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비/奬忠壇碑》
장충단비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충단과 함께 세워진 비석입니다. 1895년(고종32년) 을미사변 때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에 의해 시해弑害되었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 그리고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고종황제는 190(광무4년)에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191년 일본의 강권으로 한일병합이라는 치욕스런 명칭으로 군권의 강탈과 함께 장충단도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으며 1920년 대 후반에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이란 명목의 위락지로 삼아 충절의 영령마져 짓밟는 오만무례함을 자행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奬忠壇"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쓴 것이고, 뒷면의 비문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내용으로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쓴 것입니다.
장충단비와 장충단 석등
순종황제가 황태자 였을 당시 쓴 글씨 "奬忠壇"
<장충단비 뒷면>
碑文은 민영환이 지었다고 한다.
"第一江山太平無思"란 碑와 石燈,
"壬午軍亂, 甲辛政變, 乙未史變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웠던 장충단 터라는 표석."
임오군란: 조선 고종 19년(1882년)임오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군제 개혁에 반대하며 일으킨 난리로 이를 계기로 다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는 등 사태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청나라에 압송되었으며, 조정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다.
갑신정변: 조선 고종 21년(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당이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 거사 이틀 후에 민씨 등의 수구파와 청나라 군사의 반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감.
을미사변: 조선 고종 32년(1895년) 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이 친러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 사건임.
제 9대 서울특별시 시장 임흥순(1895년 - 1971년)시절에 세운 수표교 비석.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다리는 서울시내 중구 수표동43번지 청계천 위에 놓여있던 것으로서 ○○○○○ 다리로 고종 31년 단기4237년에 보축한 것으로 단기 4292년 12월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하여 수위표와 함께 이곳 장충단에 고적으로 영구히 보존한다."
단기 4293년 1월 서울특별시장 임흥순.
<장충단 공원 입구>
신라호텔, 수표교, 정자, 장충단비 등이 한 눈에 보인다.
수표교 남측면 모습.
수표교 북측면 모습.
이 수표교는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인 다리로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입니다. 세종2년(1420년)에 축조된 이 다리는 큰 화강암으로 육각형으로 다듬어 세운 다리 기둥 위에 길게 모난 횃대를 걸치고 돌을 깐 매우 진기한 수법의 다리입니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곳에 마구를 파는 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고 불렀으나 세종 23년(1441년)에 다리 서쪽 중앙에 청계천의 水位를 측정할 수 있는 水標를 나무로 만들어 세우면서 다리 이름도 수표교라 불렀으며 이 수표를 성종 때 돌로 만들어 세웠고, 영조 36년(1760년) 대대적인 개천 준설 후에 따로 수표석(水標石)을 세워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적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수표교란 이 수표석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영조 임금님은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높이의 간격을 두고 새긴 庚 . 辰 . 地, 平을 새겨 물의 수위를 관찰하여 큰 물에 대처하도록 하였고, 다시 영조44년(1768년)과 고종24년(1887년)에 개수하고 다리 난간에 '戊子禁營改造'와 '丁亥改築'이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가 27.5m, 폭 7.5m, 높이가 4m 이며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습니다. 좌우에 설치된 돌난간에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고 바닥은 청판석 을 4줄로 깔았습니다. 다리밑 교각은 거대한 화강석으로 절묘하게 가설을 하였으며 교각기둥에는 주척 1자로 그 길이는 평균 21.5㎝의 간격으로 눈금을 새겨 놓았습니다. 또한 수표교는 서울의 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날 서울 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겨하였던 답교놀이(踏橋:다리밟기) 때는 이곳이 가장 성황을 이룬 곳 중의 하나였고,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위·아래에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구경하였다고도 합니다. 광복 후에도 이 다리는 수표석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남아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 되면서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서울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같이 놓여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청량리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2005년 청계전 복원할 때 원래의 자리에 다시 놓으려 하였으나 복원돤 청계천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 못하였고 대신 그 자리에 지금의 다리가 놓였습니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手標洞)과 관수동(觀水洞)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셔 놓았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이 설날·한식·단오·추석·동짓날·섣달 그믐 등 여러 차례 이 교량을 건너 왕래하곤 하였습니다. 오늘날 장충동에 옮겨져 있는 수표교를 보면 매끈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엮어 놓았고, 돌난간도 아름답게 꾸며 놓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교량이며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자연재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도성 사람들에게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대피하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한 교량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이 교량과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희대에 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김두환이 어렸을때 거지생활을 한 곳이 바로 수표교 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44년(1768년)과 고종24년(1887년)에 개수하고 다리 난간에 '戊子禁營改造'와 '丁亥改築'이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와서 확인해 보니 무자금(戊子禁)을 새긴 난간돌은 보이지 않고 '丁亥改築'이라는 글과 '영개조'(營改造) 석자만 보이는 것으로 볼 때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 되면서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세울 때 유실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경진지평/庚辰地平>
영조 임금님은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높이의 간격을 두고 새긴 庚 . 辰 . 地 . 平의 水位標로 물의 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였습니다.
<교각에 새겨진 庚辰地平>
庚辰地平은 경진년 영조 36년(1760년)에 하천에 쌓인 모래를 파내고 바닥을 평평히 하였다는 기록이다.
물줄기의 압력을 분산하기 위해 마름모꼴로 놓은 교각.
돌로 놓은 다리보.
다리보와 다리기둥의 모습.
수표교 상판 모습.
수표교 남쪽 난간 모습.
동쪽으로 본 수표교 상판(上板) 모습.
<다담뜰>
장충단공원 안에 있는 한옥으로 차와 식사를 할 수 있다.
<맨홀뚜껑>
철판에 은행잎, 단풍잎 등 낙엽무늬와 글씨 '남산공원'을 투각으로 물구멍을 냈다.
2015년 3월6일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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