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시각을 보니 정각 5시였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니 구리시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가려면 전철을 3번 갈아타고 걸리는 시간은 56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홍대입구역에서 오늘 함께 산행할 분들을 만나기로 한 시각은 07시20분, 1시간10분 여유를 두고 6시10분에 집을 나섰건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일요일이어서인지 전철배차 간격이 평일보다 길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생각지도 못한 일에 시간은 흐르고 전철은 오지 않고 답답한 건 차치고 늦으면 배를 노칠 것은 뻔한 일이니 할 수 없이 오늘 함께 갈 분들께 전화로 좀 늦겠다는 말씀을 전하고 우여곡절 끝에 홍대입구역에서 일행을 만나 천만다행으로 시간대 강화행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저로 인해 잠시라도 마음 쓰셨을 세 분, 정말 미안했고 미소로 맞아 주심에 고마웠습니다. 특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산행 내내 온화한 미소로 친절하게 이끌어 주시며 세심한 배려로 일관하시던 몽블랑님, 자애로움으로 편함을 주시던 송뽕님, 제갈량 같은 번득이는 지모와 해박함으로 시종 재밌는 대화로 즐거움을 나누어 주시던 동화군님 세 분으로 인하여 참 많이 행복한 일정이었습니다. 늘 좋은 나날이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창후리여객선터미널까지 타고 온 버스의 번호가 1111번입니다. 일이 네 개인 이 숫자는 나에게는 인연이 깊은 제가 좋아하는 행운의 숫자이기에 오늘 산행일정에 즐거움이 있을 징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차량들도 승선을 위해 차례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인 오늘 해상여객선터미널대합실은 한산했습니다.
대합실 벽에 걸린 시침이 09시48분을 가리킬 쯤 승선이 시작되었습니다.
화개9호, 나를 안전하고 즐겁게 교동도까지 책임지고 데려다줄 든든한 너의 이름은, 화사한(華)모습으로 덮개(蓋)를 열고 있으니 고맙다!
화개9호는 창후리선착장에서 뱃머리를 돌리려고 뒷걸음질을 합니다.
항해하는 뱃전에서 우측을 보니 강화도와 교동도 간을 잇는 연륙교가 공사를 마무리 하고 준공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년1월이면 개통을 한다는데, 그 때면 여객선을 타고 갈매기와 노니는 낭만은 더 이상 이곳에서 느낄 수가 없겠지요.
어쩌면 너를 타고 교동도 가는 길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구나! 그래도 너는 젊고 건강하니 다른 길을 찾아 든든한 모습으로 네 직분에 다할 줄 믿는다.
상념은 어느덧 여객선을 교동도선착장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사람도 자동차도 하나 둘 모두 내려 교동도의 아늑한 품으로 안깁니다.
선착장에 도착한 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 정면에 잔디를 심어 가꾼 가운데 표찰은 어쩌면 그렇게도 옛날 학생모자에 달고 다닌 배지(모표)를 닮았을까!. 교동읍 표찰인가
오늘의 산행은 월선포선착장-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효자묘-한증막터-석천당-대룡리 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월선포. 16km거리에 6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입니다. 월선포를 떠나 화개산 들머리를 향해 가는 중입니다.
월선포에서 5-600m 정도 떨어진 곳에 갈림길 우측 상룡리로 들어섭니다. 장승부부가 맞아주는 여기서 150m가면 바로 화개산 끝자락인 들머리입니다.
길가 고추밭에 수확을 포기한 빛깔도 고운 붉은 고추가 하얗게 바래 가고 있습니다. 올 고추농사가 잘되어 물량이 넘쳐 품값 건지기도 어려워 그냥 버린다고 합니다. 에 고, 그 안타까움을 어찌할까..
보드랍고 황토 냄새 향기로운 밭 둔덕길로 교동향교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산자락을 끼고 가는 길 우측으로 閉舍된 교회건물이 보입니다 건물의 규모나 형태를 보아 한 때는 제법 번성했을 교회였을 텐데.. 서울이나 도시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번성하는 교회가 이렇게 폐사된 것을 보니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한 때는 이 만한 교회가 있었을 만큼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하얀 억새꽃이 한들한들 코스모스를 대신합니다.
예쁜 길잡이 안내판이 안개 자욱한 날임에도 기분을 상큼하도록 즐겁게 합니다.
범상치 않은 품격에 중후한 멋을 느끼게 하는 잘 생긴 세 분이 있어 든든한 하루가 되겠습니다.
그래도 한 때는 종2품의 가선대부에 공조참판(지금의 산자부 차관)을 받은 연안 이 윤철 공이시여. 비석은 6.25전란의 총알받이가 되었었고 묘에는 기둥같은 나무 뿌리박고 살도록 돌보는 후손마저 끊기셨는지, 생전에 내노라 하셨을 명예와 영화도 한 줌 양분으로 돌아가는 저 낙엽보다 났다고 그 누구라 말할 수 있을까! 비석의 상태나 양식으로 보건데 대한제국(1900년 초) 때 묘로 보이니 겨우 100년 전후의 묘이건만...
아무도 걸은 흔적없는 이 오솔길에서 한 걸음 옮길 적에 꿈을 줍는 소녀가 되었고, 한 걸음 옮길 적에 꿈 많은 소년이 되었다.
걸음걸음 가는 오솔길에 알록달록 예쁜 리본들, 나풀나풀 춤추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행여 길 잃을 가 봐 나를 챙긴다.
《교동향교/喬桐鄕校》
고려 충렬왕12년(1286)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합니다.
안향(安珦 1243~1306)은 고려시대 학자이자 名臣입니다. 본관은 順興이며,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입니다. 조선 제5대 임금 문종 때부터 문종(文宗)의 휘(徽)인 향(珦)을 피해서(避徽) 向으로 적기도 했으며 초명을 따라 안유(安裕)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당에는 안유(安裕)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솟을 대문>
솟을 삼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입니다. 명륜당은 선비(儒生)들이 사서 오경을 공부하고 강독하며 초시준비와 향음주례 및 각종행사를 하던 곳입니다.
<서재/西齋>
유생들의 거처, 지금의 학교기숙사 같은 용도의 건물입니다.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옆 내삼문 축대 아래에 있는 명문(銘文)이 있는 「老龍巖」이란 이름의 바위입니다.
이 노룡암은 원래 교동현 東軒 복쪽뜰 층계 아래에 있었는데, 위에는 울창한 숲속에 늙은 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축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유(丁酉) 숙종(肅宗)43년(1717년)에충민공 이봉상이 노룡암 이라고 3자를 지었는데, 그 후 57년 계사(癸巳1773년)년 영조(英祖)49년에 그의 손자 달해가 그 고적에다 글 지은 것을 새겼습니다. 경진(庚辰1820年)순조(純祖)20년에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호가암 장군이 풍기릏 깨끗이 하였다."라는 글 7자를 새겼습니다.
1831년(純祖31 辛卯年) 봄에 거듭 석대로 쌓아 있던 것을 1987년(대한민국 40년)에 이곳 교동향교로 옮겨 놓았습니다.
대성전(大成殿) 앞에 있는 내삼문(內三門)은 유교를 바당으로한 공자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교육기관인 명륜당과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사이를 구분한 담에 설치한 문입니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쪽문(側門)입니다.
<대성전/大成殿>
고려 충렬왕 12년(1286) 당시 유학 제거로 있던 문선공 안유(安裕)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10철(十哲)의 초상을 모셔와 당시 화개산 북록(現향교골)의 문묘를 모셨다가 충렬왕29년(1303) 송도로 송도로 모셔졌다고 하여 首位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교동향교를 首廟라 이름(稱)합니다. 사당은 잠을쇠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이곳을 들어오기 전에 관리인에게 사당 안을 보고 싶다고 양해를 얻어 안내를 받아 사당 안으로 들어가 위패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문성공 안유(향) 상 (文成公 安裕 像)
조선조 영조17년(1741) 府使 조호신(趙虎臣)에 의해 화개산 북쪽의 향교골에서 화개산 남쪽의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대성전에는 孔子, 顔子, 曾子, 子思子, 孟子 오성위(五聖位)와 송조이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문선왕(文宣王)은 중국 당나라 현종이 孔子에게 내린 시호(諡號)입니다. 사당(大成殿) 안 정면에 모셔 놓은 공자(文宣王)의 위패입니다.
<대성전 안 우측/大成殿 內 右側>
서무(西廡)에 모셔져 있던 최치원(문창후), 정몽주(문정공), 정여창(문헌공), 이원적(문원공), 김인후(문장공), 성 혼(문간공), 조 헌(문열공), 송시열(문정공), 박세채(문순공)의 위패가 대성전 안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대성전 안 좌측/大成殿 內 左側>
동무(東廡)에 모셔져 있던 설총(홍유후), 안유(문성공), 김굉필(문경공), 조광조(문정공), 이황(문순공), 이이(문성공), 김장생(문원공), 김집(문경공), 송준길(문정공) 이상 9분의 위패가 대성전으로 옮겨 모셔져 있었습니다.
聖賢들의 위패(神位)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 마당 좌우에는 東廡 · 西廡 라고 하는 건물이 있으며, 각각 우리나라의 현자 9위를 나누어 모시던 곳입니다. 현재는 보관상 모두 대성전 안 좌우에 모셔져 있습니다.
동무(東廡)에는 설총(홍유후), 안유(문성공), 김굉필(문경공), 조광조(문정공), 이황(문순공), 이이(문성공), 김장생(문원공), 김집(문경공), 송준길(문정공) 이상 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서무(西廡)에는 최치원(문창후), 정몽주(문정공), 정여창(문헌공), 이원적(문원공), 김인후(문장공), 성 혼(문간공), 조 헌(문열공), 송시열(문정공), 박세채(문순공)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성전약수/成殿藥水>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 西側에 위치한 이 약수는 예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南北의 京鄕의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여 위장병치료에 효험이 큰 용출수(聳出水)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샘이 솟는 곳이 대성전 밑에 발원하여 그 이름을 성전약수로 불리어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 곳 명륜당 유학생들이 이 물을 마시며 공부를 하여 文成을 이룬 이가 많아 교동을 文鄕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 약수의 효험과 무관치 않으며 특히 근간에는 교동의 청정환경과 더불어 이 물이 아토피성 피부병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라고 합니다.
교동향교 우측 단 아래에 있는 아담한 연못입니다.
교동향교 좌측 언덕진 포장도로 100m정도 올라가니 바로 조계종 법문 화개사(華蓋寺)입니다.
<부도/浮屠>
이 부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만든 일체형 탑모양의 부도로 상부에는 연봉우리 모양에 지붕돌(蓋石) 형식으로 꾸몄고, 중심부는 일반적 양식으로 둥근 항아리 모양으로 표현하고, 하부는 연좌대(蓮座臺)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맛이 있습니다.
<화개사/華蓋寺>
이 절의 창건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말 문신 목은 이색이 독서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 한 점과 근래에 세운 팔작지붕의 一字形 긴 건물 한 채만 있으며 단출하고 말끔하여 산사의 고졸한 맛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간단한 간식과 커피를 마시고 정담을 나눕니다.
<화개사 앞 잔디마당>
<문무정/文武井>
화개사에서 50m정도 화개산 정상쪽으로 가는 위치에 있는 문무정은 본래 동쪽에 文井, 서쪽에 武井이라는 두 개의 샘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문정의 물이 많으면 문관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의 물이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이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지금의 삼산면)까지 비추어 그 곳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하게 되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운 후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송가도에서 이 노승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었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무정이 메워진 후 교동에서는 문관과 무관의 배출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전해 온다고 합니다.
<문무정/文武井>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우물 주변에 돌로 쌓은 잔흔이 보였습니다.
능선에서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길에는 조각조각 쪼개진 돌멩이가 쌓여 있었습니다. 굵게 부서진 바위는 다시 주먹만 하게 쪼개지는데, 이곳 바위의 특성입니다.
<화개산 봉수대/華蓋山 烽燧臺>
화개산 정상과 잇대어 있는 連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이 봉수대는 가로 4.6m, 세로 7.2m, 높이1.2m의 석단만 남아 있습니다.<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편마암의 일종으로 바위들이 마치 송판을 쌓아 놓은 것 같습니다.
<동화군 님, 몽블랑대장님, 송뽕 님>
<259.6m의 화개산 정상>
화개산 정상 너른 곳에 외롭게 서 있는 정자 하나 보이는 것은 오직 뽀얀 海霧뿐이네.
텅 빈 정자는 너무 허전해~~ 그래서 청했다오. 선비 세 분, 그러나 그 건 내 바램일 뿐 체격도 우람한 사천왕들이었다오. 보아도 보이지 않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바다와 섬과 하늘, 그 모든 것을 삼킨 뽀얀 海霧
교동도 神仙의 산, 華蓋山 頂上에 올라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仙景은 아무 곳에도 없어라. 안개여..
화개산정상에서 둘러본 풍경입니다. 하늘과 바다가 안개속으로 잠식되었습니다.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 태어나 사는 동안 환희의 날도 고통의 날도 지나고 보면 내 안에 모두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억새꽃 핀 길 따라가는 길은 길지는 않아도 마음 설레는 진한 감동을 줍니다.
<성혈바위/星穴巖石>
성혈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의 별자리, 풍요와 多産, 長壽, 태양숭배, 자연숭배, 마을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으로 봅니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 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바위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동사랑회 글)
우측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호젓한 이 길은 성벽을 끼고 있어 옛 병사들이 순찰하던 길이 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낙엽이 주는 감촉과 소리에 감상에 젖기도 합니다.
옛 성벽이 있고 성치(城치)가 있었을 법한 전망 좋은 이곳에서 눈을 돌려보니 안개 속으로 바다와 인근의 섬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입니다.
<화개산성/華蓋山城>
이 산성은 교동도에서 제일 높은 화개산 위에 축성한 內 .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 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산성으로 남쪽은 화개산 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북쪽은 화개산의 북록에 걸쳐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축성시기는 알 수 없고 명종10년(1555년) 최세운이 증축하고, 선조24년(1591)에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영조13년(1737)에 개축하여 軍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적을 막아 무찌르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장수의 기개가 서린 옛 성터에 오르니 무너져 내린 성곽에 푸른 이끼만 생기롭게 빛난다. 자연은 모든 것을 이처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이르네.
효자묘가 있는 곳의 전경입니다.
<효자묘/孝子墓>
제단처럼 놓여 있는 봉분 앞 판돌 위에 어느 님께서 담배로 祭를 올렸습니다. 뜻은 좋은데, 불을 붙여 놓고 갔으니 그러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효자샘에서 내려온 길을 돌아봅니다. 엉성하고 성글지만, 돌을 딛기 좋게 자연스럽게 놓은 계단이 예쁘다 싶습니다.
화사하게 불타던 낙엽이 떨어져 깔린 마지막 늦가을, 호젓하고 화사한 오솔길은 무수한 낙엽만큼이나 상념을 떠 올리게 합니다. 앞서 가는 형제분들이 모통이를 돌아가는 모습에서 아쉬움을 봅니다. 무엇에서나 끝자락은 묘한 서글픔 같은 여운을 줍니다.
산행도 얼추 끝나나 싶습니다. 이런 아치 파고라가 보이니...
하산 길옆 계곡아래 돌을 쌓은 무덤 같은 것이 보입니다. 아, 옛날에도 요즘처럼 멧돼지가 무덤을 파서 아예 돌로 쌓았나보다 싶으니 얼마 전 방송에서 소개됐던 어떤 분이 조상 봉분을 흉물스럽게 시멘트로 덮었다던 생각에, 아, 이런 방법은 괜찮겠다 싶어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한증막/汗蒸幕>
안내판에 의하면 이 한증막은 조선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목욕은 물론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1970년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한증막은 찜질방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선조들의 治病과 목욕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시설자료라 하겠습니다. 교동도에는 이러한 시설이 수정산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이 병환과 피로를 다스리는 민간요법으로 이용되어온 시설로서 여럿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요즘의 24시 찜질방을 노천으로 끌어낸 듯이 자연을 이용하여 목욕과 한증 그리고 삼림욕 모두 즐길 수 있는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한증막 안에 불을 지펴 온도가 높아지게 되면 재를 꺼내고 잎이 무성한 생솔가지를 바닷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낸 후 앞에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고 옆 시냇물로 몸을 씻거나 온돌평상에 누워 서서히 땀을 식힌 다음 다시 반복하는 짜임새 있는 시설입니다. 사진에 돌로 봉분처럼 쌓아 만든 불가마의 외형모습과 그 앞에 조금 비켜 있는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실 수 있는 옹달샘이 보입니다.
찜질방 규모는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3.0m 면적 16㎡(4.8평)입니다.
입구에서 들여다본 찜질가마 바닥 모습.
찜질가마 안의 일부 모습.
노천에서 삼림욕도 즐길 수 있는 온돌평상.
찜질 후 흘린 땀만큼 물을 마실 수있도록 찜질가마 옆 앞에 만든 바가지우물,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의 품 안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닮은 찜질방, 일상 모든 생활에서도 그랬지만, 우리 옛 사람들이 얼마나 멋있고 풍류 있고 과학적으로 찜질을 즐겼는지를 한 눈에 볼 수가 있었습니다. 현대식 가마도 못 따를 찜질가마, 노천에 누워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온돌을 놓아 만든 평상, 찜질방에서 나와 음용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는 샘물, 땀을 씻을 수 있는 가까운 개울, 지혜로움이 고스란히 남아 나를 감동으로 내몹니다.
<石泉堂>
효자샘터에서부터 나무 판에 아름답고 감성 풍부한 詩와 글을 써 걸어 놓은 이 '석천 김흥기 님의 집입니다.
내 어릴 적에 사람 사는 냄새 향기로웠던 5-60년대 왕십리 길가에서 흔히 보던 그 풍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내 무척 그리웠는데, 이제 보니 모두 다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아, 그런데 호동이가 머리를 빡빡 깎은 이발소네, 그도 옛 시절 향수에 못 이겨 이곳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깎았을 거야! 나도 그렇게 빡빡 깎고 싶은 충동을 느껴 머리를 만져보았지만 이미 빡빡 깎은 머리에 아쉬운 한숨만 나왔었지, 옛날에는 기계총을 옮아 미웠던 이발소도 지금은 어여쁘기만 하구나!
청계천 쪽방집 뒷골목을 걷는 기분에 또 상념에 젖는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 신설동 인근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겼을 무렵 청계천 뚝방기동차길 아래 이런 골목들이 있었답니다. '울긋불긋 化粧을 한 아가씨들이 소매를 붙잡고 ' 학생 놀다가"라며 끌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도망치던 그 시절이 지금은 그립다. 지금은 엄마한테 혼나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데.. ㅎㅎ
어릴 적에 서울에도 이처럼 구스레한 다방도 많았었지요. 아침이면 모닝커피에는 예쁜 이파리 모양의 종지에 계란 반숙이 나왔지요. 일부러 그 반숙을 먹기 위해 아침나절에 찾아가기도 했고 겨울이면 좀 비싼 쌍화차를 시켜놓고 따뜻한 조개탄 난롯가에 자리를 잡고 자릿값을 치른 위세로 다방아가씨와 농담도 따 먹고... 아, 그립습니다. 지나간 세월...
이 미용실은 강호동씨가 들여다본 미장원이네,
대장이 도가니 탕이 좋다며 이끌어 주신 음식점, 받아 보니 탕그릇 가득 왕건이가 풍성합니다. 고소하고 맛스런 도가니에 빠져 그만 들어올 때 속으로 다짐했던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잊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보시고 담으실까 나는 아름다움을 담는 두 분의 고운 감성을 담습니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부르며 날아갑니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버선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나이 들어 이미 장성한 자식을 둔 늙은이가 웬 엄마 타령이냐 책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젊어서는 엄마를 몰랐는데, 잊었었는데 나이 듦에 나를 위한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 켜켜이 쌓였음이 보이고, 그 쌓인 정이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그리움으로 몰려오더이다. 이제는 운신도 못 하시는 내 어머니, 그 애잔함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세상 모든 어머니시여~~ 두 손 모아 비나이다. 부디 사시는 동안 앓아눕지 마시고 건강하시옵소서.
논밭을 가로질러 가는 교동순회길 수확이 모두 끝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는 없었지만, 곧게 뻗은 농로를 걷노라니 황량함 스며드는 공허에 일상의 번거로움을 비우며 정리되는 느낌도 있어 좋았습니다.
가을 강가나 바닷가에 아름다움을 심는 억새나 갈대는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하얀 꽃이나 붉은 잎 모두에서 어두운 색깔의 갈대보다 억새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이듭니다.
하얀 손을 들어 수면 건너 둔덕의 그리움을 손짓으로 부르는 것만 같습니다.
하얀 두루미들이 군무를 하는 듯이 탐스러운 억새꽃을 보노라니 절로 웅얼거려지는 동요 하나가 있습니다.
"달 밝은 가을 밤에 기러기들은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 가라고 억새(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남문(유량문) 오른쪽 앞에 있는 비 받침돌(碑臺) 입니다. 그 형상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의 새김 線刻이 오랜 세월에 마멸되어 흔히 비대석으로 쓰는 자라나 거북으로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지만 그래도 거북모양비받침대로 봐야겠지요.
<교동읍성 남문/喬桐邑城 南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음내리577 )
조선조 인조 7년(1629)에 경기수영(京畿水營)이 이 곳으로 옮겨 올 때 둘레430m, 높이6m 의 규모로 돌로 쌓은 城이라고 합니다.
동쪽에 통삼루, 남쪽에 유량루, 북쪽에 공북루라는 3개의 문을 두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 29년(1753년)에 남문(유량루)을 고쳤다고 합니다. 동문(통삼루)과 북문(공북루)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유량루)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멋을 아시는 분일까! 욕심쟁이일까! 한국인의 지주요 모든 이의 뿌리요 공유유산 문화재인 성문을 대문으로 삼다시피 문루 앞에 바짝 정면으로 집을 지어 마치 독점하려는 의사를 보이는 듯하여 점유한 사람이여, 묻습니다. 그리 사시니 성주라도 되시던 가요? 그 집을 성문 안에 넣지 않고 사진을 담으려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올려 찍으니 아름다운 성문만 우습게 되었습니다.
함께 즐거움을 나눈 영혼이 아름다운 분들 고맙습니다.
교동도는 조선시대 경기수영이 있어 개인적으로 답사를 하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배 시간과 풍랑으로 무산되어 미루고 있던 차에 산악회에서 공지 오른 것을 보고 신청해서 다행스럽게도 다녀올 수 있는 행운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달에는 보령 충청수영을 다녀오기도 했듯이 지금의 해군사령부격인 수영은 경상 좌·우수영, 전라 좌·우수영, 경기수영, 충청수영 등 6곳에 수영이 있는데, 충청수영은 당시 건물 일부도 있는 등 어느 정도 유적이 남아 보존되어 있었고, 경기수영은 성문이나 성의 잔재와 흔적이 있는데 비해 나머지 다른 수영은 그 터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니 그래도 경기수영은 옛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에 이만 하기도 다행이다 싶습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저 물처럼 살고 싶는 서울촌부.
누각이 있었을 성문 위는 재빛 하늘만 너무 공허해 달을 하나 그려 넣어 그 허전함을 메꾸어 보았네.
오백년 옛 성터를 두 발로 돌아보니 옛 숨결만 들리고, 성터는 앙상한 뼈골만 남았네, 하 세월이 꿈만 같구나!
소박한 삶을 살았을 따스한 숨결은 어디로 갔을까! 덤불만 그 자리 감싸고 있나니.
옛 관청 터에는 당시 옛사람들도 보았을 古木이 휘하 어린 나무들을 거느리고 당당한 위세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야은 길재(冶隱 吉再1355~1419) 선생의 옛 시(懷古詩)가 떠오릅니다.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 내 오늘 산행 길에 옛 수영청에 와 보니 산천도 변했는가 옛 영화로움 가고 없네, 또 한 세월 흐르면 남긴 내 발자국엔 잡초만 무성하리.
<교동부 옛터/喬桐府址>
조선 인조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이 곳으로 옮기고, 이후에 교동縣이 교동도호부로 승격되어 설치한 관아 건물이 있던 자리입니다. 관아와 객사를 비롯하여 內衙 外衙 등의 관청건물과 안해루, 삼문루 등의 누각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일반적인 지방관아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안해루에 사용된 높이 2m의 석주 2개만 남아 있습니다.
경기수영(京畿水營)이 있던 자리입니다. 경기수영은 경기도 내 해안을 지키는 水軍의 本營(사령부)으로 水使(正三品)의 집무처입니다.
모친의 恨이 가슴에 맺혀 그 영특함이 폭군으로 변했네, 수많은 인명 거두게 하고 학문의 요람 유흥장이 되니 군신간의 믿음과 예 사라지고 거느리던 신하에 의해 폐위되어 바다 건너 이곳 喬洞府廳舍 옆 草屋에 유배되었다오. 그 옛터에 내 오늘 와서 보니 남은 것은 물도 마른 우물 테두리(井字形石) 안에 통나무 하나 처박혀 있고 밭으로 변한 집터 둔덕 가에 후대에 '燕山君溝邸址'라고 새겨 세운 작고 초라한 碑石만 敎訓으로 남았네. 부귀가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고 미움이 무엇인가. 그 모두가 세월에 부질 없느니 한 포기 풀만 못하네.
자욱한 안개 걷으며 고독하고 외로운 길 열어 내 갈 길 내어주고,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하던 듬직하신 몽블랑 님.
늦가을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온 몸으로 낭만을 엮어내고,
억새꽃 만발한 갯가의 정취로 발걸음 걸음마다 서정시로 엮어 드리우는 님이여..
해 저물녘 배 타러가는 억새 밭 길에
추적추적 늦가을 비 발길을 재촉하고
억새꽃 하얀 섬섬옥수 갈채 보낼 때
부둣가 뱃고동 소리 발길을 독촉하네. <仁鄕香村 >
저 만치 뒤에 오시는 님에게,
느슨한 마음 들지 않을 거리를 두고
중간 허리가 되어 힘 내시라 나의 뒤를 보입니다.
저 만치 앞서 가는 님, 야속한 것 같지만, 알지요 그 맘,
뒤 따르는 우리가 배 놓치면 고생스러울 것을 알기에 매정스러운 양 뒤도 안 보고 가면 급박한 느낌을 알고 부지런히 쫓아오리라는 몸짓을 보이신 거죠.
아름답고 호젓한 길에 비마져 부슬부슬 내리니 낭만이 덩굴 채 구르더이다. 그런데 끝도 없이 좋았을 운치 있는 이 길이 길게만 느끼게 시간은 독촉을 했답니다. 아름다웠던 억새야 정말 미안해~~!
승선은 시작되고 부두로 가는 발길은 급하고 급기야 금지구역을 넘어 달렸습니다.
" 나 어떻해 나를 두고 가버리면, 그 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마라 화개7호~~~"
봉우리도 예쁘지만, 봉우리가 아름다워 올린 것이 아닙니다. 배를 놓칠까봐 급한 마음에 길을 두고 이 봉우리 옆 해안으로 들어섰다는 징표로 올립니다. ㅎㅎ
하염없이 부슬 거리는 늦가을 비
소리도 없이 우산 속을 울리네.
울리는 그 소리, 생각나는 그 사람,
빗줄기 소리 정답게 가슴에 스며들 때
그 사람도 스미네 정다웠던 그 사람.. <仁鄕香村>
오늘도 누군가 마지막일 수 있을 추억의 이 뱃길을
담고 있으리,
나처럼 회상하리 먼 훗날...
2013년 11월24일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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