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鄕 李仲燮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지금의 북한 땅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고구려 고분 벽화를 감상하기를 좋아하던 그는 그 신비로운 벽화의 영향을 받아 신묘하고 민족적인 화풍을 갖게 됩니다. 이중섭은 평생에 걸쳐 그린 소는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동물로 그의 그림의 주된 소재가 될 만큼 민족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강한 화가였습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인 아내 마사코를 만나 결혼하고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유했던 집안은 공산당으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풍비박산이 되어 가족은 부산, 통영, 제주 등으로 떠다니면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전쟁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헤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민족주의 바탕아래 우리의 국민성을 소에 부각시켜 힘겨운 삶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애썼지요. 그는 "흰소", '황소'를 비롯하여 특이한 은박지 그림을 창안 수많은 걸작품을 탄생시켰지만 우리나라 전체가 전란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그림은 잘 팔리지도 않았지만 팔린 20여점의 그림 값도 받지 못해 더욱 곤경에 빠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정신질환으로 40세 젊은 나이로 가족도 만나지 못한 채 적십자병원에서 외롭게 생을 마쳤습니다.
《夫婦》 (1953년 作)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 95세)여사가 살고 있는 '도쿄 세타가야'의 오래된 집 현관에 걸려 있는 이 판화는 아내와의 재회를 꿈꾸며 암탉과 수탉 한 쌍을 통해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묘사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탉과 수탉 한 쌍이 애처롭게 포옹한 채 죽을 힘을 다해 입맞춤을 하고 있는 이 그림에 대해 아흔다섯의 아내는 수줍게 말했답니다. "제가 닭띠예요, 그이의 모든 그림이 좋지만..." 이렇듯 한 쌍의 닭은 두 사람의 슬픈 초상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우리 세대 소년시절에 그리움이란 감성에 눈을 뜨게 한 사람이라면 시인 소월 김정식과 쌍벽이라 할 수 있는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그려낸 불멸의 화가 이중섭이라 하겠다. 김소월이 가져보지 못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謳歌했다면, 화가 이중섭은 가졌던 것에 대한 피맺힌 그리움을 그림으로 갈망했다고 하겠다. 그 애틋한 그리움을 집대성한 이중섭 화백의 그림 몇 점...
《누운 여인》(1941년 종이에 펜, 채색,)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여사와 연애 시절 엽서에 그녀를 그린 그림.
《소와 아동》1942년 종이에 펜, 채색.
《소를 든 사람》1942년 종이에 펜.
사랑하는 마사코와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 넘치는 힘을 응용한 그림이 아닐까요.
《부부》1950년대 作 "이 세상에 나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미친 듯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끝도 없이 상냥한 나의 아름다운 천사여!" 이 중섭에게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靈感의 원천이자 영혼의 동반자 였다.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재회를 꿈꾸며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담뱃갑 속 은박지에 긁어 그린 銀紙畵. (사진 조선일보에서 발췌)
《복숭아와 두 아이》1950년대 紙에 油彩.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절친한 시인 '구상'이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하루는 그를 찾아가 이 그림을 불쑥 내밀며 "복숭아 천도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라는 말씀이지" 흥얼거리듯 말하고 휙 돌쳐서 나갔다고 합니다. 천도복숭아는 하늘의 열매로 전해오는 이 과일을 먹으면 병이 낫고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친구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이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입니다. 시인 구상은 아플 때마다 친구 이중섭이 준 이 그림을 꺼내 보며 먼저 세상을 달리한 친구와의 추억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달밤》1950년대 종이에 잉크, 유채.
둥근달 아래 무릎을 세우고 팔베개를 하고 지극히 편한 얼굴을 하고 누워 달을 쳐다보며 헤어져 멀리 이국땅에 있는 가족,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도 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리운 마음을 담은 그림이 아닐까요. 평온한 얼굴과 누워 있는 자세에서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가족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또한 담긴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유채. 생활이 힘들었지만 가족과 단란하게 행복했던 제주도 피난 시절 바닷가에서 두 아들과 놀던 때를 담은 그림이지요.
《애들과 물고기와 게》1950년대 종이에 유채.
제주도 피난지에서 근 일년을 가족과 생활하면서 바닷가에서 게와 물고기를 잡으며 아이들과 보낸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담은 그림.
《청기와》1950년대, 종이에 채색.
《桃園 낙원의 가족》1950년대 은박지에 새긴 후 유채.
등나무, 부인의 나신, 아이들, 소, 나비, 새, 부둥켜 안은 부부, 비들기, 나뭇잎 등 이중섭 화백의 그리움 모음집 같습니다.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1954년 종이에 유채.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1953-54년, 종이에 유채. 1951년 제주도 서귀포 피난 시절 두 아들과 장난치며 놀던 추억을 그린 그림.
《가족을 그리는 화가 》 (1953-54년경, 26.4×20cm, 종이에 펜, 채색 개인소장)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정처 없이 여러 지역을 전전 하며 가족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그림을 곁들인 자상하고 사랑스런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追慕》(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작곡가 김영일을 추모하면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은지에 새긴 후 油彩.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입니다. 양담배를 싼 은박지에 새기거나 긁어서 그린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 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청동그릇에 새긴 은입사기법과 나전칠기의 기법과 흡사합니다.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 (1950년대 作, 15cm×10cm)은 당시 미국대사관 재무관이었던 '아서 맫타가트'가 1955년에 사서 이듬해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입니다. 제법 또렷하게 채색한 銀紙畵입니다.삼각형으로 접힌 선을 신문돌리는 사람의 팔 윤곽으로 응용하는 등 이중섭은 은박지의 접힌 자국마저도 구도에 활용했습니다. 전쟁으로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소용돌이 속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이 신문을 펼쳐 들고 읽고 있습니다.
《두 아이》1950년대, 은지에 새김, 8.5×15.5cm, 銀紙畵 중 드물게 '대향'이라는 호를 써 넣은 그림, 1950년대 은지에 剝地技法으로 그린다음 油彩. 두 아이가 서로 살갑게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에서 두 아들이 서로 도타운 정을 나누기를 바라는 父情을 담았습니다. 살갑게 보듬어 주지 못하는 아빠의 심경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1950년대 銀箔紙에 새긴 후 유채,
서로 입술을 물고 입맞춤을 하는 그림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 했는지 그 절절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복숭아 밭에서 노는 가족》1950년대, 은지에 새긴 후 유채. 온 가족이 발가벗은 몸으로 아이들은 복숭아를 따고 아빠(이중섭)는 광주리에 담아 어깨에 메고 엄마(마사코)는 밭에 누워 휴식을 즐기고 있는 풍경입니다.
《소와 새와 게》
힘 없고 나이 먹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소에 빗대어 그린 그림.(1950년대, 종이에 유채)
《두 아이》1950년대 은지를 긁어 새긴 후 油彩.
《탄생불》1950년대 銀紙에 새김.(油彩)
《묶인 사람》
은지에 새긴 후 유채, 손과 발이 묶인 사람을 그렸습니다. 1950년대 6.25 전쟁과 당시의 이념과 혼란으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봄의 아동》1952-53년 경, 종이에 연필 유채 32.6×49.6cm. /종이에 연필로 그린다음 물감을 덧칠해 분청사기처럼 표현한 油彩畵.
《닭과 가족》1954-55년 종이에 유채. 36.5×26.5cm /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게 깊었습니다. 닭을 많이 그린 것도 부인 마사코의 띠가 닭이었던 것에 그 까닭이 있겠습니다.
"1954년 부인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일부.
《벚꽃 위의 새》1954년 作. 고려청자를 닮은 비취색을 바탕으로 가로 뻗은 가지에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마른 가지에 청개구리 한 마리 앉아서 벚꽃에 앉아 있던 노랑나비 한 마리를 향해 다가서려는 때에 난데없이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꽃 핀 가지에 앉아 개구리를 향해 날개를 곧추 새우고 경고를 할 때, 나비는 혼비백산 하늘로 솟아 날아가고 청개구리는 멈칫거리는데, 새의 무게로 흔들린 가지의 꽃잎만 하염없이 나풀나풀 떨어진다. 단졸 하지만, 고요한 정적을 흔드는 긴박한 순간이 배어나는데, 세월은 하염 없이 흐르고 가족을 향한 절실한 심경이 배어있는 풍경입니다.
이번 이중섭의 (백년의 신화전) 특별전은 이중섭의 소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중섭은 소의 분신이요 소는 이중섭이자 우리 민족의 상징적 동물이라 하겠습니다.
《황소》1953년경, 종이에 유채.
《흰소》1953-54년 作,
흰소 어째서 흰소일까! 민족의식을 반영시킨 이중섭의 흰소는 백의민족을 상징합니다.
《흰소》1955년 作, 29×41cm, 종이에 유채. 홍익대학교박물관 所藏.
강인한 근육질을 역동적인 필치로 표현한 흰소는 격동하던 당 시대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민족 혼이자 이중섭의 의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황소》1953-54년, 종이에 유채.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30주기전' 이후 30년만에 열리는 이번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시에는 언뜻 보기에 분간하기 어려운 닮은꼴의 황소머리 그림 두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번 처음으로 전시된 이 황소 머리 그림은 비슷한 다른 한점의 그림과 달리 배경의 붉은 빛이 좀 어둡고 붓터치를 둥굴게 처리되었습니다.
《황소》1953-54년, 종이에 유채. 32.3×49.5cm / 붉은 노을을 가로로 붓터치한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가 울부짖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소와 아동》1954년 합판에 유채. 소는 엎드려 쉬고 아이는 지게를 내려놓고 그 옆에 기대어 한껏 개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싸우는 소》1955년 종이에 유채.
《싸우는 소》1955년 作, 두 마리 소가 혼신을 다해 싸우는 모습에서 죽을 힘을 다해 역경을 헤쳐 나가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길 떠나는 가족》1954년, 29.5 × 64.5cm, 종이에 유채, 個人所藏. "오늘 엄마, 태성이, 태현이가 소달구지를 타고.. 아빠는 앞쪽에서 소를 끌면서 따스한 남쪽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려 보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려 넣은 삽화와 똑같은 구도로 그린 유화 '길 떠나는 가족' 입니다. 李仲燮이 아내 이남덕여사와 아들 태성이와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앞에서 소를 이끌고 있습니다. 생이별한 가족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경쾌한 움직임과 색채로 표현하였습니다.
《歡喜》1955년 종이에 유채. 한 쌍의 닭이 밝은 태양 아래 춤을 추고 있습니다. 밝은 세상에 아내와 행복한 만남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그림입니다.
《가족과 비들기》1950년대 종이에 유채.
이 그림은 아래 회색소와 드물게 종이 앞뒤에 그린 양면화입니다. 통영 시절 '가족과 비들기'를 먼저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정신분열을 앓던 시절 뒷면에 '회색 소'를 그린 것으로 알려집니다.
《회색 소》1955-56년경 종이에 유채. '비들기와 가족' 뒷면에 그려진 이 회색 소는 희미하게 그려진 선과 초점 잃은 소의 눈빛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와 정신질환으로 시들어가는 말년의 이중섭을 떠올리게 합니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1953년 종이에 유채.
《시인 구상의 가족》1955년 32×49.5cm 종이에 유채. 個人所藏, 시인 구상(具常)의 외관 집에 기숙할 때 그린 작품.
《돌아오지 않는 강》1956년, 18.8×14.6cm 종이에 유채. 임옥미술관 所藏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제목을 따서 그림의 제목으로 한 이 그림은 함박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 소년이 창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고개를 옆으로 뉘고 하염없이 휘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저쪽에서 소년이 기다리는 사람이 머리에 광주리 또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소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3장의 시리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그림은 생기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고개를 세우고 창가에 있는 모습이고 다가오는 여인은 먼 거리에서 작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멀리서 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다소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이는 모습으로 기다림에 지쳐가는 소년의 모습과 소년이 기다리는 사람은 어느 정도 근거리에 이르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곤경에 빠진 생활과 만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표현한 그림이라 하겠습니다.
《 이중섭 ·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
이중섭(1916-1956)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1901~?)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36년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1941 '문화학원'에서 유학하였다.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자격을 얻기도 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0년 12월 원산 폭격을 피해 어머니를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하였다. 이 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1950년 이전 작품은 극히 드물다. 피난지 부산이 너무 비좁았던 관계로 1951년 제주도로 거쳐를 옮기는데 여기서 약 1년간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 생활을 한다. 1951년 12월 부산으로 돌아와 피란촌을 전전하며가난한 생활을 이어간다.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활동과 전시회 참가 잡지 삽화나 도서 표지화 그리기 등을 계속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이 대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쌌던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된다. 이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와 나절칠기에서 시문되는 기법과 유사하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이번 전시회에 진열되었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철필로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이 은지화들이 후에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그려서 예술이 공공장소에서많은 이에게 향유되는 꿈에 부풀곤 했다.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1954년6월경까지월남한 공예가 유강열(1920~19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절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소'그림의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되었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고 〈사인전 〉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
이중섭의 편지화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후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바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여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런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60통, 160매에 이른다. 이 편지들은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연구하는 근거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가족들과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 기숙하며 1955년 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회에서 작품은 약 20점이나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지기 시작한다.
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가장'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억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소설가 박연희(1918~2008), 시인 조영암(1920~?)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 팸플릿게시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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