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친구와 함께 차로 거돈사지를 둘러보고 법천사지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미흡한 감이 있어 다시 찾아갈 생각을 하다가 오늘 마음먹고 기차와 자전거를 이용하여 다녀왔습니다. 자전거를 중앙선열차에 실고 원주 동화역桐華驛에서 내려 다시 자전거로 국도와 섬강자전거도로를 넘나들며 법천사지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총거리는 29 km,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고 되어 있으나 가는 중간 중간 사진도 담고 자전거로는 초행이기에 길을 찾느라 20분이나 더 걸렸습니다. 동화역전에는 자연석에 '만낭포晩浪浦'라는 비가 있는데 만랑포는 만낭개에 섬강나루가 있어서 만낭포라 합니다.
동화역桐華驛에서 우측방향 문막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국도를 따라 여주방향 부론면으로 계속 가면 되지만 갓길조차 없는 협소한 도로에다 대형화물이 빈번하여 매우 위험합니다. 여기서 650 m 정도 가다가 간현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1.84 km 정도 가다 지정로와 왕건로 등 국도와 섬강자전거도로를 번갈아 가며 주행해야합니다.
다시 국도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700 m정도 국도로 가면 다시 자전거도로로 진입하게 됩니다. 자전거도로 우측 들판은 '만낭개들'입니다.
<섬강자전거도로>
이 섬강자전거도로를 타고 내쳐가면 여주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 '섬강두꺼비오토캠핑장'과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물을 보관관리하거나 배에 실어 서울로 보내던 흥원창을 지나 바로 다시 국도로 나가는 길이 좌측으로 있습니다. 그 길로 500 m정도 가다보면 촤측으로 법천사지 표석이 있습니다. 좌측 들판은 마동들입니다.
깊은 가을하늘만큼이나 푸른 섬강을 따라 비단 폭을 깔아놓은 듯 펼쳐진 자전거 길가에 만추의 갈색빛깔이 아늑한 느낌으로 가물가물 정신 줄을 놓게 합니다.
초행길을 달리다 보니 어, 길이 끝이네! 잘못들어섰나 싶어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우측으로 산을 끼고 목교로 자전거도로를 내었습니다.
햇볕이 들지않는 산자락 밑 응달이라 목교에 이끼가 생기고 길이 미끄럽습니다.
남한강 합류점인 흥원장이 있던 곳에서부터 원주방향으로 4 km 지점이라는 푯말이 있습니다.
새로 콘크리트 포장을 한 길입니다. 가도 가도 길은 끝도 없고, 보이는 것은 산 넘어 산 뿐이다. 애꿎은 페달만 밟을 수밖에...
<山外有山山不盡 路中多路路無窮 > "산 밖에 산이 있으니 산은 끝이 없고, 길 가운데 길이 많으니 길은 무궁하구나."
우측은 섬강이 흐르고 좌측은 산자락을 끼고 돌아가는 길가 정취에 잠시 멈추고 주변 경치에 젖어봅니다.
평일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 길은 자전거마니아들이 뜸한 길인지 좀 을씨년스럽습니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뭇가지 사이로 섬강 맑은 물과 하얀 모래 그리고 건너 편 산에 단풍이 곱습니다.
북쪽 산자락을 끼고돌아가는 이 길은 이른 새벽이내가 서린 듯이 어둡고 침침합니다.
강 건너편은 밝은 햇살에 강물은 파랗고, 모래알은 하얗게 자지러지고 산자락은 알록달록 몸치장이 한창입니다.
남한강자전거도로와 여주 여강자전거도로 분기점이 1.7 km 앞에 있음을 푯말이 암시합니다. 시간이 되면 갈 때는 강천보를 거쳐 양평역으로 갈 생각입니다만 어찌될지는 법천사지에서 걸리는 시간에 달렸습니다.
고동색, 갈색, 초록, 노랑, 빨강, 분홍, 연두빛 .. 단풍은 모두 시악시처럼 곱구나!
나뭇가지.. 나무는 종류마다 특유의 형태와 그 折枝가 저마다 아름답다. 뻗고 휘어지고, 늘어지고 꺾이고 틀어지고..
이곳은 오토캠핑장으로 이름은 '섬강 두꺼비'라고 합니다.
넓은 지대에 주차지처럼 캠핑지구획선을 두고 구획마다 푯말이 있네요. '두꺼비 18호'
'초록 생명의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풍요로움울 담다. 반짝이는 뭉결과 흔들리는 갈대바람... ' 시구는 참으로 곱고 유연하건만 그 아름다운 글귀를 새긴 시비는 각지고 모나고 너무도 멋 없어라... 어울리지 않는 것도 함께 어우러지는 것 또한 세상이려니..
이 표석도 웃깁니다 '섬강두꺼비'가 이 오토캠핑장의 이름이고 '오토캠핑장'은 안내문 인가,
큰 글씨와 작은 글자의 배분을 똑같이 주니 넘 어색합니다. 차라리 작은 글씨도 큰 글자로 새겼으면 배분이 자연스러웠을 것을..
<섬강두꺼비 오토캠핑장 관리소>
<섬강 자전거 안내도>
삼거리입니다. 문막, 여주, 충주로 갈리는 곳입니다. 나는 문막(원주 동화역)에서 충주방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이 사진은 여주방향에서 찍었습니다.
충주 방향 흥원창 근처에서 돌아보고 담은 사진입니다. 두 개의 고가도로가 보이는 곳이 지나온 삼거리입니다.
<남한강 합류점 지점>
섬강과 여강이 합류되는 남한강합류점이자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서울로 보낼 공물을 관리 보관하거나 배에 실어 서울로 보내던 흥원창이 있던 지역입니다.
<흥원창/興元倉>
고려시대 세곡(稅穀)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곳집의 하나로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관리 보관 수송하던 조창(漕倉)을 말합니다. 조창의 위치는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원주에서 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섬강 북쪽 언덕에 있었다고 합니다. 흥원창(興元倉)에는 강원도 남부 일대의 세곡(稅穀)이 수납되어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예성강 입구의 경창(京倉)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적재량이 2백석인 평저선(平底船) 21척을 보유하였고 책임관리는 판관(判官)이 있었습니다. 세곡의 운송은 판관의 지휘하에 초공(梢工)과 수수(水手)가 담당하였습니다.
조선 초에 이르러 흥원창(興元倉)이 흥원창(興原倉)으로 개칭되어 계승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창(京倉), 가흥창(可興倉) 등 전국에 열 곳이 있었습니다.
<흥원창 옛 그림>
● 현위치 ①
흥호공동묘지
②흥원창
남한강 합수지점 인근의 자전거도로에서 국도 견훤로로 나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국도로 나와 우측 부론면(충주방향)으로 600 m정도 가면 법천사지 안내표지석이 좌측으로 보입니다.
<원주-문막-충주> 시외버스 '버덩말' 정류장 옆 좌측 길로 어림잡아 800 m정도 가면 법천리 법천사지입니다.
<법천사지 알림표석>
'버덩말'버스정류정 앞에서 좌측 도로로 들어서 약 800 m정도 지나면 우측으로 들어서는 길과 함께 법천사지가 보입니다.
표시판이 가리키는 우측으로 법천사지가 보입니다.
<원주 법천사지 / 原州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사찰로 명봉산(鳴鳳山)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지광국사 현묘탑비 (智光國師玄妙塔碑)와 법당터 및 석탑의 일부 등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이 절터에서 나온 석재(石材)들이 흩어져 있다. 절터의 동편 산기슭에는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塔殿址)가 남아 있다. 부도는 서울 경복궁 내 광화문 좌측(서쪽)으로 옮겨져 있으나 탑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光背),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踏道石),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段)인 배례석(拜禮石), 석탑재 등 이 곳에서 출토된 석재를 모아 놓았다.
이 절에 관하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928년(경순왕2)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웅(寬雄), 지광국사, 정현(鼎賢), 덕겸(德謙), 관오(觀奧),각관(覺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방선(柳方善)이란 학자가 니 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이 때 한명회(韓明澮), 서거정(徐居正), 권람(權擥)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허균(許筠)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원주 법천사지> 사적 제466호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 일대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동문선』등 문헌에 의하면 법천사는 신라 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졌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었습니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였던 지광국사 혜린이 은퇴하여 법천사에 머물면서 왕실의 비호하에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조에 들어서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습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제101호)과 탑비(국보제59호)가 고려 제11대 왕 문종(재위1046~1083)에 의해 세웠졌는데 현묘탑은 일제 강점기에 경복군으로 옮겨져 있으며, 탑비는 본래의 자리인 이곳 법천사지에 남아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현묘탑址, 부도전址,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2001~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붕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고 현재 재차 발굴조사되고 있는 사찰부지내에 초석과 건물부재, 탑 부재, 우물, 수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됩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에는 삼족오, 계수나무와 토끼, 비천인, 봉황새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권람, 한명회, 서거정 등은 법천사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법천사지 동쪽 건물지입니다.
고목(古木) 뒤 산 능선 넘어 4.3 km 가면 법천사에 버금가는 大寺刹이었던 거돈사지(居頓寺址)가 있습니다.
동편 발굴지 앞 산자락 중간에 위치한 지광국사현모(사리)탑이 있던 자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경복궁(옛 총독부 건물 옆)으로 옮겨놓기 전까지 지광국사현묘탑이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는 앞 구릉 넘어있는 이 터는 절터의 동편 산기슭에 위치하며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현묘탑전지(塔殿址)입니다. 이 사진에서 우측 물든 낙엽관목 넘어 위치가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사찰지 옆 고목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기묘하고 아름다워 멋진 괴석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초석(柱礎石)
기둥을 세우는 언저리에 꽃잎 모양의 돋을 선을 새기고 둥글게 돌대(突대)를 돌린다음 그 바깥으로 꽃잎모양의 겹 띠를 돌려 새긴 초석으로 요란스럽지 않은 감미로움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 감돕니다.
아름다운 초석이 있는 이 자리는 위치와 규모로 보아 대웅전이 있던 곳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로 오르는 둔덕에서 바라본 법천사지 동편 사찰 터 발굴현장 모습입니다. 서편에도 이만한 사찰지로 보이는 밭과 그 끝에 당간지주가 남아있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일대 (智光國師玄妙塔碑 一帶)
탑비에 이르기 전 우측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지대에 일단의 옛 건축석재들이 아무렇게나 쌓였거나 흩어져 있는 넓은 옛터에 잡초가 뒤덮여 있습니다.
지광국사탑비 앞 건물터 아래에서 법천사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바라본 전경입니다. 당간지주는 이 자리에서 약 300 m 떨어진 좌측 배추밭 뒤 건축물 뒤편에 세워져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탑비가 세워져 있는 주변의 건물터입니다. 뒤쪽 산 바로 뒤에 지광국사현묘탑이 세워졌던 터가 있습니다. 하나의 산자락에 동편에는 현묘탑을 안치하고 서편에는 현묘탑비를 세웠습니다.
현묘탑비로 오르기 전 우측에 있는 건물터입니다.
건물지의 축대는 대부분 복원된 것입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智光國師玄妙塔碑) 일원
지광국사현묘탑비 주변 모습
탑의 지대석의 일부로 연화문 위 문양은 자세히 판별할 수는 없지만 부처손이라는 식물무늬 같습니다.
계단 양 가 앞 모서리에 두는 장식석으로 좌측 두 점은 이무기 머리(螭頭形)형태이고 우측 두 점은 방형(方形) 입니다.
우측 지광국사현묘탑비 축대아래에 있는 건물터로 주춧돌이 이 모두 10개인데 주춧돌의 크기로 보나 위치로 보나 맞은편의 건물터와 같은 모양 같은 규격의 건물이 좌우로 있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맞은편 축대아래의 건물지입니다. 맞은편 건물터와 같은 폭(幅)에 같은 길이로 주춧돌이 10개 놓여 있습니다. 주춧돌의 크기나 모양새나 놓은 방식에다 규모도 같아 맞은편과 같은 형식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귀두 / 智光國師玄妙塔碑 龜頭>
이(齒)를 마주 물고 입술을 올려 송곳니를 드러내어 접근을 경고하는 표정이며 입술 언저리는 불꽃같은 무늬로 아가미처럼 묘사되었으며 무거운 머리를 바치고 있는 목을 보강하기 위해 턱에서 목까지 연결된 지지대를 구현하고 수염형태로 문양을 넣어 자연스럽게 처리 하였습니다. 목등은 톱날모양의 갈기가 있고 목 아랫면은 뱀의 비늘이고 나머지 부분은 잉어비늘형태로 조각하였습니다. 용龍과 이무기螭는 그 형상이 같으나 다만 용은 뿔이 있고 이무기는 뿔이 없는 것으로 차이를 둡니다.
귀부대좌(龜趺臺座)에는 가로와 세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음각선을 새겨 정사각형의 구획을 만들고 그 사각형 안 가운데 육각형을 돋을새김한 그 안에 王字를 양각하고 사각형 안에 육각형을 넣은 나머지 여백은 구슬무늬로 채워 바탕무늬가 되었고 귀부 등 가운데에는 직사각형으로 蓮花文을 새긴 碑座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목 언저리의 옷깃처럼 돋아 올린 테두리는 귀부 언저리와 이어졌으며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움을 표현하고자 곡선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 아래는 파도와 물결무늬를 조각하여 파도 위를 헤염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정면으로 본 귀두(龜頭)
입은 사나운 개가 싸움에 앞서 혀를 물고 송곳니를 들어내어 으르렁 거리는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동그란 눈동자는 개구리나 오리가 앞을 살피는 표정을 하고 있어 순박함을 보입니다.
지대석은 2단으로 무늬 없는 1단과 문양이 새겨진 2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대석의 문양은 상면과 측면 모두에 새겼는데 측면에는 사각형의 창을 마련하고 그 안에 풍화로 마모되거나 무뎌져 알 수 없는 문양이 있고 상면(윗면)에도 음각으로 알 수 없는 무늬가 선각되어 있습니다.
귀부(龜趺)의 동쪽 옆 모습입니다. 모든 문양에 있어서 서쪽 보다 풍화로 인한 멸실이 심합니다. 서쪽에는 표현되지 않은 앞발이 조각되었습니다. 상대석(上臺石) 상면에 선각으로 표현된 무늬가 선명하지만 무늬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 智光國師玄妙塔碑>
귀부의 뒷모습입니다. 꼬리는 S자형으로 작게 표현되었습니다. 뒷발은 보이지 않고 파도무늬가 조각되었습니다.
비석(碑石)은 중국 수혈식(竪穴式) 무덤에서 棺을 달아매어 내리기 위해 세운 돌기둥이 漢代에 와서 부터는 거기에 죽은 이의 行蹟을 후대에 알리기 위한 약력을 새겨 놓은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唐代에 와서는 墓制가 제정되어 五品以上은 碑라 하고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추게 하였으며 六品 以下는 갈(碣)이라 하여 원두비신(圓頭碑身)에 방형대좌(方形臺座)만 사용하게 하여 신분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무렵에 당대의 풍습(唐代風習)이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나 王이나 또한 고려에 걸쳐 高僧들의 塔碑(浮屠碑)에만 적용되었을 뿐, 士大夫에 대한 규정은 없어서 주로 묘지석(墓誌石)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正二品 이상은 신도비를 그 이하는 묘갈墓碣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에도 묘비나 기념적인 성격의 비가 蓋石과 臺石이 없는 그냥 둥글고 편평한 자연석이나 네 면으로 다듬은 비신에 비문을 새겨 넣고 있어 비석 자체의 조형성 보다는 비문의 내용이나 서체 등에 의한 考證史料와 금석학적인 의미의 가치물로 중요시되었습니다. 예로 고구려중원비나 광개토대왕비, 단양적성산성에 있는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등 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석은 주로 臺石, 碑身, 蓋石으로 구성되며 螭首란 이무기가 새겨진 蓋石(갓돌.덮개)을 말하는 것으로 이무기는 용의 형상과 같은 상념적인 동물이지만 용은 뿔이 있으나 이무기는 뿔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국 漢代에는 龍과 螭가 함께 쓰였으나 唐代에 와서는 이무기(螭)로 통일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성루(城樓), 石橋나 일반 건축의 의장 등에 장식용으로도 螭首가 사용되었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의 이수螭首 위에는 탑의 상륜부처럼 2단의 연화대와 연봉우리가 있는 것이 또한 특징입니다.
이 부도탑비의 측면입니다. 이수의 축면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한 쌍의 이무기(螭)가 마주하는 중국 당대의 형식을 본 뜨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부에 귀꽃이 장식되었고 하단은 연화대(蓮華帶)를 돌린 점이 두드러집니다. 비신(碑身) 측면에도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이무기가 위 아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귀부 앞 좌측 앞발은 발톱이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귀부의 우측으로 앞발을 빼꼼히 비집어 내밀고 있습니다.
귀부 뒤는 龜甲과 파도 사이로 발톱만 살짝 보이고 있습니다.
귀갑 전체에 새겨져 있는「 王」 字 입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좌측에 刻字되어 있는 碑銘 「 고려국원주법천사강진홍도붕료정오계정고묘응각탐현도원통제연여법동구행료성도수융염랑철증익지광국사현묘지탑비 변서 / 高麗國原州法泉寺講眞弘道朋了正悟戒正高妙應覺探玄道源通濟淵與法棟具行了性導首融焰朗徹贈謚智光國師玄妙之塔碑 弁敘(敍)」 지광국사를 칭송지칭 한 머릿글입니다.

우측 두 번째 글은 "중대부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상서예형부사감수 권사 겸 태자대전 상주 국신 정유산 봉 / 中大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刑部事監脩圈史 兼 太子大傳上柱 國臣 鄭惟産 奉" 평장사문하시랑 정2품 '정유산'이라는 인물이 이 비문을 감수하였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관급으로 법과 예를 관장하던 문신입니다.
오른쪽 세 번째 줄의 글은 " 승봉랑상서도관랑중사비어대신 안민후 봉 / 承奉郞尙書都官郞中賜緋魚袋臣 安民厚 奉 " 고려 형부 또는 도관에 속하는 관아의 정 6품 벼슬로 지광국사 장례물품 사사賜事를 맡아 했던 관리 안민후가 봉사했음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신 후면(碑身後面)에 지광국사 장례에 시주한 사람들과 봉사한 이들의 이름이 각조되어 있습니다.
비신 후면(碑身後面) 습작이나 연구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도록 글씨체를 크게 촬영한 것입니다.
비석 무늬가 있는 곳에 Carbine소총 아니면 M1소총으로 보이는 철심이 아닌 납이 든 탄알이 박혀 있습니다. 민족상잔의 흔적은 이렇듯이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신전면좌상 / 碑身前面左上> 지광국사일대기가 각조되어 있습니다.
지광국사현묘지탑비와 주변 건물터 모습입니다.
옥개석(屋蓋石) 지붕모양의 덮개석을 말합니다. 이 개석은 각 면마다 이무기(螭)와 용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지광국사탑비의 蓋石 전면에는 두 개의 여의주가 좌우로 배정되고 그 가운데에 이무기 한 마리가 있고 양가에는 용이 각각 한 마리씩 조각되어 있습니다.
개석 바로 아래 비신碑身 상부에는 직사각형을 셋으로 구분하고 가운데 공간에『贈證智光國師舍利士塔碑銘』아홉글자를 전서체篆書體로 음각하고 양 옆 공간에는 화문(花文)을 양각하였으며 비신 언저리는 일정한 구획으로 모란무늬를 새겨 돌렸습니다. 여기서 士字는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합니다.
<개석 측면 / 蓋石 側面>
측면 밑바탕은 3단의 턱을 두고 밑모서리는 연화대를 돌려 새기고 면에 파도무늬를 바탕으로 하여 가운데 여의주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조화를 이루고 그 위는 두 개의 돌선을 곡선으로 구분선을 주고 그 위 세 곳에 귀꽃을 장식하였습니다.
동쪽 측면으로 서쪽 문양과 동일합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뒤쪽 건물터의 모습입니다.
현묘탑비 동측에 있는 건물터입니다.
재단법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발굴지와 이 일대 방치되어 있는 사찰부지 규모로 볼 때 인근에 있는 거돈사지나 양주 천보산자락에 있는 회암사지에 버금가는 대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법천사지 동쪽 발굴현장 모습입니다. 철판을 덮어 놓은 곳은 우물입니다. 이 우물 외에도 2곳이 더 있습니다.
지광국사탑비에서 내려와 좌측 지광국사현묘탑이 있던 자리와 우측 현묘탑비를 아울러 찍은 사진입니다.
법천사지 서쪽 미발굴지 입니다. 배추가 심어져 있고 파란 스레트지붕 건물 뒤에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밭을 일구었을 때 나온 사찰건물석재들을 쌓아 놓은 모습입니다.
당간지주를 보기위해 가는 도중에 발굴현장을 돌아본 풍경입니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깃대(幢竿)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며 평상시에는 종파나 선문의 기를 달지만, 사찰의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또는 부처 및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그에 맞는 깃발도 올립니다.
이 당간지주는 절터의 남쪽에 위치하며 그 높이가 무려 4m에 달하며, 그 크기에서도 능히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표식이나 문양은 없고 밑에서 위로 갈 수록 점점 좁아지고 위 부분은 바깥쪽으로 모를 깎아 둥글게 되어 있으며 안쪽으로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습니다. 두 기둥 사이의 아래에는 깃대를 밑으로 꽂아 두기 위한 지름 66cm, 높이6cm정도의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통일신라 말기내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 됩니다.
<당간 받침돌>
팔각형 받침돌을 5분1 정도 윗부분을 원형으로 깎고 윗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놓았습니다.
<법천사당간지주/法泉寺址 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거는 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있습니다.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당간지주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함께 법천사 옛 터를 힘겹게 지키고 있습니다. 별다른 조각은 없고 사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조금씩 좁아졌고 윗부분은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다듬었으며 두 기둥이 마주하는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이 파였습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팔각형 받침돌을 5분1에 해당하는 윗부분을 원형으로 깎고 위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놓았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주변에 딩굴고 있던 건축부재들을 발굴조사단 건물 앞 마당에 정렬해 놓고 있습니다.
북(鼓)모양으로 생긴 면에는 하트형의 문양을 4방위로 새긴 이 석물은 스님의 유골을 모시는 부도(浮屠)의 몸돌입니다.
(三尊佛)이 새겨져 있는 이 석물은 부처님 뒤에 장식되는 光背입니다.
북(鼓)처럼 생긴 원형의 면 네 곳에 하트모양의 문양을 새겼습니다. 현대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이 석물은 부도의 몸돌로 여겨집니다.
方形의 蓮花座臺로 부처가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부도탑 또는 팔각형 탑의 탑신부입니다.
문양이 새겨 있는 전돌모양의 이 석재는 방형탑신부의 면돌로 추정됩니다.
. 네 측면에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판에 연꽃을 양각한 이 석재는 탑 앞에 놓인 배례석으로 보입니다
이 석재는 지광국사현묘탑비 부근에 있던 것으로 계단 가운데 장식하는 용도로 쓰입니다.
팔각에 복연을 장식한 부도받침돌로 여겨집니다.
하단에는 연화무늬를 새겼고 그 위에 부처손무늬를 장식한 이 석재는 탑지대석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이 문양과 똑 같은 문양이 광화문 해치의 대좌석(臺座石)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문양은 부처손이라는 식물무늬입니다.
장식용도로 쓰이는 용두(螭頭)입니다.
어떤 용도로 쓰인 돌인지 알 수 없지만, 탑이나 부도 보다는 건축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방형의 석주를 세울 수 있는 용도의 部材로 방형의 구멍은 중간에 턱이 있고 穿空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쌍을 이루는 석재로 상면 위에 ╋ 字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리탑(浮屠)위에 올리는 지붕돌(屋蓋石)입니다.
사리공이 있는 탑신부, 지대석 등 여러 종류의 석재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 가지 석물들을 임시 정리해 놓은 발굴조사단 유물정리실
발굴현장 안에 있는 우물터 입니다. 우물에는 물이 잠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물이 두 곳에 더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규모로 보아 대 원찰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발굴현장 내에 드러난 수로입니다. 이 수로는 우물가에서부터 사찰 발굴지 외곽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발굴현장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산자락에 지광국사현묘탑이 세워져 있던 제단석(좌측) 과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세워져 있는 곳(우측)보입니다.
발굴현장에 엄청난 석재들이 널부러져 있는 광경입니다.
법천사지를 300 m정도 나온 도로변 밭에서 단무지용 무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뽑아 놓은 무가 밭을 온통 덮었습니다.
무 구경을 끝으로 귀가 길에 들어섭니다.
무밭두렁에 철 모르는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요즘은 일부 철새도 토착한다니 지구 온난화가 눈으로도 느껴집니다.
다시 섬강자전거 길로 들어섰습니다. 짧은 해에 예정대로 먼 양평역으로 가야할지 가까운 동화역으로 되돌아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갈림길까지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페달을 밟습니다.
흥원장 부근의 이 표시말뚝은 한강하구로부터 145 km 지점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려때 이 지방의 곡물(稅穀)을 이곳(흥원장)에서 배에 실어 한강과 임진강을 거쳐 首都 개경으로 운송했을 것입니다.
흥원장이 있는 合水地域이 저만치 보입니다.
이곳이 갈림길입니다. 섬강길을 계속 가서 동화역으로 가느냐 아님 경천보를 거쳐 여주와 여주보를 거쳐 양평으로 가느냐 짧은 해에 배는 고프고 이것이 문젭니다. 여기서 양평까지 거리는 60 km가 족히 됩니다. 그렇게 망설거리다 양평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들어선 길이 잘못들어선 것을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으니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동화역을 향해 달렸습니다. 기차시간(제천행 16시07분)이 1시간 밖에 안 남았거든요 거리는 20여 km인데...
자동차산업 발달과 고속도로 등 산업정책에 이어 80년대에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발표되면서 우리나라 철도는 사양화길을 걷게 되었고 석탄채굴이 중단되자 동화역은 더 이상 광산으로 갈 갱목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기차를 이용하던 이들도 자가용이나 마을 앞까지 들어오는 버스를 이용하게 되어 동화역은 결국 차내취급역이라는 안타까운 이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70년을 훌쩍 넘긴 오랜세월을 동화역과 함께하며 좋은 일 궂은 일을 모두 지켜본 이 나무들은 동화역이 식민지 세상에서 나서 광복과 6.25전쟁의 혼란기를 보낸 후 산업화 시대엔 황금기를 맞고 1980년대 이후엔 사양화의 길을 걷다가 이제 다시 국가 발전에 따라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다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다시 봄날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아마도 처음 이 나무들을 심은 철도원의 간절한 기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상행(청량리행) 7회, 하행(도착역/정동진3회,안동2회,제천1회)6회를 이 동화역에 정차합니다.
동화역 열차시각표
상행(청량리 방면)
①제천(07:05)-동화역(07:56)-청량리(09:04), ②안동(07:15)-동화역(09:44)-청량리(10:46), ③정동진(07:00)-동화역(11:38)-청량리(12:43), ④부전(07:20)-동화역(13:51)-청량리(14:52), ⑤안동(13:25)-동화역(15:43)-청량리(16:42), ⑥안동(15:20)-동화역(17:44)-청량리(18:57), ⑦ 정동진(14:45)-동화역(19:28)-청량리(20:29).
하행
①청량리(07:05)-동화역(08:16)-정동진(12:48), ②청량리(09:10)-동화역()-정동진(), ③청량리(12:10)-동화역(13:16)-정동진(17:36), ④청량리(15:10)-동화역(16:07)-안동(18:33), ⑤청량리(19:07)-동화역(20:16)-안동(22:42), ⑥청량리(20:13)-동화역(21:20)-제천(22:13),
<동화역 안쪽 풍경>
<동화역 소나무 은행나무>
동화역사 안에는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나란히 자라며 그 멋진 자태로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느낌을 줍니다. 이제는 동화역의 상징이된 소나무와 은행나무는 중앙선이 처음 개통되던 1940년 4월경 한 직원이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합니다. 중앙선 철도는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광물자원을 수탈하는 목적으로 건설됨과 동시 세워진 동화역은 광복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전쟁이라는 아픔을 겪으며 그 와중에 소실된 것을 1956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전후복구와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철도는 과거 식민지 착취의 수단이 아닌 산업화의 동맥으로 사람과 물자를 수송하여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화역 구내 야적장에는 광산으로 실려 갈 갱목이 산더미처럼 가득했고 열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그 철도원이 심은 이 나무들이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올곧음과 꿋꿋함을 지켜왔듯이 이 나무들의 보호 아래 동화역도 그렇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활기롭게 밝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잘 길러진 나무가 아니라 격동의 세월을 헤쳐 온 철도사의 동반자로 동화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푸르게 푸르게 살아있기를...
동화역 원주방향 플랫폼
제천서부동성당
제천경찰서 앞 용두천 제천시청 및 중앙고속도로 톨게이트 방향
용두천 제천시내 방향
2014년 11월6일 <鄕香>
'◈ 세월에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자령 진행중 (0) | 2015.02.10 |
---|---|
甲午年 끝자락에 용두산에서.. (0) | 2014.12.28 |
양주 목화축제 (0) | 2014.09.21 |
남양주 운길산 슬로시티 호젓한 길 (0) | 2014.08.25 |
설악비경 (雪嶽秘景) (0) | 201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