보충 · 조운타개 · 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 · 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1405년에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을 감하여 군자전으로 충속하였으며, 외방거주를 원하는 전직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여 5만∼6만결을 새로이 확보하였고,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하여 공 · 사천인 자손과 기첩(妓妾)과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으며, 평양, 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각종 공신전 · 과전 등 총 11만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 · 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대량으로 만드는 등 비축곡의 규모가 1413년에 356만8700석이던 것이 1417년에는 415만5401석에 이르렀다.
1401년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 인신(印信)을 받았으나 성조(成祖)가 계위하자 이듬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고 혜제가 준 고명, 인신을 개급하여 줄 것을 요청, 1403년에 새 고명, 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시켰다. 이후 여진인과 입거 요동인을 둘러싸고 불편한 적도 있었고, 또 1년에 세 차례의 사신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 · 환관 · 말 · 소 등의 무리한 진헌이 있기도 하였지만, 서적 · 약재 · 역서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왜인관계에서는 1407년에 흥리왜인(興利倭人)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구를 입증하는 행장(行狀)을 발급하였고, 도박소(到泊所)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로 한정시켜 병비를 정탐하고 난언작폐함을 제약하였으며, 1414년에는 왜인범죄 논결법을 정하였다. 1417년 경상도에서의 선박건조를 금하고, 이듬해 염포를 추가로 개방하였지만 왜인제약은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입국왜인, 왜선, 체류시일, 조어지(釣漁地) 등을 제한하였으며, 거주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실시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404년에 상경시위제를 실시하고, 1406년에는 경성 · 경원에 무역소를 개설하였다. 서북국경의 개척은 1403년 강계부, 1413년 갑산군, 1416년 여연군을 각각 설치하면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동북면은 왕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성을 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에 있는 덕릉(德陵), 안릉(安陵)을 함흥으로 옮겼으며, 1415년에 길주, 영흥성을 축조하면서 1417년에야 경원부를 복설하였다.
그밖에 유구(琉球) · 자바 등과도 교섭이 있었고, 유구로부터는 왜구에 의해 잡혀간 포로를 송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沈정), 박습(朴習)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기여하였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개국초에는 일시 불우하기도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종을 계위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고,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이듬해에는 성덕신공 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 文武光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683년(숙종 9)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의 호를 더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공정(恭定)의 시호를 받았다.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 (讓寧君大)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위와 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외정책과 함께 부수적인 정책사업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 덕수궁, 경회루, 행랑, 청계천을 조성하였으며,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고 초가를 개량하였다.
한편, 《경제육전원집상절 經濟六典元集詳節》, 《속집상절 續集詳節》을 수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선원록 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으며, 법전의 조종성헌 존중주의(祖宗成憲 尊重主義)를 확립하였다.또한, 백관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그뒤 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禔)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선위하였다.
헌릉(獻陵) 태종 陵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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