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힐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바닷가(langco beach)에 있는 기쁨리조트 (mứng resort)식당에서 베트남 쌀국수로 식사를 마치고 잠시 여분의 짬이 있기에 음식점 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기로 했다. 다낭 북부에 위치하는 바닷가 모래밭에는 볏짚으로 만든 비치파라솔이 파도와 어우러져 분위를 더욱 자아낸다.
식당 좌측에 있는 리조트(Resort) 건물입니다.
식당 우측 건물로 2인 침대가 있는 휴식처랍니다.
랑코 비치 리조트 앞마당 겸 주차공간입니다.
식당 옆에 있는 아담하고 귀여운 수로와 작은 다리입니다. 다리건너에는 바닷가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영장이 있습니다.
수영장 건너에 있는 이 초옥은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놀거나 수영을 하다가 뜨거운 햇빛을 피해 휴식을 취하는 시설로 생각됩니다.
시원한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갖춘 건물입니다.
수영장과 끝없을 것 같이 드넓은 바다와 모래밭이 펼쳐진 풍경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점심 먹었던 식당 뒤가 이런 풍경이라니..
야자수에 열매가 탐스럽게 달렸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 화선지에 누군가 야자수를 세세한 필치로 멋지고 아름답게 그린 듯이 멋있게 어울리는 풍경입니다.
바다, 한결같이 연출하는 파도와 물보라, 밀려왔다 하얗게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파도를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마법의 중독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닷가로 나가는 길목을 돌고래수문장이 경고문을 길 가운데 세워놓고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바다가 저리 부르는데 안 갈 수 없잖아요. 그쵸?
이곳도 우리나라와 같은 겨울철이지만 온도는 25℃를 윗돕니다. 그래도 겨울바다에 날씨도 흐렸기에 봄에 입는 바람막이를 입었을 뿐인데 몸이 따듯합니다.
파도가 모래를 머금은 채 물보라를 일으키고는 자지러지듯 파들거리다 스러지면서도 또 다시 나를 덮칠 듯이 몰려옵니다.
우측 바닷가 풍경입니다. 이 볏짚으로 만든 파라솔을 보니 우리나라의 초가지붕을 올린 옛 원두막이 떠올라 낯설지 않고 포근한 정마저 솟아납니다.
'여인과 바다', "바다와 여인" 무슨 소설의 제목 같죠? 그런데 어느 제목으로 정하면 좋을까요. 함께 고민해주실래요. 그런 다음 이야기를 써야 하겠지요. 아 그런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 나라 말이 아닌 목소리 고운 노래가 들려오네요.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파도 위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못 잊을 그대여 저 하늘 끝까지 저 바다 끝까지 단 둘이 가자던 파란 꿈은 사라지고 바람이 불면 행여나 그님인가 살며시 돌아서면 쓸쓸한 파도소리."
언젠가는 우리의 바다에서 받아보려고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 저 바다에 부치고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 카이 딘 왕릉 / The Royal Tomb of King khai dinh .》
얼마를 달려 도착한 이곳은 '카이 딘' 황제(啓定帝 1885~1925 (재위 1916~1925)릉입니다. 후에시 남쪽 10km 정도 떨어진 낮지만 얼마쯤 가파른 차우구 언덕 밝은 터에 5개의 단으로 조성한 카이 딘 왕릉은 호수나 해자(垓子)가 있고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는 음습한 왕궁처럼 넓은 정원으로 이루어진 민망 황제의 陵이나 뜨득 황제의 陵과 다르게 능역도 117×48.5m 정도의 규모에 건축물만 들어서 있어 언뜻 보기에 莊園같은 느낌과 우리나라 조선조 왕릉처럼 산자락을 최대한 살리면서 조성한 세조 임금의 광릉이나 단종 임금의 莊陵 언덕을 느끼게 하지만, 무슨 사원처럼 웅장한 건축물만 가득한 점에서는 판이합니다.
위에서부터 ① 카이 딘 황제 陵 ② 카이딘 황제 공적비와 비각 ③ 2개의 방첨탑obelisk 方尖塔 ④ 홍살문, 몸가짐을 엄숙하고 단정히 salutation court ⑤ Left House (우리나라의 경우, 수라청 : 祭에 올릴 음식을 만드는 곳) ⑥ Right House (우리나라의 예를 듬, 수복방(守僕房)능을 관리하는 수복이 거주하던 곳으로 동쪽에 지었음). ⑦ chau chu Mount (山)
36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첫 계단은 네 마리의 긴 용의 형상으로 조각한 난간으로 계단을 셋으로 나눠져 있는 그 위에 탑의 형태와 비슷한 용문을 새긴 원형의 돌기둥과 좌우에 방형의 돌기둥 모두 3개가 1조를 이룬 것을 4곳에 세웠고 창살모양의 자줏빛 철문을 달았습니다.
문설주나 홍살문으로 볼 수 있는 용문기둥을 4개를 세운 것은 3개의 입출구
29 계단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계단 위 정면에는 카이 딘 황제의 공적을 기록한 비를 보호하는 2층의 장중한 碑閣이 있고 좌우에 방첨탑과 문무인상과 호위무사상 그리고 말과 코끼리석상이 배열되어 있다. 이 碑閣은 지붕과 기둥은 용의 형상과 龍紋, 벽면에는 吉祥紋이 화려하게 刻彫되어 있다.
응우엔 왕조 제12대 카이 딘 황제(1885~1925년)는 9년간 재위에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에서는 황자가 없었고, 후궁 '뜨꿍'에게서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곧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 황제입니다. 카이 딘 황제의 선왕 '동카인' 황제는 병약하여 아들 '카이 딘'이 4살 때 운명하자 어린 '카이 딘' 대신 죽득 황제의 아들 '타인타이'와 그의 아들 '주이 떤'이 차례로 황제가 되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답니다. 이에 프랑스는 그들을 추방하고 1916년 프랑스에 협조적이었던 죽은 '동카인'의 아들 '카이 딘'을 등극시켰습니다. 황제가 된 카이 딘'은 아버지 동카인처럼 프랑스 통치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국민들을 실망시켰다고 합니다. 이에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판쩌우찐"(潘周楨1871~1926)은 1922년 七點表라는 공개서한으로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중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 딘 황제를 맹렬히 비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잘못으로 인하여 귀족들 권한 남용, 형벌의 불공평, 부도덕한 정도의 사치 등을 지적하며 황제가 물러나기를 요구했답니다." 그러나 카이 딘 황제는 1923년 오히려 자신의 陵을 짓기 위해 농민들의 세금을 올리며 베트남의 경제를 곤궁에 빠트렸고, '판보이 쩌우(潘佩珠)'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자국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리하여 카이 딘은 조국을 배신한 더러운 황제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가 유일하게 치적으로 남긴 것은 자신의 陵 뿐이라는, 조소적 이야기도 있답니다.
이 비문은 응우옌 왕조 제13대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아버지 카이 딘 황제<啓定帝 1885~1925 >(재위 1916~1925)의 공적을 새긴 것이다.
카이 딘 황제의 본명은 '응우옌푹투안(阮福昶 1885~1925)이다. 비문 끝머리에 "孝子 嗣 皇帝 臣 腆 謹誌" 로 끝냈다.
비각의 우측면의 모습이다. 용이 새겨진 4개의 기둥을 비롯하여 全面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용과 길상문으로 채웠다.
《왼 편 방첨탑 》( obelisk 方尖塔 )
위치상으로는 우리나라 묘 좌우에 세우는 망주석이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에 태양 숭배의 상징적인 고대 이집트에서 세웠던 네모진 뾰족한 탑의 전형으로 전면에 용모양의 난간을 둔 6개의 계단이 있는 방형의 돈대에 사면에 문양이 새겨진 낮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난간을 친 돈대 안에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기단석 위에 수많은 모양의 문양을 새긴 仰臺 네 귀퉁이에 작은 尖塔을 세우고 중앙 전체를 차지한 방형의 긴 탑신을 세웠다. 탑신 네 모서리는 기둥처럼 조각되었고 면에 액자 모양의 테두리를 두고 그 안에 흰 대리석이 있다. 주로 그 바탕에는 상형문자로 황제의 공적이나 기타 문양을 새기는데 이 첨탑에서는 너무 높기도 하지만 긴 세월에 문자나 문양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방첨탑이 있고 화려한 비각이 중앙 전면에 있는 점 등 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왕릉 앞과 비슷한 방식이다. 앞줄에는 두 손을 소매 속에 合手하고 있는 文人像 한 쌍과 오른손에 잡은 칼을 왼쪽 어깨 쪽에 세운 武人像과 왼손에 잡은 칼을 오른쪽 어깨 쪽에 세운 武人像이 한 쌍이고 뒷줄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이 있고 그 옆에 말과 코끼리석상을 배치하였다.
《오른 편 방첨탑 ( obelisk 方尖塔 )
위치상으로는 우리나라 묘 좌우에 세우는 망주석이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고대 이집트에서 세웠던 태양 숭배의 상징적인 네모진 뾰족한 탑의 전형으로 전면에 용모양의 난간을 둔 6개의 계단이 있는 방형의 돈대에 사면에 문양이 새겨진 낮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난간을 친 돈대 안에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기단석 위에 수많은 모양의 문양을 새긴 仰臺 네 귀퉁이에 작은 尖塔을 세우고 중앙 전체를 차지한 방형의 긴 탑신을 세웠다. 탑신 네 모서리는 기둥처럼 조각되었고 면에 액자 모양의 테두리를 두고 그 안에 흰 대리석이 있다. 주로 그 바탕에는 상형문자로 황제의 공적이나 기타 문양을 새기는데 이 첨탑에서는 너무 높기도 하지만 긴 세월에 문자나 문양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었다.
文人石像의 細部
돈대나 대석 없이 석인상을 세우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하나의 돌에 크고 작은 두개의 방형의 臺石을 포갠 듯이 만든 그 위에 팔각의 돈대에 석인상이나 동물상을 세웠다.
護衛武士像 細部
좌측과 다름없이 앞줄에는 두 손을 소매 속에 合手하고 있는 文人像 한 쌍과 오른손에 잡은 칼을 왼쪽 어깨 쪽에 세운 武人像과 왼손에 잡은 칼을 오른쪽 어깨 쪽에 세운 武人像이 한 쌍 이고 뒷줄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이 있고 그 옆에 말과 코끼리석상을 배치하였다.
전면의 건물은 천정궁(天定宮)이다.
카이 딘 황제는 이 능 공사를 1920년에 시작하여 10년 후 1931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카이 딘은 공사를 시작한지 5년 만에 나이 40세로 운명하였다. 자신이 시작한 자신의 묘의 완성도 못 본 채..
이 건물 중앙에는 "천정궁(天定宮)" 이라는 한자와 좌측 열린 문 위에는 "이례제심(以禮制心)" 우측 끝 문 위에는 "위인유기(爲仁由己)" 라고 현판처럼 파인 안에 양가되어 있는 금색글자가 있습니다.
〔天定宮]
두 마리의 용 밑에 天定宮'이라는 돋은 글체가 있다.
닫힌 문을 열면 카이딘 황제의 위패가 정면으로 비각 위 2층 창과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
천정궁 우측으로 문 위에는 "위인유기(爲仁由己)" 라는 한자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논어 안연 편에 있는 글을 인용한 것으로 仁에 관한 것입니다.
응우엔 왕조의 제12대 임금 카이 딘 황제<啓定帝 1885~1925 >(재위 1916~1925)는 1916년 황제가 되어 1925년 임종할 때까지 9년간 재위 했으며 이 陵은 카이 딘 황제가 1921년 재위 중 자신이 묻힐 능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완성을 보기 못하고 임종 후 1931년에야 완성된 20세기 초 베트남 건축예술의 대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유럽 건축미에 베트남의 예술이 어우러진 중후한 외형에 화려한 내실을 갖추고 우아한 멋이 있어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동서양의 건축문화를 보여줍니다.
계성전 안 실내 벽, 기둥 등 거의 전체적으로 자기와 유리로 모자이크 방식으로 중국 청대의 화병, 대나무 괴석 화초 등을 병풍처럼 화려하게 꾸몄는데 우리나라 선비들의 일상적 소품들인 문방사우나 책거리 병풍이나 화훼를 그린 품격 있는 병풍을 보는 듯 낯설지가 않다.
각양각색의 자기파편으로 형태를 설정한 꽃이면 꽃, 나무면 나무 등을 문양으로 구연한 모습대로 무늬를 완성한 솜씨가 경탄스럽다.
벽이나 천장, 그 어느 한곳도 빈틈없이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문양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편으로 오롯이 꾸민 예술의 극치를 본다.
1920년대 20세기에 건축한 이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 도안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옛 문양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있는 것에서 멀지만 가까운 이웃처럼 편하면서도 이질감을 모르겠다. 황제의 陵이기에 기둥이나 천장이나 벽이나 용이 꽃처럼 피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라면 단청을 해야할 자리인데...
계성전 기둥의 龍紋
카이 딘 황제는 자신의 무덤인 이 능을 1920년 시공한 후 1922년 프랑스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 능의 건축양식은 거기서 나온 것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그가 진두지휘 했다는데..
용머리 위에 타원형 검은 색 자기를 올려붙인 것이 육신을 떠난 영혼을 표현한 것 같아 재밌다. 죽은 황제를 표현 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싶지 않다.
여러 색 자기片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수탉이 금시라도 꼬끼오~ 청아한 노래 부를 것만 같이 멋이 넘친다.
우리나라의 17세기 청화백자 닮은 조각과 중국과 프랑스 물이 든 현지 도자기로 꾸민 이건 뭐지! 그냥 버무려 놓은 것 같다.
문자를 가운데 두고 양분시킨 문양의 색깔이 얼추 같지만 똑 같지는 않아요.
여기에도 영혼 없는 용머리가 보이네.
이 계성전에서 보듯이 이 陵의 모든 건축물에는 이처럼 方形의 틀을 구축하고 그 안에 문양을 새기거나 꾸몄습니다. 외벽이나 탑은 이런 형식으로 조각하였습니다.
이 천정궁 안 내부 꾸밈의 재료들이 그냥 조각이 아니라 온전한 그릇을 깨뜨려 사용한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유리구슬이나 틀에 맞춰 구워낸 것도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릇조각이 아닌 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무슨 훈장 모양이네.
액자나 병풍처럼 테두리를 두었습니다.
거북이를 具現한 것 같은데.. 유리그릇 파편으로 꾸민 것도 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거칠고 조잡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좀 떨어져서 보면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계성전 높은 전장부근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그린 것도 아니고 도자기 파편을 붙인 거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보석같이 빛나고 너무 아름다운데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도자기를 깨트렸을까..
지금까지는 황제가 있는 내실 밖 그러니까 거실이랄까 아니면 회랑이랄까 아무튼 '천정궁' 안 입니다. 천장에서는 용이 구름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카이 딘 황제 等身像이 있는 계성전을 살펴보려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천장에 드려진 가림막(帳帷) 아래 카이 딘 황제와 똑같다는 등신상이 용상에 앉아 있는 좌측의 모습과 啓聖殿 안의 풍경입니다. 등신상은 청동으로 주조하여 금박을 입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등신상 뒤에 부챗살처럼 펼쳐진 것은 뒤에 있는 내실로 오르는 계단난간으로 생각합니다. 부채살처럼 생긴 바로 뒤에 계단이 붙어 있습니다.
등신상 뒤에 방이 또 있는데 위패를 모신 곳은 아닌지.. 크게 확대해서 보았더니 단상이 있고 그 위에 청화백자필통 같기도 한 것에 붓으로 보이는 것이 3개 꽂혔고 나팔모양의 그릇도 있고 황금색의 무슨 동물 같은 것도 보이고 필통 양 편에 빨간 꽃봉오리가 놓였습니다. 천장은 등신상이 있는 곳과 대등한 문양의 휘장입니다.
천장의 휘장을 주제로 담은 사진입니다. 내부의 옥좌에는 1920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실체와 똑 같은 크기로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 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고, 그 밑 18m에는 카이 딘 황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등신상 우측에서 본 啓聖殿 내실 모습입니다. 자기그릇조각으로 꾸민 이 엄청난 전경을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자꾸 전장에 달린 휘장에 있는 용의 얼굴이 황소머리 같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돈다.
황제 等身像 뒷편 모습입니다. 뒤 내실로 오르는 계단이 보입니다.
천장에 구름과 용은 그림인 것 같다.
천장의 모습이다. 용이 구름을 희롱하는 것인지 구름 속에서 헤매는 것인지..
'산수대조유천하독존지세 (山水對朝有天下獨尊之勢)
옥도 아니요 자개도 아닌 각양각색의 도자기 파편만으로 이렿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내실을 꾸미다니 생각도 기발하고 솜씨도 빼어났다.
강공산조억만사년운승지 (江拱山朝億萬斯年雲勝地) 이 베트남의 한자 뜻은 우리의 뜻으로 풀이하는 일은 삼가하겠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도자기 파편으로 문양을 만들고 꾸민 이 묘실을.. '空手來 空手去'
카이 딘황제의 예장도
카이 딘 황제가 지녔던 유품과 생전에 집무하던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더 둘러보려다가 일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섰는데 가이드 보조가 숨이 턱에 찬 모습으로 나를 찾아 그 많은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다.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2016년 3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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