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시루봉 보루성 조감도》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 한강변 구리시 아치울과 흰 다리 마을 사이에 뻗어 내린 가지능선을 타고 능선 끝에 위치한 시루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른쪽은 아치울로, 왼쪽은 흰 다리마을(白橋里)로 이어지는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이고 앞 능선길은 시루봉으로 오르는 언덕입니다.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차산은 지금의 용마산과 망우산 등 그 모두를 통틀어 아차산으로 불렸습니다. 그러한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堡壘)"라고 하는 古代 군사유적이 있습니다.
堡壘란,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주능선의 봉우리 꼭대기와 지맥의 끝 봉우리 등 주변과 전망을 살피기 좋은 능선에 만든 要塞인데, 점령지로서 일반인이 거주했던 산성과 달리 교통로 확보를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으며 지금의 국경수비대의 역할과 같습니다. 이러한 보루는 여러 개가 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차산의 이 보루들은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년 고구려(장수왕63년)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 되었습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에게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고,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게도 한강 남쪽을 공략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아차산의 보루군은 百濟 漢城期의 都城인 風納土城과 한강 건너 남쪽지역이 한 눈에 조망되는 곳에 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관계에 있었던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여 개의 보루는 각각의 그 위치에 따라 담당 구역과 역할이 있습니다.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며, 임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고대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적당합니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는 중랑천 일대를 방어하기에 적당하며, 아차산 줄기의 보루는 왕숙천변을 방어하기에 유리합니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강변 낮은 구릉이었던 구의동과 자양동에도 보루가 있었습니다. 이 두 보루는 아차산 일대와 광나루 강변 평지를 조망 감시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시루봉 보루는 아차산 주 능선에서 동남쪽 한강으로 흘러내린 능선의 끝 봉우리 (구리시 아치울과 흰다리 사이에 위치)에 있는 고구려의 보루성으로서 남쪽으로 한강, 동쪽으로 왕숙천과 그 일대의 한강 이남 지역과 구리시 토평동 등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입니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에 의해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채집되어 이곳에 고구려 보루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토기의 형태와 목탄연대측정에 따르면 시루봉보루는 아차산 일원의 다른 보루처럼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3치 옆으로 보루성으로 오르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4치) 제3치와 제1치 사이에 위치하는 치입니다. 제3치와 제1치와 다르게 제4치는 제3치와 더불어 보루성에 붙여 쌓은 치입니다. 여기서 치雉는 성곽 바깥쪽으로 일정한 규모로 내어쌓아 돌출시킨 부분이나 성곽 바깥에 별도로 돈대처럼 쌓은 獨雉를 말합니다. 치의 용도는 성채로 근접하는 적을 용이하게 공격하고 적으로부터 좌우 성벽이 공격당할 때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1치입니다. 보루성과 사이를 두고 쌓은 獨立雉로서 구리시 토평리와 강 건너 천호동과 암사동이 목격됩니다. 독립치(獨雉)는 보루성에 붙여 쌓은 치와 다르게 보루성 옆에 독립적으로 쌓은 치를 말합니다.
제1치 우측에 보루성에 붙여 쌓은 제4치가 보입니다.
시루봉의 터줏대감? 까마귀.
동쪽편 보루성 외곽의 모습입니다.
좌측 소나무 옆에 보루성에 붙여 쌓은 제 4雉가 확인되고 가운데 보이는 독립치는 제 1치입니다.
측면으로 본 독립적으로 쌓은 제 1치와 주변 정경입니다.
시루봉 보루성에는 외부 감시와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네 곳에는 치(雉)를 만들었습니다.
출입구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제3치의 경우 불에 탄 나무흔적과 불에 그슬린 흔적이 주변에 넓게 퍼져있어서 치 상부에 망루 또는 문루와 같은 목조 구조물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보루의 출입구였을 가능성을 보입니다. 성벽 안쪽의 건물터에서는 병사들의 생활에 필요한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이 남아 있었고, 항아리 명문銘文접시 시루(甑) 등의 그릇과 투구 찰갑 창 도끼 화살촉 등의 무기, 낫 쇠스랑 등의 농기구, 재갈 등자와 같은 말갖춤 도구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현재 성벽 상부 건물터의 각종 생활유구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보루성으로 오르기 위해 제3치 앞 계단으로 오릅니다.)
아차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제 3치(독립치)의 모습입니다. 치 위에는 망루가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루의 구조는 크게 성벽과 건물터로 나뉩니다. 둘레 260m의 성벽은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면을 돌로 쌓아 올리면서 안쪽 경사면을 흙으로 다져 올린 편축형입니다. 성벽 기저부에는 성벽을 따라 나무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는데, 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거나 시간이 걸리는 석성 이전에 토축을 쌓기 위한 임시조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3치와 아차산 주능선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제4치의 모습입니다. 선사시대의 생활주거지였던 암사동과 백제의 도읍 풍납토성 일대 천호동이 한 눈에 조망됩니다.
보루성 내 북쪽 수락산 방향입니다.
보루성내 남쪽 아차산성 방향입니다. 아차산성은 백제 제 9대 책계왕 때 쌓은 성입니다.
책계왕(責稽王 ?∼298(분서왕 1)은 백제 제9대 왕으로서 서기286년부터 29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 지금의 서울 풍납동 토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본 블로그(구름처럼 향기처럼) 카테고리 '백제 왕사' 참고〉
시루봉 보루성 서측 모습입니다.
시루봉 보루성 북쪽 정경입니다. 우측 도시는 구리시입니다.
북쪽 제2치입니다. 제2치는 제4치와 더불어 보루성에 붙여 쌓은 치입니다.
보루성에 붙여 쌓은 제2치에서는 망우산 능선과 구리시 그리고 멀리 수락산이 조망됩니다.
북쪽 제 2치 앞 나무 앞에서 남쪽 아차산성을 바라본 전경입니다.
자태가 아름다운 나무를 중점으로 좌우에 제4치와 제3치를 포함해서 담은 사진입니다.
시루봉 보루를 돌아보고 다시 아차산 주능선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호젓하고 산책하기에 좋은 길입니다.
이 호젓한 산길은 산악자전거타기에 좋은 길입니다. 그래서 인지 자전거바퀴자국이 보입니다.
역사탐방을 겸한 사색하기에 좋은 산책로입니다.
2020년12월29일 아차산 시루봉.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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