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괴산 조령산 신선봉, 마패봉, 조령관(槐山 鳥嶺山 神仙峰, 馬牌峰, 鳥嶺關)

鄕香 2013. 11. 25. 00:54

2013년 11월15일 대천에서 출발하여 조령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한 시각은 15시 40분 예약한 통나무집에 짐을 풀고 조령제3관문을 보기로 하고 오솔길로 들어섰습니다. 10월17일 문경새재 조령제1관문 (영남제1관 · 주흘관 / 嶺南第一關 · 主屹關)에서 조령제2관문(영남제2관 · 조곡관 / 嶺南第二關 · 鳥谷關(鳥東關)>)까지 갔다가 시간관계로  조령제3관을 보지 못하고 훗날 다시 오기로 하고 되돌아갔었습니다. 내일은 신선봉과 마패봉 산행을 하고 조령제3관으로 하산하기로 했지만, 짧은 해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고 어두워지면 조령제3관문(영남제3관 · 조령관 / 嶺南第三關 · 鳥嶺關)을 사진에 담지 못할 것 같아 사진기만 들고 제3관까지 부지런히 갔으나 우려했던 대로 짧은 해에 어두워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귀틀집 같은 통나무집 안은 원룸으로 콘도처럼 주방시설과 화장실이 꾸며져 있습니다. 방바닥이 따끈하고 온수도 잘 나옵니다.    

 

 

어제 저녁 500m정도 아래 고사리마을에 있는 두 내외가 단졸하게 차린 식당에서 자연산버섯찌개백반을 둘이서 2만6천원을 내고 시켰는데 맛은 말할 것도 없고 버섯향에 민절할 지경이었습니다. 무려 7가지 자연산버섯을 푸짐하게 넣어서 실컷 먹고도 반이 남았기에 포장해 달래서 아침에 밥만 지어 그 버섯찌개로 식사를 마치고 신선봉을 향해 출발합니다. 

 

 

<조령자연휴양림 정문>

 

 

조령자연휴양림 정문 건너에 있는 신선봉으로 오르는 들머리입니다.

 

 

 크고 작은 돌들이 흙을 대신하여 오솔길을 열고 있습니다.

 

 

빽빽한 참나무 숲 아래 바위와 돌덩이들이 예사롭지 않게 널려 있습니다.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지만, 그 색깔이 고상한 품위가 있습니다. 모르는 열매이기에 더욱 호감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머리에 들어선지 54분 가량 되었지만, 걸어온 거리는 7~8백m나 됐을까 싶습니다. 옆을 보니 제법 가파라지고 있습니다.

 

 

들머리를 들어섰을 때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데, 너덜겅들이 온 산을 덮듯이 쌓여 있습니다.

 

 

이런 돌탑들은 종교를 떠나 재미로 쌓은 분들도 있겠지만, 어떤 염원을 담아 쌓은 것이 통례라 하겠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전해본 적도 없는 짓을 했으니 말입니다. 수많은 탑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풍으로 자리보전하시는 올해 아흔이신 어머니의 쾌유를 간절히 바라며 정성으로 쌓았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우상이란 인간의 어떤 두려움이나 간구함이 생각밖으로 형상화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탑이란 쌓은 것이고 공들인 것이고 공들인 것은 정성이고 염원이며 기원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어디에도 내가 올라온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덩이들을 덤프트럭으로 실어다 쏟아 부은 것처럼 돌덩이들 뿐이고 흙이라고는 눈여겨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산에 나무는 잘도 무성합니다. 특히 참나무와 여러 수종이 대종을 이루고 소나무는 드물게 보입니다. 여기는 그래도 소나무가 여럿 무리를 이루고 있어 사진에 담았습니다.   

 

 

판석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암벽처럼 이 조령산 바위들의 석질이 각섬석편마암(角閃石片磨巖)입니다.

 

 

경사지게  편(片)을 이룬 바위는 오랜 세월 풍화로 점차 틈이 벌어지고 모래나 흙 등 이물이 끼이면서 떨어져나가 수많은 너덜겅이 되어 쓸려내리면서 쌓였을 것입니다.

 

 

바위가 떨어져 나간 면은 마치 성을 쌓은 것 같습니다.

 

 

이런 너덜겅이 깔린 곳은 디딜 곳을 안전한 돌을 골라 찾아 딛고 오르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힘든 줄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앞서 가는 분을 보니 곧장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오르고 있습니다. 턱이 높은 돌을 피해 딛고 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之자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오르다 옆을 보니 언제 무너져 내려 너덜겅이 될지 모를 갈라진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위태롭습니다.

 

 

반대 편을 쳐다보니 좌측보다는 덜 가파르고 잡초와 나무들이 있어 낙엽이 바위들의 표면을  덮어 바위가 없는 듯 보이지만, 낙엽을 걷어내면 편마암으로 이루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면을 쳐다보니 드디어 봉우리가 보입니다.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길이 나오겠지요.

 

 

드디어 산등성입니다. 신선봉이 15분이라는데 글쎄요.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들머리에서 여기까지 1시간32분이 소요되었습니다. (들머리 9시34분~산등성이 11시06분)

 

 

등성이를 바라보고 좌측 방향은 레포츠공원으로 가는 쪽입니다. 신선봉은 반대편이 되겠습니다.

 

 

신선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산등성이에는 바위들이 너덜겅을 출산 하려고 바야흐로 태동중입니다.

 

 

 

 

 

산등성을 타고 가니 동서남북이 확 트였습니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아름답게 펼쳐졌을 능선들과 산봉우리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갈라져 무너져 내리려는 바위를 나무가 그물처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칼날 같은 바위등성이에 낙엽이 양분되고 흙이되어 나무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네요.  

 

 

손바닥을 합친 것처럼 좁은 바위능선에 나무가 없었다면 드러난 바위 절벽에 질려 이 능선을 타고 갈 엄두도 나질 않았겠다 싶은 험한 곳입니다. 

 

 

요소요소마다 나무에 동아줄을 동여매 늘여놓아 오르기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손으로 잡고 기어오르는 바위 타는 재미에 푹 빠져볼 수 있는 즐거움이 쏠쏠 합니다.

 

 

요리조리 나무사이로 바위를 밟고 가는 길, 저 편에 파란초소가 보입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밧줄을 잡지 않아도 오를 수는 있지만, 바위가 조각조각 금이 나 있어 발을 딛고 올라서면 떨어져 나갈 수 있어 위험합니다. 

 

 

이쯤에 신선봉이 있는 모양입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안개만 자욱한 주변에 제법 높은 봉우리가 앞에 있으니까요.

 

 

봉우리 앞 편평한 지대에 멋진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오르도록 대체로 귀한 것이 소나무였기에 그 푸른 가지에서 싱그러운 생동감을 느낍니다.

 

 

<산불감시초소>

 

 

산불감시초소 옆 바위봉우리 아래 오석에 신선봉(967m)을 새겨놓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신선봉 정상입니다. 하나로 된 바위지대입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희미하게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그 자태를 보여줄 듯 말듯 주뼛거리고 있습니다.

 

 

<신선봉 정상>

이 신선봉의 옛 이름은 할미봉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원풍리 노인들께 신선봉을 가리키며 봉우리 이름을 물으면 어김없이 할미봉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부터 주민들이 불러왔던 할미봉이라는 이름은 사라져가고 신선봉이라는 이름이 지형도에 올라 주인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풍리 고사리 마을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 상에 이 산의 이름을 낳게 한 할머니를 닮은 할미바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마패봉에서 오른쪽으로는 부봉과 주흘산이 멀리 운달산과 함께 시아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고사리 마을 건너로 치마바위봉우리가 마주보이고, 그 뒤로 조령산, 희양산, 악후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눈에 들어오고, 악후봉 너머 멀리로 톱날 같은 속리산 연봉이 하늘을 찌르듯 멋지게 지그재그로 선을 이룬다는데, 안개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품에 감춘 채 내어줄 기미를 상실했나 봅니다.


 

주워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 할미(신선)봉 정상에서 북으로는 석문봉, 북바위산 너머로 송계 계곡과 월악산 정상이 용마봉, 덕주봉, 용암봉과 함께 드넓게 장관을 이루고 월악산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는 만수봉, 포암산, 하늘재, 월항삼봉, 마패봉이 가까이 보이고, 멀리로는 백두대간을 들어 올린 대미산과 소백산 연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고 합니다.

 

 

다시 마패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봉우리 정상이 험한 곳은 옆으로 우회를 하지만,  우회 길도 가파른 암벽이니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나무 밑동에 매어 놓은 동아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길 정도의 벼랑도 동아줄에 의해 내려오고,  바위산을 좋아 하는 저로서는 즐겁고 재밌는 산입니다.

 

 

마패봉을 향해 가는 길에 앞을 가로 막고 서있는 아담한 봉우리, 제법 가파르게 우뚝 솟아 나를 바라보고 슬며시 미소를 흘리고 있습니다.

 

 

능선은 무너져 내린 돌들이 널부러져 있는 길 아닌 길이 었습니다.

 

 

아담하지만, 가파르던 봉우리위에 올라서니 다시 좁은 능선으로 이어져 또 다른 봉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2~3m 높이의 작은 봉우리는 바위가 갈라져 일부 무너져 내린 암벽으로, 기어오를 수 있지만, 금이 가고 갈라져 돌을 쌓아놓은 듯해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어 동아줄을 잡고 오르거나 내려가도록 나무에 동여매어놓았습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인데도 불구하고 참나무 등 잡목이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은 바위가 갈라지는 성분때문에 수없이 갈라진 틈으로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루고 나뭇잎은 떨어져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모래와 함께 그 틈새를 채우며 비옥한 흙으로 변모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능선에 줄서 있는 아담한 봉우리들, 雲霧로 시야가 짧아 원거리의 웅장한 여러 산세와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어느정도 안개가 걷히니 아름다운 능선의 山勢가 그 위용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갈빛 풀들이 풍성한 이런 오솔길은 포근한 봄동산을 연상시킵니다. 서울의 옛 압구정동 나의 문중의 宗中山이던 앞동산이나 서울 약수동 수도국산을 거니는 기분에 마음이 들뜹니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산이 흔한 우리나라 산에서 드물게 잡목과 돌로 이루어진 조령산의 한 자락인 신선봉에서 마패봉(또는 마역봉)으로 가는 능선에 띄엄띄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 있어 반갑기 조차합니다. 


  

 

조령산림욕장에서 너덜겅을 지나 신선봉을 거쳐 여기까지 오도록 내내 돌길이었지만, 질리지 않은 것은 오밀조밀하고 이렇듯 변화 많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선봉에서 마역봉(마패봉) 사이 중간지점인 것 같습니다. 시간상으로 각각 30분이 소요 된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앞으로 갈 길의 난이도가 신선봉에서 이곳까지 온 정도의 길이라면 그 시간에 난이도가 험하면 거리는 짧을 것이고, 거리가 길면 길은 원만하겠지요, 저는 전자를 바랍(願)니다.

 

 

앞으로 가는 길은 치고 오르고 치고 내려가는 큰 봉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 이어진 자잔한 봉우리의 연속인 만큼 힘들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산책길은 양 쪽이 가파르고 좁은 길이지만, 나무가 많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위험을 느끼기 보다는 즐거움을 주는 산길입니다.

 

 

평평한 산길을 가다보면 발이 쉽게 피로해 지는데, 이렇게 울퉁불퉁 솟아난 돌 위를 섬돌마냥 딛고 가면 발의 피로도 눈 녹듯 사라지고 경쾌한 걸음이 됩니다.  

 

 

수많은 활엽수 잎들이 바위틈을 매우고 쌓여 이렇게 보드라운 흙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잡목은 더욱 우거진 숲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작은 봉우리 등마루는 이렇게 큰 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위봉우리가 이곳 특유의 석질로 인해 갈라져 세분되어 큰 덩어리로 나뉘어 있는 현상입니다.

 

 

이 자리 어디쯤 누가 보아도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는 할미바위, 등허리에 손자를 업고 남쪽 원풍리 방면을 내려다 보는 자연석 할미바위는 단정하게 빗어내린 머리와 인자하게 생긴 얼굴모습, 저고리와 치마 등이 마치 일부러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여 무릎을 치게 한다는 그 할미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오는 동안 안개로 인해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설마 이 바위는 아니겠지요.  

 

 

어느 정도 안개가 걷히니 북으로는 석문봉, 북바위산 너머로 송계 계곡과 월악산 정상이 용마봉, 덕주봉, 용암봉과 함께 드넓게 장관을 이루고  조령산, 희양산, 악후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악후봉 너머 멀리로 톱날 같은 속리산 연봉이 하늘을 찌르듯 멋지게 지그재그로 하늘에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위로 된 작은 봉우리마다 바위가 떨어져 나간 면이 절벽이거나 가파른 길이어서 어김없이 동아줄을 나무에 동여매어놓아 안전산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가파른 바위를 어렵게 타고 오르니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쑥하게 생긴 뒷면에 어이가 없습니다.

 

 

신선봉을 할미봉이라고 할 정도로 이름난 할미바위를 보려고 앞으로 가면서 아무리 둘러봐도 그 비슷한 바위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 바위도 생김새와 형상으로 미루어보아 할미바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패봉이 있는 방향 오른쪽으로 쳐다본 봉우리들입니다. 부봉과 주흘산이 멀리 운달산과 함께 시아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두상처럼 생긴 바위>

 

 

철지난 외로운 들꽃 한 송이 내게는 기쁨과 생기를 주지만, 곧 불어 올 삭풍과 눈보라를 어찌 견딜까 싶으니 애처롭고 그 가련함에 잠시 안쓰러움에 잠깁니다. 

 

 

경사각80도는 됨직한 바위절벽에 예외없이 밧줄이 설치되어 있어 고마움을 가집니다.

 

 

밧줄을 잡지 않고 릿지로 내려와 다시 올려다본 모습입니다. 높이는 대략 6~7m 높이입니다.

 

 

다시 마패봉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길은 한결같이 같은 모습이 아닌 새로움을 느끼게하여 발길이 즐겁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앞에는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연이어져 보입니다.

 

 

재단한 판석을 새워 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위는 오래 세월에 그 틈 더욱 벌어지고 모래와 낙엽이 그 사이를 메워주고 나무와 풀이 자라 숲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생김새로는 구들장으로 제격이겠습니다.

 

 

나무에 기대어 세워놓은 것같습니다.

 

 

오래되었지만 나에게는 날설지 않은 푯말이 향수에 젖게 합니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생긴 내무부는 1948년11월4일부터 1998년2월28일까지 50년동안 정부부처 서열 제2위로 존속되어왔던 명칭입니다.

『내무부』지금의 '안전행정부'라고해야 하나 아무튼 내무부는 조선시대 이조(吏曹)에 해당하는 1940~ 90년대에 걸쳐 존치했던 정부기관명칭인데 당시 세운 것으로 보이며, 前面에는 '국립공원' 뒷면에는 '내무부'라고 음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래된 국립공원 표지말뚝>

 

 

 때로는 늑대의 드러낸 날카로운 이빨처럼 생긴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는 재미에 세상살이 시름도 잊습니다.

 

 

裁斷한 板石을 올려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운모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는 고대 하늘에 올리는 祭壇을 보는 듯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변형된 지석묘 같기도 하고, 신선이 노니는 墩臺石같기도 하고, 古代 天葬을 지내던 壇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산행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바윗돌입니다.

 

 

이 바위에 매료되어 한참을 서성이다 인증 샷을 구했습니다.

 

 

광나루 인근 아차산의 바위들이 이렇게 판석으로 이루어졌다면 고구려군사들이 보루성안에 놓은 온돌방을 수월하게 지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군사들이 쌓은 보루성의 온돌방을 지을 때 구들장을 화강암을 쪼개서 만들어 두께가 두껍고 고르지 않고 면적도 좁아 구들 고래가 좁은 것을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을 가로막고 선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봉우리에 어김없이 밧줄이 걸쳐 있습니다.

 

 

 밧줄을 잡고 봉우리를 오르니 이정표가 반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도록 없던 이정표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마치 심 봉사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느낌입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모르는 답답함이 한 순간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계속 앞으로 가면 부봉삼거리를 거쳐 하늘재에 이르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오늘 나의 산행 종착지인 조령제3관문에 이릅니다.

 

 

 조령제3관문으로 가는 길목인 우측을 보니, 누군가 바위 위에 세워 놓은 돌이 보입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조령관문으로 가기위해 지나다 쳐다보니 마패봉 정상에 세운 표석이었습니다.

 

 

부봉삼거리로 가는 길입니다. 나무사이로 돌탑이 보이기에 걸음을 옮겨 가봤습니다.

 

 

할석으로 쌓은 탑과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기 좋게 편평한 돌을 둥글게 놓았습니다.

 

 

<920m 마패봉>

 

 

에코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앙증스럽게 세운 정상표석을 뒤로 하고 조령제3관문으로 하산하여 산행을 시작한 조령자연휴양림으로 회향합니다.

 

 

충북 충주시와 경북 문경시 경계인 하늘재 방면에서 西進하며 월항삼봉을 거쳐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은 마패봉에서 남쪽 조령 제3관문으로 방향을 꺾어 南進하며 조령산으로 이어집니다. 마폐봉(910m)에서 백두대간을 이탈하여 서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있습니다.
충주시 상모면과 괴산군 연풍면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뻗는 이 능선이 약 1.5km 거리에 이르러 삼각형 바위봉을 들어올려 놓은 산이 해발 967m인 신선봉입니다.
산세가 아름답고 암봉으로 이루어져 산행의 흥미를 더합니다. 인근의 조령산이나 월악산 명성에 가려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신선한 매력과  태고의 신비를 느길 수 있는 산입니다.


 

갈색의 포근한 낙엽 위에 짙은 녹색의 알 수 없는 벌레의 고치가 이채롭습니다.

 

 

하산 하는 길에 다시 이렇게 오르는 암벽이 있군요. 높지는 않지만 두서너 길은 됨직한 암벽에 밧줄을 느려놓은 곳이 제법 많습니다. 여기서 '길'은 길이의 옛 단위로 1길은 2.4~3m, 또는 한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를 말합니다.  

 

 

하산 길에 솟아 있는 바위가 있어 할미바위인가 싶어 자세히 보았습니다만, 역시 아니군요.

 

 

바위 옆 밧줄을 타고 내려온 곳입니다.

 

 

곳은, 이제까지의  운모편마암지대와는 달리 화강암에 속해서 제법 바위의 행색이 살아 있습니다.

 

 

이곳 조령산의 바위는 모두 직선으로 쪼개놓은 듯이 절리 되어 있습니다.


 

애초 바위등성이를 이루고 있던 바위들이 갈라지고 쪼개져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바위 편들이 되어 솟아있습니다. 남은 이 바위들도 얼마 못가 무너져 내려 할석이 되겠습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봉우리가 아련해서 담은 사진입니다.

 

 

외곽성벽 밑 부분만 남아있는 성벽에서 보기 드물게 여장이 설치된 모습이 남아있는 모습을 봅니다.

  

 

대체로 성벽과 여장은 모두 무너지고 외곽성벽 밑 부분만 보입니다.

 

 

이제까지 그리 흔치 않던 소나무들이 군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령관 인근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무 사이로 넓은 공지가 보입니다. 아마도 제3관문 앞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3관문인 조령관 옆 성벽입니다. 이제 그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산행의 종착지가 보이는 듯합니다.

 

 

조령관 쪽으로 내려가는 산행길에 철골로 아취형 터널을 만들어 놓은 곳에 수많은 산악회 리본이 만장처럼 부는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습니다.  


 

산행이 끝나는 지점에서본 조령관 측면입니다.

 

 

<영남제3문/嶺南第三門>

제1, 제3 문과 더불어 사적 147호인 조곡관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25년(1592년)에 왜란이 일어난 후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朝鮮朝 肅宗 34년(1708년)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鷹岩)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中城을 삼아 관문을 鳥東門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영남제3관/嶺南第三關>

문경 쪽 입니다.

 

이 샘물이 흘러드는 능선 동쪽으로 흐르는 조령천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 였습니다.

 

 

조령산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한 명산으로 1,026m 높이에 전체적으로 대암벽지대에 산림이 울창하며 기암 · 괴봉이 노송과 어울러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마패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인 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암봉과 온전히 암벽지대입니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고 합니다. 조령관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하산했던 곳입니다.

 

 

문경 쪽 조령관 앞 광장 모습입니다.

 

 

지난 10월에 문경으로 해서 1관문과 2관문까지 둘러보고 담은 사진을 올렸는데, 그 때 둘러보지 못한 제3관문을 오늘 괴산 방향의 조령산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신선봉과 마패봉을 산행하고 아울러 조령관을 답사한 것입니다.

 

 

 

조령관 현판이 달린 괴산 방향에서본 제3관문.

 

 

<문경관문 / 聞慶關門> (문경읍 상초리)

이 鳥嶺關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城主 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要塞)입니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鷄立嶺이 중요한 곳이 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여 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습니다. 조선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이 때 당시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鳥東門)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습니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습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鳥谷關, 제3관문을 鳥嶺關이라 이름합니다.

  

 

'영남제3관문' 현판은 문경쪽에 걸려 있고, 충주 쪽으로는 '조령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은 괴산방향의 '조령관' 현판이 달린 앞 광장입니다. 

 

 

조령관 안팍으로는 백두대간 조령비 등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령(鳥嶺)은,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참(草站)"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站)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新)재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렀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로서의 역활도 담당하였습니다.    

  

 

 

<화살나무와 그 열매>

 

 

조령관 앞 공원 일부


 

<鳥嶺關 / 영남제3관문>

 

 

조령산자연휴양관으로 회귀하는 길입니다.

 

 

조령관 인근


 

 

 

쓰임은 알 수 없으나 祭壇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상석 앞에 좀 길지만 향로대처럼 대석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파란 絹에 수놓은 듯 나뭇가지의 구성이 아름답습니다.

 

 

 <고사리마을길 옆 암행어사비 옆 소나무 >

 

 

하산하여 수옥정 인근 국민관광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조령산 연봉들의 모습입니다.  

 

 

<산수유 열매>

 

 

  2013년 11월 15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