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강화(김포옛길)제4 한남정맥길

鄕香 2022. 10. 31. 11:58

《경기옛길 강화(김포옛길) 한남정맥길》은 경기옛길 6대도로 중 마지막으로 개통된 막내입니다. 그 막내의 4남매에서 한남정맥 길은 또한 막내가 되겠습니다. 오늘 그 막내의 심성 모습을 살펴보고자 통진 성당 앞 버스정류장을 출발점으로 '통진 향교 - 김포국제조각공원 - 문수산 - 강화대교까지 13km 여정으로 들어섭니다.  

 

 

한남정맥의 최 북서쪽에 위치한 문수산은 해발376m로 산수의 어울림과 분단역사의 현장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옛 통진의 인문지성의 중심이었던 통진향교와 세계 유일하게 평화와 통일을 테마로 만들어진 김포국제조각공원은 세계 유명 조각가 16명의 작품 30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문수산성은 뱃길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에 맞서 치열한 격전의 역사가 살아 있으며 북한 개성의 송악산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남정맥으로 향하는 길은 외세 침략에 맞서 저항한 숭고한 숨결과 통일을 향한 마음을 되새겨 보는 길이겠습니다. (안내판글 옮김)

 

 

통진성당에서 출발하여 첫 사거리에서 좌측 길 건너로 이동합니다.

 

 

우측 도로 건너편 김포시통진도서관의 모습입니다.

 

 

제법 넓은 편도 1차선 도로를 따라갑니다.

 

 

김포 - 강화 간 이어주는 48번 4차선 국도와 합치는 삼거리입니다. 

 

 

건너편 호텔 라인 앞으로 횡단합니다.

 

 

48번 국도 변 인도로 강화방면으로 진행합니다.

 

 

인도에 걷는 사람 없으니 대신 잡초가 차지하고 길은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습니다.

 

 

〈통진두레문화센터〉

 

 

경기옛길 이야기 판 글입니다.

17세기 모내기법이 퍼지면서 여름 한 철에 모내기, 김매기 물대기 등 논농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아도 '모내기'라는 과정은 다른 농사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논농사에서 핵심적인 부분인데, 모내기는 물이 줄기 전에 재빨리 마쳐야 합니다. 그러니 모내기를 할 때는 한 명이 열심히 하는 것보다 마을사람들이 서로 도와서 일을 끝내버리는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 공동 노동 조직입니다. 말하자면 농사를 잘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끼리 팀을 이루어 함께 일 하는 것입니다. 모내기뿐 어니라 김매기, 추수 등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하면 훨씬 힘이 덜 드는 일들은 두레를 지어 함께 일을 했습니다. 통진두레놀이는 김포의 통진읍에서 있었던 두레를 바탕에 두고 한 해 동안의 농사 과정을 재현한 민속놀이입니다. 

논을 갈고 써레질하기, 볍씨 뿌리기, 모판에서 모를 찌기, 모내기, 세 번에 걸쳐 김매기, 벼베기, 탈곡하기까지 연속된 농사 과정을 열두 마당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과정 사이사이에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지내기나 두레 싸움 등을 넣어서 웃음을 더합니다. 두레끼리의 다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도 그 싸움까지 놀이로 재현한다고 하니 참 솔직한 재미가 있지요? 통진두레놀이는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199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통진두레문화센터에서는 이런 우리의 전통 놀이를 보존하고 가꾸는 노력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공연장에서 다양한 전통 공연이 진행되고 가족 뮤지컬도 있다고 합니다.

 

 

두레문화센터 길 건너에는 우리의 무적 해병대사령부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목에 안내표지판 통진성당으로부터 1.4km 지점입니다. 옆에는 화강암으로 깎아 세운 청송 심씨 묘지 표석이 보입니다. 

 

 

전신주에 달린 경기옛길 안내표지판이 있습니다.

 

 

좌측에 안내스티커가 문 같은 틀로 들어가랍니다.

 

 

 사각 진 파고라 안  데크계단에 아크릴지붕을 올려 마치 터널 같은 느낌을 주는 시설이 아랫길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파고라 데크계단을 내려서니 꿈에 그리던 별천지입니다.

 

 

저만치 전신주에 보이는 이정표입니다.

 

 

앞서 가시는 경기옛길 님을 보는데 '잊혀진 계절'이라는 이용의 노래가 웅얼거려 집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 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강화 김포대로의 종착지 강화대교까지 남은 거리는 8.8km임을 알려 줌과 동시에 가로놓인 길에서 좌측으로 가라고 일러줍니다.  

 

 

또다시 삼거리 입니다. 정면에 옥천당 버스정류장 안에 오리정 방향으로 가라는 안내 스티커가 있습니다.

따라서 좌측 군하리 방향으로 갑니다.

 

 

앞서 가던 경기옛길 님이 갈산교 다리 앞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우측 둑길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전신주에 안내표시판이 보입니다.

 

 

 

경기옛길 님 가시는 하천(농수로?) 둑길을 따라 갑니다. 

 

 

이름 모를 다리 건너서 건너편 하천둑길로 갑니다. 

 

 

조만치 보이는 다리 밑 둑길로 갑니다.

 

 

다리 밑 콘크리트 橋脚 앞에 서있는 이정표입니다. 통진성당에서 5km 지점이네요.

 

 

아스팔트 포장된 둑길, 내 걷기에는 흙길만 못하지만 논에 금빛으로 물든 벼이삭들 기쁨으로 가슴에 스며듭니다.

 

 

포내2교를 지나 하천둑길로 들어섭니다.

 

 

님이여 이 다리를 건너지 마오 ~~!

 

 

다리난간기둥에 안내스티커 반갑습니다.

여전히 저만치 앞서 가는 경기옛길 님 저리 길 걸으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

 

 

삼거리 우측 코너의 전신주에 우측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이정표 크게 보기입니다.

 

 

군하교를 건너갑니다. 

 

 

군하사거리에서 횡단보도 건너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통진 시가지를 지나면 우측으로 향교로 들어서는 골목이 있습니다.

 

 

통진향교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붉은색 주칠(朱漆)을 하는데서  홍살문(紅箭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거나 아이 돌(돐)떡으로 수수팥떡을 만들어 먹는 일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홍살문 상부 가운데 태극은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상태로서 우주 만물 구성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체를 말합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될 때 태극이 생기고, 이 태극이 둘로 갈려져 하나는 陰이 되고 하나는 陽이 됩니다. 이 음양의 배합으로 하여 천지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변화, 생성되고 새로워져 발전과 번영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태극은 우주생성의 과정을 상징한 직관적인 문양으로, 신성과 신비의 부호로 사용해 왔으나 차츰 쓰이는 범위가 넓어져 신성보다도 길상(吉祥)과 축복의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릉이나 열녀를 기리기 위한 동네의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에서도 태극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홍살문을 들어섭니다.

 

〈통진 향교(通津鄕校)〉

 

鄕校는 公子의 儒敎를 바탕으로 한 공립교육기관입니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하여 儒學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大成殿)이 존재합니다. 향교(鄕校)는 고려 태조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을 가르치고 文廟를 세워 유학의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됩니다. 따라서 공자의 사상과 성현들의 학식을 배우는 교육기관으로 국립성균관과 더불어 각 지방에서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을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배출한 국공립교육기관으로 일명 校宮교궁, 재궁齋宮이라 하였습니다.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조 개국 초기에 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영향을 끼친 것은 고려 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개국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성리학입니다. 향교는 각 고을마다 1개소의 향교가 세워지니 모두 360개소가 되었습니다. 현재 남한 내에만 234개소의 향교가 남아 있으며 유학진흥과 지역사회 교화의 본산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설명문에 의하면 통진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그 기능을 되찾았겠습니다. 건물 배치는 樓下進入으로 풍화루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정면으로 자리하고 그 좌측에 관리소로 쓰고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명륜당(明倫堂) 좌우에 유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위치해 있으나 통진향교는 예외적입니다. 교육 공간 뒤 높은 지대에 담장을 거느린 내삼문(內三門) 안쪽 제사 공간에는 대성전과 서무(西廡)와 동무(東廡)가 있습니다.  앞에 교육 공간, 뒤에 제사 공간을 둔 전학후묘 (前學後廟) 형식을 두고 있습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으로 볼 때 사람 人 字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뒷면과 옆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으며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겠습니다. 공포 형태와 수법으로 볼 때 17세기 말의 건물로 보이며 도내 향교 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습니다. 

 

〈풍화루(風化樓)〉

풍화루는 2층으로 1층은 3개의 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2층은 누각으로 지었습니다. 풍화루의 문을 들어서면 돌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앞뜰 좌우로 儒學生의 거처인 동측에 東齋 서측에 西齋라는 건물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동측에 보편적인 동재나 서재보다는 좀 더 긴 관리소라는 건물 한 동이 있습니다.

 

그동안 경기옛길 6대로를 걸으며 적지 않은 향교를 보았지만, 풍화루를 갖춘 향교는 통진향교가 처음입니다. 풍화루를 보면서 건축 당시 통진 수령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통진 풍화루는 주변의 음나무 고목의 풍치가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풍화루 안쪽 모습입니다. 4백여년의 세파를 품은 느티나무들의 자태와 위용이 풍화루의 아름다움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명륜당은 교육공간의 주된 건물입니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이름 있는 유학자(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며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고 지방의 民風 禮俗을 순화하는 祭享 敎育의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입니다.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당을 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중앙의 사부학당(중 · 동 ·  · 남학)에 대응합니다.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과는 기능이나 목적은 같으나 서원은 사학기관임에 반하여 향교는 지방관청에 속한 관학기관임에 차이가 있습니다.

 

 

향교의 각종 일을 맡아 보는 관리소입니다. 향교로서 마땅히 있어야할 유생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는 없고 관리소라는 이 건물만 명륜당 좌측에 있는데, 언제부터 전해온 구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 동재(東齋)만 있던 것을 지금에 와서 관리소로 사용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유생들의 거처인 동 · 서재가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내삼문(內三門)은 제사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강학공간과 구분 짓는 경계입니다. 명륜당과 내삼문 사이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대성전(大成殿) ② 서무(西廡) ③ 동무(東廡) ④ 내삼문(內三門) ⑤ 명륜당(明倫堂) ⑥ 관리소(管理所) ⑦ 풍화루(風化樓)

 

 

〈경기옛길 이야기판〉 

 

 

내삼문 아래에 세워진  "통진은 오래된 郡이요 김포시는 새롭게 세워진 .."으로 시작되는 "通津鄕校廟庭碑" 옆에 경기옛길 이야기 판과 인증함이 세워져 있습니다. 

 

 

잠긴 내삼문 벌어진 틈새로 바라본 대성전(大成殿)과 서무(西廡) 와 동무(東廡)의 정경입니다. 서무와 동무는 제사에 필요한 의관과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 때 음식을 차리는 공간입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위패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祀堂입니다.

본래 대성전에는 孔子, 顔子, 曾子, 子思子, 孟子 오성위(五聖位)와 송조이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문선왕(文宣王)은 중국 당나라 현종이 孔子에게 내린 시호(諡號)를 이릅니다. 우리나라의 18현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성전 안 정면 중앙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그 좌우 동서로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東從位》

 <宋朝二賢>

道國公도국공 周敦頤주돈이(濂溪염계) / 洛國公낙국공 程 頤정 이(伊川) * 정 호의 아우

<東國 9현>

弘儒侯홍유후 薛聰설총(氷月堂빙월당 慶州人) / 文成公문성공 安裕(珦)안유(晦軒회헌 順興人) / 文敬公문경공 金宏弼김굉필(寒喧堂한훤당 瑞興人) / 文正公문정공 趙光祖조광조(靜菴정암 漢陽人) / 文純公문순공 李滉이황(退溪퇴계 眞寶人) / 文成公문성공 李珥이이(栗谷율곡 德水人) / 文元公문원공 金長生김장생(沙溪사계 光山人) / 文敬公문경공 金集김집(愼獨齋신독재 光山人) / 문정공文正公 宋浚吉송준길(同春堂동춘당 恩津人) 이상 9位.


《西從位》

 <宋朝二賢>

豫國公예국공 程 顥정 호 (明道명도)정 이의 형 / 徽國公 朱熹주희 (晦菴회암)

<東國 9현>

文昌公문창공 崔致遠최치원(孤雲고운 慶州人) / 文忠公문충공 鄭夢周정몽주(圃隱포은 迎日人) / 文獻公문헌공 鄭汝昌정여창(一蠹일두 河東人) / 文元公문원공 李彦迪이언적 (晦齋회재 驪興人) / 文正公문정공 李麟厚이인후(河西하서 蔚山人) / 文簡公문간공 成渾성혼(牛溪우계 昌寧人) / 文烈公문열공 趙憲조헌(重峰중봉 白川人) / 文正公문정공 宋時烈송시열(尤菴우암 恩津人) / 文純公문순공 朴世采박세채(玄石현석 瀋南人) 이상9위 입니다.

 

 

어떤 찬사의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나무의 저 자태, 저 위용 .. 

 

 

풍화루 앞에서 좌측 통진이청(通津吏廳)으로 갑니다.

 

 

아늑한 시골 풍치 만끽하며 자박자박 발길 옮깁니다.

 

 

소담한 가옥들이 촘촘한 시골 마을, 이정표따라 요리조리 갑니다.

 

 

이제 포장도로가 등장했습니다. 좌측에 통진이청.

 

 

 

통진이청 복원 전 모습

 

 

〈통진이청 지도 通津衙廳地圖〉 중앙도서관 소장 

 

 

중앙행정부에서,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 육조를 두고 판서를 임명하여 관리하듯이 지방관아에도 육방을 두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직제는 거의 같습니다. 이 건물은 육방(六房) 즉  내무 人事를 맡아보는 이방(吏房),  戶典을 맡아보는 (호방戶房), 예법관습(禮典)을 맡아보는 예방(禮房), 병무(兵典)를 맡아보는 병방(兵房), 형벌(刑典)를 맡아보는 형방(刑房), 공예,건축,토목 공사를 맡아보는 공방(工房)의 여섯 아전이 수령을 보좌하여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통진이청에서 돌아서서 좌측 길로 월곶생활문화센터로 이동합니다.

 

 

옛 관아터 월곶생활문화센터 문으로 들어섭니다. 

 

 

월곶생활문화센터(월곶면사무소)는 3.1운동 만세 시위를 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월곶생활문화센터 주차장 끝에는 조선시대 이곳 수령(현감,군수,부사, 관찰사)들의 牧民官들의 선정비 · 불망비들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김포시청내 비석군처럼 주차장 내에 비석군이 자리하고 있어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원만한 사진을 담기가 어렵습니다.

 

 

군하숲길로 발길을 옮기며 바라본 비석群 정경.

 

 

월곶생활문화센터 좌측 주차장 위 산자락에 위치한 '군하 숲길' 들머리로 발길을 옮깁니다. 이 숲길은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집니다.

 

 

군하 숲길 입구는 나무데크로 만든 길입니다.

 

 

데크길 50m 정도에서부터 본연의 산책로가 시작됩니다.

 

 

 

우측으로 이정표가 셋개 입니다 위부터 청보라에 ⑧⑦⑥, 가운데 노랑은 문수산 등산로, 아래 노랑은 아트홀/안내소로 가는 길입니다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청보라 표시판 ⑧⑦⑥의 숫자가 궁금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인데 그 숫자는 이 공원에 세워진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들의 위치 번호입니다. 갈길에 바빠서 확인하거나 감상해 보진 않았습니다. 

 

 

좌측 이정표 아래 안내리본이 보입니다.  안내 스티커 부착된 데크계단으로 내려갑니다.

 

위 세부 사진입니다.

 

좁은 길인데 길이 깊게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통행은 적지 않겠다.   

 

 

골짜기로 내려서니 다시 오름이다.

 

 

능선에 오르니 다시 맞은편 골짜기를 나무에 붙여놓은 이정표가 알려준다.

 

 

이정표를 보니 앞에 구름다리가 있단다

 

 

구름다리 앞에 앉아 있는 노부인 어찌 홀로 앉아 시름에 젖었는가 

 

 

솔잎향 깊은데 낮은 오름이 맞이해 준다. 길은 파인애플 매트를 깔아 길 파임이 없다.

 

 

계단 중에 제일 버거운 동그란 나무로 단을 지은 계단, 바닥 흙이 파이면 오르기 힘이 든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나니..

 

 

오, 눈에 익은 길, 해병대회관에서 문수산성으로 오르는 길이네 

 

 

이 길은 자갈을 길에 일부러 부려놓은 듯이 자갈이 널렸다. 지질이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퇴적층인 것에 그 까닭이 있다.

 

 

문수산 지질은 사암, 역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직경 2mm 이상의 둥근 자갈들 (역)이 상당량 (약 25% 이상) 세립질 입자들과 섞여 있는 조립질 퇴적암 기질은 사질, 니질, 석회질, 규질, 기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사질의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이 자리는 礫(조약돌)과 泥(진흙)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입니다.

 

 

퇴적암에서 자갈이 빠져나와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면에 널려 있어서 자칫하다간 발목을 다치거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팔각정을 잠시 들려 갑니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정경으로 내 거쳐온 길도 확인이 됩니다

 

 

다시 발길 옮기려고 바라보니 데크계단이 누에(蠶)처럼 기어가고 있습니다.

 

계단이 끝나자 문수산성 남아문입니다.

 

〈南亞門 (暗門)/남아문(암문)〉

문수산성文殊山城에는 큰 문인 南門(喜雨樓), 西門(控海樓), 北門(取豫樓) 3개와 암문(暗門)으로 東亞門(虹霓門), 西亞門,  南亞門 北亞門등 모두 7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문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함포에 파괴되어 무사석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홍예와 육축부를 고치고 문루를 복원하였습니다. 북문은 깬돌을 이용하여 쌓은 벽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습니다. 서문터는 발굴 조사 등을 통하여 기반 시설이 확인 되었으며 정밀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성격을 파악한 후 복원할 예정입니다. 남아문은 성 바깥쪽은 천정을 둥글한 아취형으로 성 안쪽 천정은 사각형으로 이중형식으로 되었습니다. 동아문은 외면이 무너져 원래형태를 알아볼 수없으나, 남아문과 같이 홍예식의문이었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현재는 남문과 북문 그리고 2개의 암문인 남아문과 근래에 복원된 동아문만 있습니다.

 

여기서 각 아문(亞門)은 암문(暗門)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성곽의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의 눈을 피해 사람과 가축이 드나들고 양식 등 필요한 물품을 나르던 곳입니다.  

 

 

장대로 이어지는 성곽의 모습.

 

 

《장대/將臺》

정상에서 바라보는 문수산은 서울의 첫 번째 관문이며 舟橋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분단의 최전선이어서 북한과 지척에 대치하고 있으며, 계절 따라 북녘 땅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면밀히 조망할 수 있습니다.

 

《文殊山城 將臺址》

해발 376m의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강화입구를 지키고 한양도성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숙종 때 돌로 쌓은 산성으로 고종 3년(1866년)에 치른 병인양요의 전쟁터였습니다. 이곳은 문수산 동쪽의 가장 높은 지대로 조선시대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군사를 지휘하던 將臺가 있던 터에 복원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옛 지도를 보면 문수산성에 남문(喜雨樓), 서문(控海樓), 북문 등 3개의 큰 문과 비밀통로인 아문 4개가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이 가운데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병인양요 때 사라졌는데, 지도에는 공해루의 위쪽으로 성내의 시설물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 병영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2책 12권(太白山書庫本)에 의하면 숙종8년(1682년) 강화유수(江華留守) 조사석(趙師錫)이 문수산성 쌓기를 청하니, 이에 숙종 임금이 "강화도의 성과 문수산의 성은 같이 쌓도록 하라 그리고 삼군부(訓練院, 御營廳, 禁衛營)에서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숙종20년(1694년)흉년이 들어 축조공사가 중단 되었다. 기약 없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쌓았던 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숙종 38년(1712년) 문수산성을 보전하기 위해 통진읍을 문수산성 내로 옮기자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숙종44년(1718년)에 김포를 통진읍에 이속시켜 문수산성 수비에 협력하게 하였다. 축성된 둘레가 5,529보, 여장이 2,173첩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1명,군관161명, 사병56명, 돈군6명, 수첩군80명, 모입군 72명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에 의해 결정된 문수산성 수축은 순조12년(1812년) 강화유수 홍의호가 성의 남문(喜雨樓) , 서문(控海樓), 북문(取豫樓) 등 3곳의 성문을 수축하였다. 문수산성은 정상부(將臺)를 기점으로 3개(남측, 중앙, 북측)의 능선이 서쪽으로 뻗어 염하에서 멈추어 마치 포크 (fork)형의 능선을 이루었는데 남측과 북측 두 능선에만 성곽을 쌓아 항아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남측 능선 끝에 남문(喜雨樓)를 북측 능선 끝에 북문(取豫樓)을 세우고 다시 성벽은 서측 염하 해안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중간 해안선에서 남,북의 성벽은 이어져 서문控海樓)을 세웠을 것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서측의 성벽과 서문은 모두 유실된 상태입니다. 산성 남측 능선에서 산성 내부를 가로질러 서측 염하 해안까지 뻗은 중앙능선이 산성 내부를 문수골과 산성포로 양분하고 있는데, 문수골에는 정상부에서 발원한 수계가 모여 이루어진 옛 이름 馬潭으로 여겨지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능선부 바깥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편축성이고 안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유실된 서쪽 평지구간은 안팎으로 성벽을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3개의 수문과 나루(갑곶나루)를 두었으며 나루에는 석축을 깔아 축조한 선착장이 있습니다, 서문(控海樓)의 위치도 이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문수산성은 문수산정상에 장대를 세우고 가운데 능선을 감싸고 있는 좌우 능선에 성을 쌓아 마치 말굽 징 모양이며 그 안 성내를 1개의 능선이 양분시켜 생긴 문수골과 산성포 계곡을 모두 감싸는 포곡식산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장대로 들어서는 옹성문을 통해서 옹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문수산 將臺는 문수산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해와 한강 일대 뿐만 아니라 서울 주변의 모든 산과 개성의 송악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군사를 지휘하던 곳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6.25 전쟁 이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되면서 유적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2009년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암반을 해체하고 발굴조사한 결과 장대의 기단부 석렬(돌을 쌓아 올린 구조물)과 門址 한 곳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 철제 말 등 21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7년 김포시에서는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전체면적 약 25.7㎡의 장대를 복원하였고 유적 아랫부분에 남아 있던 돌로 쌓은 부분과 벽돌로 쌓은 부분을 정비하고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將臺는 팔작지붕 건물에 마루를 깔아 놓은 정자식 건물입니다 장대 주변은 한개의 문을 둔 성가퀴(女墻)을 갖춘 성벽으로 둘렀습니다.)

 

장대에서 한강 하구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漢江이 臨津江을 아우르고 祖江과 합수하고 다시 禮成江을 합수해서 서해로 흘러듭니다. 이 강들이 쓸어온 모래들이 河海같은 강안에 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뽀얀 연무로 인해 아련합니다.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서울을 기점으로 한반도 중심부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김포군과 더불어 내륙으로 통하는 요충지대로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류를 경계로 북한의 연백군과 개풍군이 인접해 있고 동쪽은 김포와 염화를 사이에 두고 무수한 포구와 나루를 탄생시켰습니다 예로부터 조강은 고대 삼국 이전 원삼국시대부터 중국 더 나아가 서역의 문물 교역이 들어오던 항구였습니다. 서쪽은 서해바다, 그리고 남쪽은 대규모 해안의 갯벌을 지나 웅진군의 여러 섬들과 인천의 국제공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성강 하구지역은 개성공단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위치에 따라서는 맨눈으로 개성공단이 보이는 요충지입니다. 高麗 時代에는 서해에서 예성강 하구 碧瀾渡를 통해 아라비아의 상선을 비롯하여 중국의 배가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구 였습니다. 고려자기와 개성인삼 靑銅佛具 등 뛰어난 문화와 문물을 만방에 알렸으며,

 

조선 세종 원년 6월에 상왕 태종과 세종께서 豆毛浦(옥수동)에서 대마도 정벌 출정식을 거행한 후 이종무 삼군체찰사를 비롯한 8명의 장수 도체찰사가 승선한 전함이 이곳 조강을 거쳐 충청, 경상, 전라수군 병선 집결지인 거제도로 가던 뱃길이었습니다.  

 

6.25전쟁이후 65년간 방치하다보니 지금은 예성강 하구도 토사가 쌓여 준설이 요구되며 이와 같은 상황은 한강이나 조강의 하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풍경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남북으로 갈라 놓은 이념은 한반도의 중심이요 심장을 동맥경화라는 重病에 들게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 된다면 이곳에 쌓인 모래를 퍼다가 이북 5도 재건에 쓰고도 남겠습니다. 

 

 

장대 옹성문을 나서기 전 옹성문과 바깥 풍경을 아울러 바라본 정경입니다.

 

 

《文殊山 頂上 標石/문수산 정상 표석》

문수산은 김포의 북서쪽 끝자락 조강과 염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강화대교를 건너기 전에 우측에 불쑥 솟아 있는 산으로 비솔산, 비아산, 통진산 등으로 불렸으며 우리나라 13정백 중 하나인 한남금북정맥의 한 갈래인 한남정맥 끝단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376m에 달하는 산입니다. 김포평야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 정상에 오르면 서쪽은 염하를 사이에 둔 강화도, 북쪽으로는 조강을 사이에 둔 북한의 개성 송악산, 동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둔 파주와 고양시의 사계절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김포의 금강'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데크에서 바라본 장대와 정상碑. 문수산(376m) 정상 표석과 將臺.)

 

《각자성석/刻字城石 》

(이 각자성석 사진 2점은 2019년 5월 31일 답사 때 담은 각자성석 사진 중 2점입니다.)성곽 바깥면(外城郭)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는 성돌이 있습니다. 성벽을 쌓을 때 또는 쌓은 후 축성 관계 책임 있는 사람들이 새긴 글자들입니다.

 

답사구간은 八角亭 쉼터에서부터 將臺址까지 一牌에서 시작되어 7패까지 확인할 수 있었고 복원되지 않은 위치에서 "十三牌 康熙三十二年 八月 日 後司中哨官 朴世雄 一旗摠 姜成吉 書記 吳成安 石手 宋德觀 宋无昌 李侖玉 金生男" 라고 새겨놓은 刻字城石을 볼 수 있었습니다.

 

康熙32년은 중국 청나라 年號로서 聖祖32년이며 조선 숙종19년(癸酉年1693년)입니다. 따라서 이곳 성축은 숙종 8년 (1682년)부터 시작하여 중단과 시작이 반복되며 숙종44년(1718년)에서야 완성되었으며 순조 12년(1812년)에 강화유수 홍의호가 문수산성의 남문(희우루) , 서문(공해루), 북문(취예루) 등 3곳 누각 없던 성문에 누각을 올렸습니다.

 

 

 築城한 인원수와 신분을 알 수 있는 刻字城石입니다.  五牌 末端 / 石手 六名 軍 七十二名 / 5구간 끝나는 곳 / 석수 6명과 병력 72명이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축성 때 성곽을 편성된 각 패들이 나누어 배역하고 책임제로 축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패에는 패장과 감독, 책임석수와 일정 인원으로 조직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장대만 들렸다가 산림욕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다시 남아문 앞 입니다. 

 

 

〈남아문(南亞門)〉

남아문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천정의 구조가 안쪽은 장대석을 덮은 평거식(平据) 천정이고 성 바깥쪽은 홍예식(虹霓) 천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림욕장으로 향합니다. 

 

 

잠시 산책로 옆 성곽으로 나와 바라본 정경입니다.

 

 

다시 산책로를 따라 갑니다.

 

 

3년 전 2019년 5월 31일 답사 왔을 때에도 복원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도 복원공사를 합니다.

 

 

성곽공사 가림 그물막 아랫길로 지나갑니다. 

 

 

다시 한 번 성곽과 조강을 바라봅니다.

 

 

중봉 팔각정이 가까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 위치입니다.

 

 

중봉 팔각정입니다.

 

 

 

 

중봉에서 바라본 문수산성 장대

 

 

조강 지나 모래밭 너머로 한강 하구가 연무로 인해 아스라히 보입니다.

 

 

쉼터에서 내려다보니 조강을 동구 앞에 두고 있는 문수골에는 정상부에서 발원한 수계가 모여 이루어진 馬潭(옛 이름)으로 보이는 저수지가 내려다 보입니다. 또한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은 갑곶나루와 선착장 석축路가 있는 곳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모래를 쓸어와 삼각주 모래밭을 일궈 놓았습니다.

 

 

이제 문수산산림욕장으로 갑니다.

 

 

돌부리가 솟아 있어 울퉁불퉁한 능선이지만 저는 평평한 길보다 좋습니다. 발바닥 지압도 되니 피로가 가십니다. 

 

 

중봉 팔각정에서부터 두 번째 데크계단입니다.

 

 

누가 빗질이라도 한 양 낙엽하나 없이 말끔합니다.

 

 

세 번째 데크계단입니다.

 

 

좌측 4번째 데크계단 입구 앞에 삼림욕장 주차장까지 200m임을 이정표가 알려줍니다.

 

 

데크계단을 내려와 보니 눈 감고도 갈만한 산책길입니다.

 

 

〈문수산산림욕장〉 파고라 간판을 통해 갈 길을 봅니다.

 

 

뒤돌아서서 바라본 앞쪽

 

 

강화대교 종착지까지 1.5km 거리입니다.

 

 

文殊山城은 祖江을 사이에 두고 江華의 甲串鎭을 마주보는 문수산에서 해안지대까지 성을 쌓아 이어진 城砦입니다. 이 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바다에서 염화와 조강으로 진입하는 모든 선박을 감시하고 지키는 특수한 要塞로 肅宗 20년(1694)에 축성되었고 純祖 12년(1812)에 중수되었습니다.

高宗 3년(1866)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였는데, 그 중 살아남은 프랑스인 선교사가 프랑스 해군사령관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1866년 9월8일 프랑스 함대는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부를 점령하고 "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우리는 조선인을 9,000명을 죽이겠다."라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년 9월18일 문수산성을 침공하여 올 때 문수산성에는 奉常寺事 韓聖根이 大院君의 명을 받고 성을 지키고자 불란서군과 싸웠으나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전쟁이 丙寅洋擾입니다. 이 전쟁으로 산성의 많은 부분과 해안 쪽의 성벽과 성문이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문수산 정상의 장대는 복원이 되어있어 서해, 인천, 강화도, 파주, 김포, 서울 그리고 쾌청한 날이면 북한의 개성과 송악산까지 조망이 됩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갑니다.

 

 

전신주에 보이는 이정표 표시대로 좌측으로 갑니다. 

 

 

이정표를 자세히 보니 종착지까지 1km 거리입니다 

 

 

저만치 있을 갑곶나루였던 곳을 거쳐 강화대교로 가는 길의 정경입니다.

 

 

길가 공터 앞 갑곶나루 알림판들입니다.

 

 

 "갑곶나루" 사진 (안내판에서 사출)

 

 

〈갑곶나루터〉

문수골에서 백여m 지났을까! 집 몇 채 있는 곳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갑곶나루"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267-8번지를 소재지로 하는 갑곶나루의 명칭은 삼국시대 초까지 전해지던 '갑비고차(甲比古次)가 후대에 변천한 것이라합니다. 전설에는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거할 때 이곳 염하의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서 병사들이 갑옷을 벋어서 쌓아놓고 건넜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도 합니다. 옛 지도를 보면 갑곶나루가 문수산성의 서문(控海樓)과 연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갑곶나루를 산성나루라고도 합니다. 강화 쪽의 나루도 갑곶나루라고 불리는데 18~19세기 지도에 문수산성 갑곶나루와 강화도 갑곶나루를 연결하는 뱃길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의 지도에는 문수산성 서아문 쪽에도 강화로 건너가는 나루가 추가로 표기되는 등 다양한 뱃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강화도로 연결된 다리가 없던 시절 이곳이 강화로 건너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서구세력이 처음 침입한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3년 9월 신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나루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때 문수산성의 주요 출입문이었던 공해루가 파괴되었고 공해루와 연결되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만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조만치 남문(喜雨樓)이 보입니다

 

 

남문(喜雨樓)은 복원 전에는 무사석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3~1994년에 홍예 및 육축부를 보수하고 정면3칸 측면2칸에 팔작지붕의 문루를 세우고 사방에는 문루여장을 둘러 2002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사적139호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두 줄기 능선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내에는 정상에서부터 함께 뻗어 내린 하나의 산줄기를 포함하여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안고 해안지대에 이르러 해안을 따라 남쪽 성벽 끝머리인 남문과 북쪽 성벽 끝머리인 북문 사이에 협축식 성벽을 쌓고 서문을 세운 산성입니다. 이후 순조12년(1812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성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더욱 튼튼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女墻)를 둘렸 쌓았고 남문(喜雨樓) , 서문(控海樓), 북문(取豫樓)을 세웠습니다. 총길이 6.123m 였으나 현재는4.640m입니다. 북문과 남문 사이 서쪽 성벽은 서문과 함께 모두 사라졌습니다.

 

 

강화대교 앞 도로 변에 위치한 강화(김포옛길) 종착지입니다.

 

 

경기옛길 6대로의 인증함 중 마지막 인증함의 멋진 자태입니다.

 

 

강화길 제1· 2 · 3 · 4길 총 52km 완주. 

 

 

2022년 10월20일 강화옛길 全 4개구간 완주 - 鄕香 - 

 

《경기옛길 6대로》

경기옛길 6대로 47개 全구간 거리 538.3km 완주.

의주길(5개구간) 56.5km, 삼남길 99.6km.(10개구간) 영남길(10개구간) 116km, 강화길(4개구간) 52km,

평해길(10개구간) 125km, 경흥길(8개구간) 89.2km, 경기옛길 6대로, 47개 全 구간, 538.3km. 完走

 

 

2022년 10월20일을 끝으로 경기옛길 6대로 47개 全구간 거리 538.3km 완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