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강화(김포옛길) 제 2 금릉옛길」

鄕香 2022. 10. 24. 20:54

 김포의 地名은 고구려 장수왕(475년) 때 신성한 포구마을이라는 의미로 黔浦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은 757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흔히 사용하지 않고 어려운 한자인 검(黔)보다 일반적이고 좋은 의미의 한자인 금(金)이 쓰이면서 지금의 김포(金浦)가 되었습니다. 다른 지명 금릉(金陵)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는데, 

金陵은 김포의 대표 문화유산인 김포장릉과 김포의 500년 중심지였던 官衙가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금릉옛길에서 김포장릉章陵과 김포향교의 옛스러움과 현재 김포의 변화된 모습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경기옛길 안내판 글 옮김) 

 

 

제2 금릉옛길 코스 약도

 

 

김포 근린공원 출발

 

 

김포새장터공원 2022년10월15일(토요일) 경기옛길개통식행사를 열었던 장소

 

 

풍무도서관 앞 버스정류장 정경,

 

 

리본 따라 터벅터벅

 

 

서해1차아파트버스정류장을 지나갑니다. 

 

 

풍무사거리 경기옛길 안내표시판을 보고 직진 운양역까지 거리는 10.9km

 

 

천주교 풍무동 성당 표시판 앞을 지나갑니다. 

 

 

승가대 고갯길을 걸어 오르는데 길가에 붉게 핀 맨드라미꽃 반김에 보도블럭의 척박함을 잠시 잊게 해줍니다.

 

 

고개마루턱에 오르니 버스정류장, 그 우측은 상당한 큰 공원묘지입니다.

 

 

묘지공원 능선에 소나무 한 그루 멋진 자태 靑靑합니다.

 

 

우측 철망울타리 옆길로 들어섭니다.

 

 

절조망 휀스는 장릉의 울타리입니다. 

 

 

장릉 울타리는 끝나가고 수림 사이로 마을이 보입니다.

 

 

장릉 울타리 끝 무렵에 장릉 설명글판과 경기옛길 인증도장함이 반깁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월요일, 궁원 · 박물관 등 문화재기관이 쉬는 날이라 입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10월26일(수요일) 다시 찾아가 정자각에서나마 능침을 사진에 담아 온 것을 올립니다. 

 

 

김포 장릉은 雙墳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봉분 아래로 얕은 호석(護石)으로 12각형으로 12支 의미를 주어 둘렀다. 이는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각 능침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고 두 능침 양 측면과 뒤에 석양(石羊) · 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그 바깥쪽에 곡장(曲墻)을 삼면에 둘렀으며, 두 혼유석(상석) 아랫단 가운데 장명등을 세우고 좌우에 석마(石馬)를 거느린 문인석과 무인석이 나란히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능침 아래는 정자각 · 비각 · 수복방(守僕房) · 홍살문 · 재실이 있다.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章陵 정경. 홍살문 위 여객기 한 대 날아오고 있다.

 

(이 사진은 10월17일 완주한 날이 능원 휴무일이어서 관람을 못하고 10월26일 재방문하여 담아온 사진)

 

제주항공여객기

 

 

수도 없이 수 분마다 날아간다 

 

 

〈김포 장릉/ 章陵〉

원종(元宗1580-1619)의 이름은 부(琈), 시호(諡)는 공량(恭良)으로 인조의 아버지이며 선조의 다섯 째 아들이다.

선조 20년(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가(大駕)를 호종한 공로로 선조 37년(1604년)

호송공신(扈聖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인조반정 뒤 대원군大院君에 추존(追尊) 후 인조 10년(1632년) 왕으로 추존되었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으며, 인조 즉위(1622년) 흥경원(興慶園)의 원호(園號)를 받았다. 인조 5년(162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5년 후 인조10년(1632년)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章陵)이라는 능호(陵號)와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약칭 원종이라는 尊號를 받았으며 인조13년(1635년) 종묘에 부묘되었다. 

 

비(妃)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 氏 1578-1626) 는 좌찬성(左贊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며 인조의 어머니로 선조23년(1590년) 선조의 5남 정원군(元宗 琈)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으로 봉하여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進封되었고 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하였다. 인조 10년(1632년)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 약칭 인헌왕후)라는 徽號를 받았다. 인헌왕후는 인조를 비롯 능원대군(綾原大君) · 능창대군(綾昌大君) 두 대군 등 3왕자를 낳았다. 능호는 章陵으로 원종과 쌍분을 이루고 있다. 인조13년(1635년)원종과 더불어 종묘에 부묘되었다. 

 

(이 사진은 10월17일 완주한 날이 능원 휴무일이어서 관람을 못하고 10월26일 재방문하여 담아온 사진)

 

인헌왕후 구씨(1578 523~1626 210)는 조선 추존왕인 원종의 정실(正妃)이자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어머니이다. 인조 아래로 능원대군(綾原大君) · 능창대군(綾昌大君)를 더 두었다.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본관은 능성이다

정원군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君夫人)에 봉해졌다가 인조반정 후 남편 정원군이 대원군에 추존되면서 부부인으로 격상되었다 궁호는 계운궁이고 시호는 경의정정인헌왕후이다.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아버지 구사맹과 어머니 평산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증조모는 거창 신씨이며 신승선의 손녀이자 신수근과 거창군부인의 조카딸이며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의 사촌여동생이기도 했다 숙부 구사안은 중종의 딸 효순공주의 남편이다.

인헌왕후의 부계(父系)로는 할아버지인 구순(具淳)은 세종의 손녀인 길안현주의 외손자이고 할머니인 이씨는 효령대군의 현손으로 조부모는 태종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 지간이다.

모계(母系)로는 어머니 신지향(申芝香)의 할머니 이씨가 세종의 아들인 계양군의 손녀이다. 이처럼 왕실과 이중삼중으로 얽힌 핏줄로 인해 인헌왕후의 부모는 세종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 지간이며, 남편 정원군과도 태종과 세종을 공통 조상으로 한다.

 

인헌왕후 구씨 아버지 능안부원군 구사맹, 어머니 평산부부인 신지향. 부부가 모두 세종의 외5代孫

인헌왕후 구씨 할아버지 구순, 할머니 파평 신씨 신화국申華國(신립의 누나)모두 세종의 외5대손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사출한 것입니다.  

정면으로 마주해 볼 때 좌측이 원종 능침, 우측이 인헌왕후 능침입니다.

  

 

입구주변과 안내게시판으로 관람을 대신하고 되돌아서 나옵니다.

 

 

다시 장릉 철조망울타리를 끼고 가려나 싶어 느낌이 좋았는데 우측 차도 옆 인도 나뭇가지에 경기옛길 리본이 曰 '이리 오너라' 

 

 

장릉 영역을 끼고 고개를 넘습니다.

 

 

고개를 넘자 바로 장릉 산자락에 김포시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건축인 김포시청 담 안쪽에 조선기와 지붕이 보이는데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같아 들려보고 갑니다.

 

 

예사롭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담을 돌아서 김포시청 정문으로 들어갑니다.

 

 

시청 정문 좌측 주차장 안 옆 귀퉁이 한 면 옹색한 자리에 위치해 있는 비각 앞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정면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측면으로 담은 내용은 조선시대 이곳 김포에 부임했던 군수와 현령들의 선정비를 비각까지 세워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비각 앞까지 주차공간이어서 보존한다는 말이 무색합니다. 비각 앞에 한 3m 정도 공간을 두고 잔디라도 조성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판 감포현사 이공 보정 청덕 선정비 (判 金浦縣事 李公 補丁 淸德 善政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41년 2월14일 세종 23년 판 김포현사(判 金浦縣事) 이보정( 李補丁)이하직(下直)하니 임금이 인견(引見), 분부하시기를 "농상(農桑)을 권장, 독려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렴(賦斂)을 적게 받는 것이 수령이 할 일이니 가거든 힘쓰라"하시였다. 공(公)은 왕명을 받들어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의식주를 해결하고 교육진흥으로 충효정신을 함양하며 요역과 부렴을 공평하게 집행하여 민원(民怨)을 없게 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으며 어머니를 임지에 모시고 극진히 효를 다 하였다. 어머니는 청렴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독려 하시니 공(公)은 청덕(淸德), 애민(愛民), 평반(平反) 정치를 이룩하였다. 

형정(刑政)을 엄정하게 집행하여 억울한 죄인이 없게 하고 형량을 가볍게 하는 인정(仁政)을 실행하였다. 공은 청렴결백하여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며 세종 29년(55세) 어머니 상(喪)을 당하니 세종 임금께서 공이 청빈하여 장례비가 없음을 아시고 과외록(科外祿)을 하사 하시는 큰 은총이 있었다. 공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관 현령이라 기록되고, '국조명신록'에는 원의공신, 청빈수분(淸貧守分)이라 등재 되었다. 

 

 

〈김포 현령 · 군수 선정비(金浦 縣令 · 郡守 善政碑)〉

조선후기 김포 현령 · 군수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풀었던 분들을 기리고자 당시 고을사람들이 건립한 碑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릉군지(金陵郡誌), 김포군지(金浦郡誌) 등 사료에 김포 현령 · 군수 등의 선정비는 20기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선정비는 관찰사 김도희(1835-1837), 현령 민응희(1620-1621), 군수 오달천(1630-1635), 군수 이이성(1639-1644), 군수 홍백선(1799-1801), 군수 김경연(1824-1826), 군수 이병예(1844-1847), 군수 서상옥(1867-1870), 군수 이증윤(1875-1878), 군수 이필여(1901-1902) 등 10기가 김포시청 내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5월 김포 현령 · 군수 선정비(金浦 縣令 · 郡守 善政碑)의 훼손과 부식을 방지하고 시민에게 역사교육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정비하고 보호비각을 설치하였다. 

 

 

김포시청 앞 사거리 정경입니다.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우측에 김포시민회관 그리고 실내체육관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공원 앞 사우광장마을버스정류장을 지나갑니다.

 

 

사우광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합니다.

 

 

사거리에서 파란신호를기다리며 뒤돌아본 사우문화체육광장 정경입니다.

 

 

체육광장 사거리를 건너자 이내 사우(김포시청)전철역과 바로 그 뒤 사우사거리입니다. 좌측방향으로 건너갑니다.

 

 

김포시청에서 곧장 내려와 사우사거리에서 좌측 횡단보도를 건너 통진 방향으로 갑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갑니다.

 

 

돌문마을 앞 표시석을 지나갑니다.

 

 

사우사거리에서 계속 직진해 와 북변동거리를 걷습니다. 

 

 

북변동우체국 앞을 지나갑니다.

 

 

여기서 김포향교로 가는 짬뽕의 신 옆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전신주에 경기옛길 안내판이 보이고 조만치 조선기와지붕에 궁이나 사찰 등에서나 볼 수 있는 풍우가림판 있는 한옥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김포향교 분명하겠습니다.

 

 

허! 이게 무슨 일? 장릉은 쉬는 날, 김포향교는 공사로 난장판, 가는 날이 장날 일세. 어쨌거나 외삼문으로 성큼 들어서 성현들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부터 둘러봅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을 교육 · 교화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입니다. 김포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1960년대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으며, 건물 배치는 前學後廟의 형태로 외삼문 안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그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東廡 · 西廡가 배치되었습니다. 그 외에 유생들의 거처인 東齋 · 西齋와 제사공간과 교육 공간을 구분짓는 내삼문과 담장 그리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감싼 외삼문과 그 담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향교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명륜당 뒷쪽 높은 지대는 공자와 성현들의 제실인 대성전 영역으로 내삼문을 둔 담장을 쌓아 강학 공간과 제사 공간을 구분지었습니다. 대성전에는 동무와 서무가 있으며 내삼문을 중심으로 둘려진 담장이 감싸고 있습니다. 내삼문 열린 문 사이로 대성전 현판 세 글자 중  대성 두 글자가 보입니다. 

 

 

대성전은 앞면 삼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옆에서 볼 때 사람 人 字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곳입니다. 대성전 단아래 좌우로는 동무와 서무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무(東廡) 제례복 또는 제기를 두거나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

 

 

서무(西廡) 제례복 또는 제기를 두거나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 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좌우로는 유생들의 거처(居處)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東齋

 

 

西齋

 

 

김포향교를 나와 통진성당으로 향합니다.

 

 

경기옛길 리본 아래 길 안내표시대로 태양미용실 옆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좌측 길로 갑니다.

 

 

조만치 있는 버스정류장을 지나 직진입니다.

 

 

이곳을 거쳐 가는 버스노선표를 참고로 담았습니다.

 

 

전신주에 금릉길표시판이 우측 길을 가리낍니다.

 

 

들어선 우측 길 정경입니다. 

 

 

하나로 마트 주차장을 지나 김포 사거리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무한리필도 사양하고 갑니다.

 

 

좌측 김포성당을 잠시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김포 성당〉

김포성당은 걸포리 公所로 시작하여 8.15 광복 후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4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년 후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제3대 신원식 루카 주임신부 및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당시 마송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이영우 대령)의 군 장비 지원으로 1956년 12월17일 봉헌식을 가졌다. (안내문 옮김)

 

 

본 성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운치 있는 정경.

 

 

본 성당은 한국전쟁 후의 석조건물로서 정면 중앙 상부의 종탑과 그위에 8각형식의 돔과 십자가를 올렸고 뾰족한 아치형태의 2개의 창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입구는 둥근 아치형태를 하고 있으며 평면은 좌측과 우측에 부출 입구가 돌출되어 있어 라틴십자형의 평면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김포성당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화강석의 구조적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건축학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등록문화재 542호)

 

 

성당 내 복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성당을 나와 김포사거리에 이르러 파란신호를 기다린다.

 

 

김포사거리를 건너 백세삼계탕 옆 하천둑길로 들어섭니다.

 

 

전신주에 금릉길표시판이 보입니다.

 

 

데크통로로 들어섭니다.

 

 

(풍무역(새장터공원)→ 2.8km - 김포장릉 - 2km - 김포향교 - 4.2km - 김포아트빌리지 - 3km - 운양역 = 총12km ). 금릉길 12km에서 아직 절반에 못 미칩니다. 

 

 

보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다리 난간기둥 양쪽에 이정표가 정답네요.

 

 

虹霓橋(무지개다리)를 건너 우측 둑길로 갑니다. 

 

 

아는 이는 계속 하천끼고 둑길로 가겠지만, 나는 길치입니다. 리본만 찾아 길갑니다. 자동차 가는 방향으로 갑니다.

 

 

좌측으로 들어서 길 건너를 보니 걸포중앙공원입니다.

입구 좌측에 경기옛길 이야기판도 보입니다.

 

 

〈걸포중앙공원〉

 중앙공원으로 들어서서 가로질러 갑니다 큰 도로가 나올 때까지 -

 

 

〈중국 하택시와 자매결연에 따른 기념물〉

2009년 희망근로사업 경기도 특수시책으로 글로벌 공원(Global Park) 조성계획에 따라 국제화시대에 자매결연 도시와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 세계의 다양하고 격조 높은 공원조성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자하여 세웠다고 함.

 

 

김포청년회의소 상징성 조형물을 지나 공원 중앙을 질러갑니다.

 

 

어린이 놀이터 등 각종 시설이 꾸며져 있습니다.

 

 

물놀이장

 

 

가족나들이 하기 좋은 곳입니다.

 

 

중앙공원을 질러나오니 서촌교 앞입니다. 서촌교를 건너 바로 우측 둑길로 들어섭니다.

 

 

다리 끝 머리에 안내표시판이 보입니다.

 

 

하천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하천따라 갑니다.

 

 

좌우 길이 손짓해도 앞만 보고 하천 따라 갑니다.

 

 

알 수 없는 고가도로 밑 하천 따라 갑니다.

 

 

금릉옛길의 여정을 보니 왕릉에 향교에 아트빌리지 등 곳곳이 문화탐방의 길입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4.4km입니다.

 

 

이쯤에서 노래 한곡 불러도 되겠지요

개울을 보고 길가자니 외나무다리 생각이 납니다.

 

 

푸른 무청을 보니 내 고향 옛 압구정리도 생각이납니다. 

 

"복사꽃 능금 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 달이 뜨는 내 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어진 그날 밤아 추억은 어디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

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

 

고 최무룡 선생이 부른 '외나무다리'를 즐겨 부르던 시절이 꽃다운 20살 때 였습니다.

 

 

수력발전소처럼 생긴 7개의 수문이 달린 건물입니다만  우천 시 범람을 막기 위해 빗물을 조절하는 곳이라고 촌로가 알러줍니다.

 

 

작은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또 비슷한 건물이 있네요. 앞서보다 수문이 1개적은 6개입니다.

 

 

휘어진 길 끝에 수로는 끝납니다.

 

 

빗물조절장 정문 앞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보이는 마을길로 들어섭니다.

 

 

우측 전신주에 금릉길 안내표시판이 보입니다.

 

 

큰 도로가 보입니다.

 

 

좌측 보이지않는 횡단보도를 이용해서 길 건너 인도로 가야합니다.

 

 

중앙분리대 끝나고 첫 신호등 있는 곳까지 곧장 갑니다.

 

 

신호등 기둥에 금릉길 이정표가 빤히 보입니다. 길 건너 좌측으로 100m이내에 금릉옛길 두 번째 인증함이 기다립니다.

 

 

금릉옛길 종착점 운양역까지 3.2km입니다.

 

 

쉼터 안에 터줏대감으로 부임하신 금릉옛길 인증함이 계십니다.

 

 

인증함에서 쬐끔 걸으니 그 이름도 반가운  '김포아트빌리지'

 

 

여기서 한옥거리를 거치면 제법 넓은 공간에 김포문화원과 오상관 건물이 나옵니다 금릉옛길은 마주 본 오상관 건물 우측 뒤 산으로 이어지는 데크계단으로 들어섭니다. 

 

 

김포아트빌리지 안내약도

 

 

장릉처럼 여기도 오늘(월요일)은 쉬는 날인가 봅니다. 중심부로 걸어 갑니다.

 

 

'훌쩍 떠나고 싶은 날' 그래서 훌쩍 여기에 왔네.

 

 

저 그네벤치 타려니 짝지와 함께오라 하네.

 

 

 고요한  리본을 바람이 희롱하네

 

 

어디가나 정갈한 우리의 화장실 그 문화 세계 제1일세. 이용하는 국민의식은 아직 일세.

 

 

닭장 같은 아파트들이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덮칠 듯이 솟아 있네.

 

 

日月圖屛風 앞 의자에 앉으면 나도 임금님이 되려나? 아님 무병장수 할 수 있으려나?

 

 

한옥카페라- 목이 칼칼해서 생강차나 마실까 싶어 목차를 훑어보니 한방차는 가물에 콩 나기요 무슨 무슨 라데 일색이네 

 

 

화초가 예뻐서 잠시 기웃거렸다오.

 

 

오상관(五常館)

 

 

김포문화원 

 

 

김포문화원 건물 뒤 정경 

 

 

오상관 건물 뒤 철조터널 들어서자 좌측 아파트로 가는 길로 들어서 12m 가다가 바로 우측 데크길로 들어섭니다.

 

 

우측 데크길로 들어섭니다.

 

 

모담산으로 이어지는 데크길

 

 

길은 계단으로 변신하고

 

 

이제부터 모담산 산책로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가로놓인 포장도로 건너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오솔길 입구에 리본이 보이고 가로등 기둥에 금릉옛길안내스티커가 보입니다.

 

 

내게는 더없이 좋은 길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도록 즐겁습니다.

 

 

파인애플매트 친환경적이고 길 패임 방지에 최고이겠습니다.

 

 

모담산 전망대를 지나서야 바라봤습니다. 여인은 무서워 ~~!

 

 

이제 하산인가 싶었는데..

 

 

안내 리본이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데크계단으로 갑니다.

 

 

리본은 다시 포장도로 건너 언덕 진 오솔길로 들어서네요.

 

 

언덕이든 비탈이든 나무 무성한 숲길이면 나는 좋아라!

 

 

긴 의자 둘이 날 보고 쉬어 가라하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 바로 갑니다.

 

 

리본양 왜 멈췄나요? 저 앞은 뭐죠? 가볼게요

 

 

어! 리본양 어느새 앞서와 있군요. 아하! 모담폭포 가는 길이네요

 

 

다시 데크계단인가요?

 

 

산중에 사장교? 여인 혼자 호젓하다. 

 

 

사진 몇 장 담고 보니 여인은 저만치 앞서 가네. 

 

 

이제 모담산 끝자락인가 보다.

 

 

모담산 마지막 데크계단이랍니다.

 

 

금릉옛길 안내표시판을 보니 종착역은 900m입니다.

 

 

내려온 데크계단을 바라보니 마치 미끄럼틀 같습니다.

 

 

이것이 모담폭포라는 인공폭포입니다.

 

 

리본양의 독촉에 다시 발길을 옮깁니다.

 

 

횡단보도 건너 드리워진 길을 타박타박 걸어갑니다.

 

'타박타박 타박네야 네 울면서 어디 가니 

내 엄마 묻은 곳에 젓 먹으러 간다

산 높아서 못 간다 물 깊어서 못 간다 

산 높으면 기어서 가고 물 깊으면 헤엄쳐 가지

과자 줄게 가지 마라 문배 줄게 가지마라 

과자 싫다 문배 싫다 내 엄마 젓 다오 

엄마산소에 와보니 달랑참외가 열렸네

그것 따서 맛을 보니 엄마 젖 맛 일세."

 

 

오늘도 탈 없는 하루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2022년 10월 17일(월요일)  금릉옛길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