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출국(2019년9월15일 12시 일요일) -<11시간30분>- 독일 프랑크프르트 암마인 공항 입국 -<약 4시간버스로 이동> -체코 헤프 (Hotel Wurzer Tannesberg 宿泊) - <2시간30분 이동> - 프라하.
탑승한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내 시선은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담는다.
↕ 독일 프랑크프르트 암마인 공항에서 약 4시간동안 버스로 체코의 작은 도시 헤프로 이동 중 바라본 풍경은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평야에 수많은 사탕수수밭과 푸른 목초지,
헤프의 호텔방(Hotel Wurzer Tannesberg) 창가에서 바라본 밤하늘과 성당의 鐘塔,
호텔방에서 창으로 바라본 밤 풍경
〔Czech(cheb/헤프)〕
체코 북동쪽에 위치한 헤프는 1061년 독일인 왕 헨리4세에 의해서 불리게 된 지명이라고 한다.
헤프는 독일과 가까운 위치에 있고 독일 뉘른베르그에서 프라하로 가는 열차가 정차하기도 해서 독일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 헤프는 체코의 온천휴양지로 유명한 마리안스케 라즈네(Marianske Lazne)가 열차로 20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적당한 위치인 까닭인가? 이 작은 마을에 호텔과 숙박업소 그리고 카페가 여럿 보인다. 위치상 독일과 보헤미아 사이에 끼어서 분투했을 역사를 미루어 볼 수 있겠다. 지금의 우리처럼..
헤프시에서 좀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는 호텔 (Hotel Wurzer Tannesberg) 방에서 창으로 바라본 아침풍경, 정갈한 마을과 산뜻하고 잘 가꾸어진 경작지의 자연스런 풍경이 마음에 안정과 풍요를 안긴다.
2019년 9월16일 아침,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아담한 마을 헤프의 "성 미카엘. 카스 가톨릭교구 교회(Kath. Pfarrkirche St.-Michael)".
호텔에서 식사 전 마을을 둘러 봄. 마주 보이는 건물은 투숙한 Hotel Wurzer Tannesberg. 좌측에 달콤하고 기분 좋게 맥주도 한잔하고 볼링도 치고 주전부리도 팔고 숙박도 할 수 있는 건물이 있음.
큼직한 건물들이 조용하고 산뜻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상점. 바. 카페. 은행. 회사. 교회. 성당. 호텔. 莊級숙박업소 등 있을 건 다 있다.
비료일까? 사료일까?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지게차를 운전하는 아빠, 나로서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뭉클한 정겨운 광경이다.
기독교회는 아닌 것 같고, 성당인가! 아님 수사들의 기도원인가? 하얀 우편함이 큼직하다.
주택은 대다수가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다.
유난히 자전거를 좋아하는 내게는 멋진 장식적인 모습이다. 'familie frey' 오스트리아식 레스토랑? 우리나라의 크고 요란스럽고 지나친 상업성을 강조한 커다란 간판과 다르게 간판들이 귀엽고 예쁘다.
건물은 큼직한데 간판은 작다. 담장너머 찬란한 햇빛 동녘 트였는데 초라해진 보름달 갈 길을 잃었나보다.
울타리를 벗어나 길가로 나온 눈에 익은 꽈리!
어린 시절 외갓집 돌담장 밑에 일궈놓은 꽃밭에 붉게 익어가던 너! 반갑다 꽈리야!
이곳 헤프마을 초등학교 교정 모습.
내게는 이색적인 개인주택의 모습 뒤에는 제법 넓은 草地에 목장이 있다.
성 미카엘, 카스 가톨릭교구 교회(Kath. Pfarrkirche St.-Michael) 아담하고 예쁘지만 그리 작지도 않다 주변(촬영거리)은 좁고 건물은 길고 종탑은 높고 전체모습을 정면으로 담을 수가 없었다.
"FRIEDEN 평화"
성 미카엘, 카스 가톨릭교구 교회(Kath. Pfarrkirche St.-Michael) 좌측(서쪽) 마당에 세워져 있는 이 시설물은 평화(Frieden)를 간구하는 제단이다. 세계1차대전(1914-1918)과 2차대전(1939-1945) 당시 이 지방 희생자들의 명단이 세겨져 있다.
성 미카엘, 카스 가톨릭교구 교회(Kath. Pfarrkirche St.-Michael) 게시판에 붙어 있는 한글이 반갑고 정겨워서..
성당마당모퉁이 꽃밭에 핀 백장미. 청조하고 순결하다.
헤프의 한 마을 성당을 뒤로 하고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이곳의 전동철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도심이나 교외나 지상으로만 다닌다. 우리나라 6.7십년대의 전차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전동차의 객차 수는 2~4이지만 2개가 보편적이다.
이 전동차는 매끄럽고 산뜻하다. 유레일패스가 있다면 보통 전동차는 그냥 탑승할 수 있는데 열차에 따라 시간대로 예약제로 운행하는 전동차도 있다고 한다(예약비100kr) 예약전동열차는 빠르기도 하지만 좌석이나 서비스가 좋다고 한다. 1등석은 생수도 1병 제공된다고 ,
《체코의 수도 프라하》
체코 중서부에 위치하는 수도 프라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블타바 강가에 있습니다 중세의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다르게 제 1,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덕분인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의 멋진 고전 건축물이 잘 보전되어 있어 도시 전체가 건축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친 감이 없겠습니다. 또한 체코인은 음악적 재능이 있어 수준 높은 악사들이 거리를 무대 삼아 연주하는 모습을 쉽게 접해 볼 수 있는 낭만적인 도시여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체코(Czech Republic)》
체코는 1918년 슬로바키아와 연방을 이뤘을 때까지 보헤미아 역사와 거의 같습니다. 최초로 이 지역을 정착한 인종은 켈트계 보이족으로 알려져 있고 이들로부터 보헤미아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西紀(A.D)가 시작될 즈음 보이족에 이어 게르만계 마르코만니족이 차지했으며, 5~7세기에는 슬라브족이 차지했고, 슬라브족의 한 종족인 체코인들은 9세기경 보헤미아 중부지역에서 세력을 떨쳤습니다. 또한 슬라브족 이전부터 켈트족, 게르만족, 이바르족이 연속적으로 몰려들어와 모리비아와 슬로바키아에도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뒤 모라바 강 근처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모라비아인으로 불렸습니다, 이웃 지역들과 오랜 분쟁 끝에 모라비아는 보헤미아에 합병되었다고합니다.
최초의 보헤미아 왕국은 프라하의 프르셰미슬 왕조하에서 형성되었으며 895~1306년간 존속했습니다.
1085년에 이르러 프르셰미슬 왕조는 많은 부를 축적하여 보헤미아 왕국이 신성 로마제국으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왕국으로 인정받기도 했으며 1114년 보헤미아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306년 프르셰미슬 왕가는 막을 내리고 보헤미아 왕권은 룩셈부르크로 넘어 갔습니다.
1346년 카렐 1세가 왕위에 올랐고 135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카를 5세)가 되었습니다. 카를 5세는 프라하를 행정중심지로 삼았으며 보헤미아는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15세기에 들어서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학자인 얀 후스(Jan Hus)가 주도한 종교개혁운동이 보헤미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종교운동은 얀 후스가 체코어를 사용하는 대중에게만 지지를 호소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유리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띠게 되면서 그의 추종자들인 후스파 교도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526년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 함스브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의 왕권을 차지한 후 일어난 후스파의 반란(1618)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인들이 패배했고 16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비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가혹한 보복조치를 취하고 함스부르크가를 통해 더욱 엄중하고 노골적인 통치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자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의 한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에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되었고 독립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토마슈 마사리크와 네드비르트 베네슈의 지도하에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가 연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되었습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지역의 3/5을 차지했으며,전체 인구의 2/3가 이에 속했음)
* 토마슈 가리크 마사리크(Tomáš Garrigue Masaryk 1850~1937)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철학자, 교육학자, 언론인으로 프라하 대학교수를 지냈으며 국민당 당수가 되어 독립 운동에 앞장서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 ‘철인 왕(philosopher-king)'으로 불립니다. 그는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종교개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견하였고 이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였습니다.
마사리크는 馬夫 슬로바키아인 아버지와 하녀였던 독일로 귀화한 모라비아家系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이 교사훈련을 받았으나 잠시 자물쇠 수리공의 도제로 일하며 독학을 했으며 1865년 브르노의 독일계 단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빈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876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1년 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수학하였는데 그곳에서 미국인 음악도 샬럿 개리그를 만나 1878년 결혼을 하였고, 1879년 빈 대학 철학 강사가 되었으며 1882년에는 프라하의 체코대학교 철학교수로 부임했습니다.
마사리크는 체코 민족과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400여 년간 이어진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국가를 세운 인물이자 미래를 제시하고 체코式 민주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국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현 체코 화폐 5,000코루나 지폐에 마사리크의 초상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화폐 뒤 건축물 도안은, 성 비투스 대성당입니다.
이후 70년 동안 체코의 역사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의 역사로 대치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소련으로부터 교묘한 작전행동을 하달받고 끊임없이 지원을 받던 공산당원들은 1948년에 쿠테타를 일으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소련의 감독하에서 체코의 공산당원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산업을 국유화하고 농업집산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70,198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국가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번영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억압받는 국가로 꼽혔습니다.
1989년 후반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따른 민주화 물결이 동유럽 전역으로 번지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급변하였습니다. 1989년 11월 시민 포럼이 주도한 시민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12월29일 바츨라프 하벨(vaclbv Havel : 철학, 극작가, 시인)이 새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이때부터 경제 개혁에서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끼게 된 슬로바키아에서 민족주의가 싹텄으며 독립에 대한 요구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1992년 6월5~6일총선 결과 체코에서는 보수주의적 우익세력인 시민민주당(CDP)이 슬로바키아에서는 죄익민족주의 성향의 민주 슬로바키아운동(HZDS)이 각각 승리하여 연방해체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결국 양측 당수는 같은 해 6월20일 분리독립에 합의했습니다. 1992년 7월17일 하벨은 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93년 1월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독립하였습니다. 1993년 1월26일 바츨라프 하벨이 신생국 체코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박물관 인근 광장의 모습,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열리는 흰 천막노점들입니다.
멋스런 각종 양식의 건물과 건물들의 엄숙함과 좀은 경직될 분위기를 그 사이 노점상의 밝은 색상이 사뭇 조화롭습니다.
프라하의 보도블럭은 직사각형으로 규격화된 석회석 돌입니다.
아름답고 도도한 건축물 사이 광장마다 들어선 노점들이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미소를 안깁니다.
화약탑과 나란히 이어진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의 아름다운 건물 모습.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 회관
여기저기 너도나도 눈에 담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중세의 탑문. 일명 화약탑 모습.
1475년 블라디슬라프 2세가 초석을 다지고 카를橋 塔을 모델로 만들어진 화약탑은 구시가지로 이어오는 13개의 출입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프라하 시내에는 이와 유사한 문이 많다고 합니다. 화약탑은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과 나란히 있으며 체코 왕들의 대관식을 위한 노정에 왕의 길이었던 체레트나 거리의 시작점입니다.
17세기 초 연금술사들의 연구실 겸 화약을 저장하던 곳에서 유래하여 지금의 화약탑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18세기 때 프러시아 전쟁으로 크게 파손되어 1876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 회관
식사하러가는 길입니다. 밥은 따로 없고 牛肋 양념구이에 스프와 감자입니다.
좌우측 건물중간 사이를 잇은 회랑 아래우측 건물 1층 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는데 밥은 없어도 먹을 만 했습니다.
회랑이란, 다 아시겠지만,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건축물로 특성상 지붕을 같추고 있으나 한쪽은 폐쇄하고 한쪽은 개방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각 궁궐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건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형식의 회랑도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을 한 예로 임금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은 당직 나인(內人 . 女官) 처소 사이를 연결하는 회랑이 그 예입니다.
The Centre for Entrepreneurship Development of Karnataka (CEDOK)
Cedok는 체코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긴 여행사입니다.
"Pandora" 없는 것 없습니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나와라 뚝딱' 입니다.
앞에 있는 천막에는 쇠를 달구어 각종 도구나 문장 등 주문에 따라 제작해 줍니다.
구 시청사 시계탑 광장에서 프라하 박물관으로 가는 도로는 주전부리에서 공예품까지 체코에서만 볼 수 있을 각종 문물시장입니다.
구 시청사 시계탑 광장 주변 거리의 이모저모
구 시청사 시계탑 광장 주변 거리의 이모저모
구 시청사 시계탑 광장 주변 거리의 이모저모
하벨시장(Havalske Trziste)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설시장으로 평일에는 채소나 과일을 판매하지만, 주말이나 일요일에는 마리오네트나 글라스 등 각종 기념품을 판다는데, 내가 간 날은 평일인데도 기념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관광객 수요가 늘어 남에 따라 시장 성격도 기념품 위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성 하벨 교회.
올드 크래식 카를 타고 프라하 舊市街를 돌아보며 담은 풍경들입니다.
프라하 舊 都市는 유럽의 고대와 중세의 건축양식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을 모아다 놓은 건축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지 싶습니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에 블타바강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다리 저 편에 카블교가 보인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도로가의 정경들
거리에는 프라하 시민보다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다.
도시 건축물들이 모두 아름다운 미술품이요 프라하 그 자체가 건축박물관이네요.
유럽은 도시의 도로마다 전차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크래식 올드 카를 타고 프라하 舊도심을 돌아보고 프라하 城이 있는 언덕의 조망대에서 바라본 프라하의 동서남북 풍경들 -
높이 80m의 雙塔의 틴 성모 교회
고딕, 로마네스크, 바로크, 아르누보 등 11세기에서 18세기까지 각가지 양식의 건물들이 마치 종합 세트처럼 펼쳐진 프라하 전경입니다.
프라하 언덕 조망대에서 바라본 블타바강과 프라하 시의 풍경들
체코 서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블타바강은 총 길이가 약 435km라고 한다. 강물 좌우로 붉은 색의 지붕들이 노을빛처럼 화사롭고 우리나라 한강민큼이나 다리도 많다.
구름에 덮인 잿빛 하늘 빛을 받아 도시의 지붕도 그 화사함을 잃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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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식 올드 카의 미끈한 모습 마치 비너스를 보는 듯 황홀하다.
역대 왕들의 궁으로 프라하의 상징인 프라하 성 앞 넓은 광장 좌측에 길게 늘어선 대주교 궁 한 부분의 세부 모습 .
대주교 궁 부분적 세부 모습 .
대주교 궁
프라하 城 앞 넓은 후랏차니 광장 좌측에 위치한 대주교 宮의 모습입니다.
프라하 성 정면 모습 바로크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축입니다. 성 안쪽에 '성 비투스 대성당의 검은 雙尖塔이 보입니다.
프라하 성 정문
성 비투스 대성당 정면 상층부의 모습
비투스 대성당 하층부의 모습입니다. 위낙 높고 장대해서 한 번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광장이 넓지 않아 성당 상부를 보려고 너도나도 모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습니다.
성 비투스 大성당 내부의 웅장한 모습.
입구 안 우측 창
입구 안 상층부의 모습.
성 비투스 대성당의 천장과 상층부
입구 좌측 창. 아취 형으로 된 이 창들은 좌우로 3개씩 1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 聖 비투스 像
대성당 바깥 출구 상충부입니다.
대성당 정문 바로 옆에 있는 협문입니다.
신부님 이나 수녀를 위한 문은 아닌지? 체코어는 어렵다는데, 글은 있으나 읽을 수가 없나니..
성 비투스 성당 앞 프라하 성은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경비병과 경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라하 城 뒤에 있는 聖 비투스 대성당 전면부 모습입니다. 온전히 담기에는 공간상 한계가 있습니다.
旅行의 同伴者
프라하 성에서 올드 카를 타고 다시 돌아온 블타바강 강가에서 바라본 카블교와 비투스 대성당그리고 프라하城의 정경.
블타강과 성 비투스 성당, 프라하성을 아우른 풍경.
《블타강 앞 카를탑 좌측 강가에 세워진 카를4세 청동像》
카를4세는 보헤미아 왕 룩셈브르크의 얀과 보헤미아의 마지막 토착 군주 누이 엘리자베트의 맏아들로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누이 블랑슈와 결혼하여 파리에서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6세를 비롯한 여러 학자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보헤미아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의 노력으로 교황 클레멘스6세로부터 보헤미아에 종교적 자율권을 부여 받았다 교황에 의해 독일 왕 루트비히 4세가 파문 당한 후 7명의 선제후 중 5명의 지지를 받아 독일 왕이 되었다. 그러나 카를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 크레시 전투(1346년)에서 아버지(얀)가 사망하므로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다 1347년 카를은 프라하의 신임 대주교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을 받았다. 치세에 있어서 주변국과 전쟁보다는 평화적으로 해결하였고 새로운 법률과 왕권을 확고히 하고 1348년 파리대학이나 볼로냐대학에 버금가는 권리와 자유를 가지는 대학을 중부 유럽에서는 최초로 설립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프라하 근처에는 카를슈테인 성의 머릿돌이 놓여 졌고 이 성에는 신성 로마황제관을 장식하는 보석류와 보헤미아 왕실의 휘장을 보관해 두었다. 카를은 1354년 룩셈부르크 왕가의 권위를 세우고 아버지로부터 보헤미아 영토의 일부로 물려받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갔다 1355년 초 그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철왕관을 받아 썼으며 그해 부활절에 로마에서 황제관을 받았다.
카를 4세는 예술과 과학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특히 프라하의 예술을 후원하였으며 교회 건립과 자선단체 설립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는 초기 인문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정부에 영향을 끼쳤으며 독일의 文語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를은 프라하에 돌아온 후 '금인칙서'를 공표하여 7선제후가 독일 왕을 선출하도록 한다는 점을 규정했고 보헤미아 왕의 지위를 보다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카를은 그의 마지막 소원인 맏아들 벤첼에게 안전하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었고 길고 어려운 협상 끝에 벤첼은 독일 왕에 뽑혔다. 그 후 카를은 1378년 임종하여 장크트비투스 성당에 묻혔다고 한다.
카를교 앞 카를탑 前面 상층부의 모습입니다. 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정면으로 있어 상층부만 담았습니다. 카를교나 카를탑은 보헤미아 왕 카를4세의 이름에서 따 붙인 것입니다.
카를탑 안쪽 측면에는 안으로 들어가면 한사람 다닐 수 있는 돌계단이 굽이굽이 상층부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중간에는 두 칸 정도의 홀도 있습니다. 카를교 주변 조망을 위해 올라갑니다. 입장료는 20유로입니다. 좁고 어두운 계단 층마다 창문이 있어 조명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카를탑 계단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카를교와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과 풍경입니다.
조망대(카를탑 꼭대기)에 올라서서 동서남북으로 돌아본 풍경입니다.
상인거주지를 잇는 최초의 다리 카를교는 14세기 보헤미아왕 카를 4세 때(1346-1378) 건설되었기 때문에 카를교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後에 양쪽 난간부에 상인들의 석상을 세워고 다리 양쪽에는 탑문이 있는데 그 사이의 다리 길이는 약 500m 정도입니다. 블타바강에 걸쳐진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1841년까지 프라하 올드타운과 그 주변을 잇는 유일한 다리 였습니다.
카를탑에서 카를교 중간까지의 정경입니다.
성 비투스 성당, 프라하 성 언덕에서 카를교 중간까지의 풍경입니다.
프라하 도서관(Clementinum) . 천문시계탑(Clementinum, Astronoical Tower) .구 시 청사(old town hall) . 화약탑(Powder Tower) . Svateor's 교회 . 체코 테레비전 안테나'
카를탑 옥상에서 내려다본 정경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좁은 거리로 이어진 길은 공방골목입니다 전통 공예품 인형 목각 등을 만들어 파는 거리입니다. 공방골목은 궁 안에서 일하던 집사나 하인들이나 궁에 물품을 납품하는 상인들이 거주하던 곳입니다. 한 때 황금을 제련하는 연금술사들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황금골목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붉은 지붕의 이색적 건물들이 아름다운 블타바강 강안 언덕에 자리한 대주교 궁전 등이 에워싼 프라하 城과 聖 비투스 대성당이 마주 보입니다.
카를탑 내부의 계단통로의 모습입니다.
카를탑에서 내려와 돌아본 카를탑 뒤쪽 모습입니다.
카를교 난간에 세워놓은 聖人의 청동상들 중 하나입니다.
블타바강과 좌우의 풍경.
카를교에는 일명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한다. 내게 스며드는 음률은 감미롭고 악사는 천사만큼 곱다 .
꿈에도 생각지 못할 카를교 위 아름다운 정경..
카를교 위의 정경, 미처 몰랐네 인간이 사물에 이리 멋있게 조합될 수도 있음을 -
황톳빛 저 지붕 보기에도 따습다. 그 안에 사는 이여 심성조차 훈훈하리
블타바강의 유람선
카를교 위 저 예술인들을 '거리의 악사'라고 말하지 말자. 자애로운 눈빛 잔잔한 미소, 바람결처럼 선율을 켜는 纖纖玉手 천상의 소리를 보시하니 그 심성, 그 자태, 한계선상을 넘나드네.
연주하는 이들 앞에 행객이 머물러 있다. 이들의 마음도 음률처럼 고왔으면 좋겠다.
카를탑 좌측 강가에서 바라본 카를교 옆 모습과 블타바江邊 풍경입니다. 카를교 橋脚은 물살의 힘을 분산시키고자 교각 전면에 적석을 삼각형으로 덧쌓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물살이 오는 방향으로 석재를 통채로 마름모형 기둥으로 깎아서 橋脚으로 세웠습니다. 방식은 달라도 응용의 형태는 같습니다.
《카를 4세 靑銅像》
카를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냈습니다.
카를 4세 靑銅像 주변의 정경
블타강 카를탑에서 구 시청사 천문 시계탑 앞으로 가는 길에 마주 보이는 쌍 탑의 틴 성모 교회.
천문시계탑이 있는 구 시청사 건물 모습. 15세기 로마 고틱양식의 건물입니다.
천문시계탑 아래 바닥에는 30년간 이어진 전쟁 때인 1621년 함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27명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참수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천문시계탑 아래 바닥에는 당시 처형된 귀족들의 머리가 놓였던 자리에 십자가 표시와 함께 1621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카를교에서 프라하의 중심지 광장으로 나오면 舊 市廳舍에 세워져 있는 천문 시계탑입니다. 매 시간마다 황금제 닭이 문밖으로 출현하여 우는 이 천문시계가 오후 6시 울릴 시각에 즈음하여 시계탑 앞 광장은 세계 각 나라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마치 인종 전시장 같습니다. 오후 6시 정각이 되자 두 개의 창 아래 시계 우측 귀퉁이에 있는 해골이 오른 손에 잡고 있는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왼손에 쥐고 있는 모래시계를 꺼꾸로 돌리자 시계침 원반 위 두 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그리스도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인형들이 차례로 나왔다가 안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 위에 있는 황금 닭이 울면서 시각을 알립니다. 또한 시계가 있는 원반과 그 아래 또 다른 원반 좌우 옆 네 귀퉁이에는 각각 인물조각상이 달려 있습니다. 시계침 원반 네귀퉁이의 인물상에서 좌측 귀퉁이에는 금자루를 들고 있는 남자와 거울을 보고 있는 여자, 우측 귀퉁이에는 악기를 가진 청년과 해골 형상이 있습니다. 그 형상을 미루어 보건데 탐욕과 허영, 허무와 죽음를 상징하는 인간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계탑은 15세기(1490년) 하누슈(Hanus)라는 시계공에 의해 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틴 성모 성당》
황금 장식을 정점으로 높이 80m 높이의 쌍 첨탑의 틴 성모 성당은 프라하 성내에 있는 성 비트 대성당과 더불어 프라하의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성당으로서 1365년 건립되어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개조되어 오다 지금의 고딕 양식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15-16세기 기독 후스파의 본거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두 첨탑은 아담과 이브를 상징하며 자세히 비교해 보면 탑의 크기와 창의 형태나 배치가 조금 다릅니다. 두 첨탑 사이에는 보헤미아 왕의 조각상과 후스파의 상징 금으로 만든 성배가 있었으나 30년 전쟁 후 가톨릭이 정권을 장악한 후 왕의 조각상을 녹여 성모 마리아의 초상으로 성배는 후광으로 만들었습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고딕 양식의 외관에 바로크 양식의 내부를 갖추고 있습니다. 미사 전후에만 개방한다고 합니다.
구 시가지 광장 주변의 풍경들입니다.
구시가지 광장을 에워 싸고 있는 주변 건물 양식을 보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아르누보 양식을 모두 볼 수 있어 유럽을 고루 돌아보지 않아도 모든 양식을 볼 수 있는 유럽의 건축박물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얀 후스 동상 우측 건물은 골스 백작의 로코코양식의 궁전으로 함스부르크가 지배하에서는 독일어를 배우는 엘리트 중등학교였으며 체코 출신의 유대인 소설가로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 '심판'을 쓴 카프카 역시 1893~1901년까지 10년간 이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현재는 일층에 서점이 있고 국립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구시가 광장 골스 킨스키 궁전 앞에 위치한 15세기경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한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학자인 얀 후스(Jan Hus)의 동상 .
골스 킨스키 궁전
틴 성모 성당.
구 시청사광장 주변 건축물과 노천 카페,
나란히 정다운 바로크 건물들.
〈틴 성당의 첨탑〉
고딕양식의 틴 성당으로 처음 지을 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나 프라하는 상업이 발달해서 돈 많은 상인들이 헌금을 모아서 더 높게 짓게 되었는데 그 때에 유행하는 고딕양식으로 증축하였다.
〈골즈 킨스키 궁전(국립미술관)과 바츨라프 광장 일부 모습〉
본시 약 10년간(1755~1765) 골즈 킨스킨 백작의 궁전이었던 체코의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바츨라프 광장에 들어서면 화려한pastel tone의 환상적인 예쁜 분홍색 로코코 양식의 외관이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 잡는다.
얀 후스 동상과 舊광장 일부 모습 동상 뒷편 우측에 18세기 중반 로코코 양식으로 지은 골스 킨스키 궁전이 보인다.
체코의 인물과 코룬 화폐.
2019년 9월16~17일 독일 프랑크프르트 ~헤프~체코 프라하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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