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충청수영성 / 忠淸水營城 (보령/保寧)

鄕香 2013. 11. 17. 10:45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사적제501호) 忠南 保寧郡 鼇川面 蘇城里 所在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수영'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해안사령부로서,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다가 1896년 廢營되었습니다. 이 충청수영성은 1510년 수사 李長生이 돌로 쌓은 城으로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虹霓)모양의 西門을 비롯하여 1,650m의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은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U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시대 水軍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충청수영청圖에 의하면 성내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중 永保亭은 천하 명승으로 알려져 조선시대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는 남해 바다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칠천량 해전(1597년)에서는 충청수사 崔湖가 통제사 원균과 연합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병자호란(1636년)때는 水使 姜晉昕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다른 水營城 유적은 훼손되어 원래의 경관을 잃어버렸지만 이곳 충청수영성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보겠습니다. ( 一部案內揭示板  拔萃) 

 

 

 

 

<서문/西門>

무지개 모양으로 조성한 서문은 골격만 남았지만 성벽과 고목들과 아울러 절묘한 운치가 있습니다. 서문의 이름은 용금문(湧金門)이라고 합니다.   

 

 

고소십경(姑蘇十景)의 하나로「 湧金望月(용금망월) 즉 용금(西門)문의 보름달.」이라고 했듯이 이 서문의 극치는 예스런 홍예문에 보름달이 걸렸을 때의  풍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름달을 그려 넣어 봤습니다. 

 

 

 

없는 보름달을 그려 넣고 보니 한층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습니다.


 

서쪽 성벽의 모습으로 성벽안 나무사이로 진휼청(賑恤廳) 팔작지붕이 보입니다.

  

 

서문주변을 측면으로 본 모습으로 앞 건물이 진휼청입니다. 

 

 

서문 안에서 바라본 서문(湧金門) 새로 보이는 집이 이곳 소성리에서 유명한 칼국수집입니다. 점심 전이시라면 들려보세요. 味와 量에서 모두 드실만할 거예요.

   

 

서문에서 남쪽으로 성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충청수영 진휼청 / 忠淸水營 賑恤廳> (충남  문화재자료 제412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을 비롯해서 客舍와 三門만이 남아 있습니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에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 온돌방, 툇마루, 부엌 등이 있습니다. 충청수영 古地圖 등에 나타난 건물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본 진휼청.

양 끝으로 온돌방 두 개에 부엌 하나 그리고 툇마루가 있는 구조입니다. 

 

 

진휼청 서북방향 성벽 위 나무들의 모습이 멋스럽고 그 자태가 어느 여인 못지않게 요염합니다.

 

 

성벽을 끼고 동쪽으로 가다가 돌아본 진휼청 측면과 뒷모습입니다. 단아하고 정갈스럽게 잘 관리되어 있습니다.

 

 

'회이포(回伊浦)'라는 이름의 港口로 이용되었던 오천항의 오늘에 모습입니다.

 

 

서쪽 성벽의 모습입니다.

 

 

진휼청 뒤 성벽위에서 본 오천항시가지 모습입니다.

 

 

진휼청 옆 성벽에서 바라본 오천항은 정박한 통통배들이 긴 하품 토하며 午睡를 즐기니 마치 아늑한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합니다. 그 옛날 군선의 위세 하늘을 찌르고 수병들의 기개 충천할 때 황포 돛 올린 범선 온갖 물류 풍요롭던 아름다운 포구였을 것입니다. 

 

 

 

동서쪽 성벽위에서 바라본 서쪽 성벽과 진휼청.

水營 안에는 운주헌(運籌軒), 능허각(凌虛閣), 영보정(永保亭), 공금당(拱襟堂), 해죽당(海竹堂), 관덕루(觀德樓), 등 수십 동의 營舍가 있었으나 1901년 보령군수 권성수(權聖洙)가 軍部 訓令에 따라 군인과 장정 수천 명을 인솔하여 수영공해(水營公解 수영과 관청건물)를 철거하였다고 합니다.

 

 

오천항 내륙쪽입니다.

 

 

동쪽 성벽입니다. 성벽 안 둔덕진 곳에 영보정터(永保亭址) 가 있습니다.

 

 

<영보정/永保亭>

영보정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李良)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정자로는 손꼽히는 절경의 정자였습니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시대 많은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던 곳으로 많은 시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였습니다. 水營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덩그러니 남아 쓸쓸함을 자아냅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圖가 있습니다.

 

 

<영보정 터>

 

 

영보정 터에서 내려다 본 진휼청(賑恤廳)

 

 

진휼청과 영보정 중간 지대

 

 

<비석군/碑石群>

내삼문 앞에 조성된 유헌 추모비와 비석들. 이 비석들은 대다수가 이곳 수령을 지낸 이에 대한 공적비이거나 선정비들입니다.

 

 

<충청수영 내삼문/ 忠淸水營 內三門 >

이 三門은 원래 수군절제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拱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으로 三門 뒤의 客舍(將校廳)와는 별도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객사와 함께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이곳으로 함께 옮겨 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 마치 장교청의 부속 건물로 보이고 있습니다. 현판은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글씨입니다.

 

 

<충청수영 장교청/忠淸水營 將校廳 (客舍)>

이 건물은 오천초등학교(현 위치 북서쪽80m지점)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입니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禮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運籌軒)이라고 합니다.  

 

 

유난히 이곳에만 붉은 단풍이 흐드러지게 물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소성리(蘇城里)는 일제강점 말기에 7,830坪의 매립공사를 시작, 해방 후에 완공을 보아 취락을 조성하고, 어항으로 개발되어 서해안 시대를 맞아 크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예부터 오천에는 아름다운 경치로 고소십경(姑蘇十景)이 전해 옵니다.

 

" 安眠雲松(안면운송) / 안면도의 구름 같은 소나무 숲"

" 火+吳烟雨竹(오연우죽) / 외연도의 빗살같은 대나무 숲" 

" 烏峀朝霞(오수조하) / 오서산의 아침 노을"

" 鼇島晩帆(오도만범) / 자라섬의 저녁 돛대"

" 湧金望月(용금망월) / 용금(西門)문의 보름달"

" 海門狐峰(해문호봉) / 바다목의 여우봉"

" 寒山夕鍾(한산석종) / 한신사의 저녁 종"

" 凌虛候朝(능허후조) / 능허각의 조수물"

" 沿港樓船(연항누선) / 황구에 연이은 높은 배"

" 姑蘇漁火(고소어화) / 고소대의 고깃배 불빛."    (소성리 유래 후비에서,)

※ 오연우죽에서 '오'는 불 화(火) 변에 오나라 오(吳)자를 합한 (오 = 火吳) 字임.

 

 

이 마을(蘇城里)은 수심 깊은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천연적인 요새지로 백제 때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신라를 거쳐 고려朝에 이르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軍船을 두어 지키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官廳 忠淸水營을 설치하여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을 다스리던 고장입니다. '충청수영'은 태조5년(1396년)에 고만(高巒 현 주교면 송학리)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營)을 설치하였다가 그후 이곳 회이포(回伊浦)에 옮겨졌으며, 세종3년(1421년)에는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 다시 세조12년(1466년)에는 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道使)로 昇格하였고 1509년에는 城을 축조하였는데 城 둘레의 길이13,174尺(實測1,650m), 높이 11척, 우물 4井, 못이 하나, 옹성(瓮城) 다섯, 그리고 성문(城門)이 다섯이었습니다.

 

 

수영청을 관통하는 국도 건너에 있는 장교청이 한 성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떨어져 있는 듯 이질감을 줍니다. 장교청 뒤로는 교회가 있고 장교청 뒤로 보이는 수영성벽이 산등성이로 이어져 있음이 확인됩니다.  

 

 

<유격장군 계공 청덕비 / 遊擊將軍 季公 淸德碑>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 水軍將首 계금(季金)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전쟁 중이던 1598년 4월에 세웠진 비석입니다. 유각장군 계금은 명나라 절강성 출신의 水軍長으로 왜란 당시 8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한 뒤 전라도로 이동하여 왜군을 토벌하였습니다. 비문은 당시 유각장군의 德을 칭송하고 왜적을 빨리 무찌르기를 기원하였으며, 장군의 승전과 안녕을 기도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이 충청수영에서 왜군을 일망타진하여 수영에 미친 영향과 당시의 民俗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계금장군의 비문은 영보정터 아래 소성초등학교 건물 뒤 수영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문(虹霓門)입구와 성벽 주변의 모습입니다.

충청수영의 관할구역은 금강하구에서부터 평택에 이르는 해안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기록에 따르면 이곳(현 오천항)에 本營을 두고 軍船142척, 水軍8,416으로 연안경비와 漕運船 보호 관리를 담당하였습니다. 본영에는 군선40척, 船軍1,766명. 船直114명이 있었으며, 최고사령관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正三品), 부사령관은 우후(虞候 正四品)였습니다. 城內에 있던 건물은 동헌(東軒)5칸, 아사(衙舍)15칸, 영보정(永保亭)24칸 등 33동 312칸에 달했습니다. 오백여년 간 서해안 방어의 중심지였던 충청수영은 1896년 탁지부훈령(度支部訓令)으로 폐영(廢營)되어 모든 장비는 軍部로 移屬되고 재물은 탁지부에 이관되었습니다. 1901년 3월6일에는 군부훈령(軍部訓令)에 의하여 수영건물을 불태워 장교청(將校廳) 등 11개 건물만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1년 4월18일에는 보령군, 흥주군, 결성군, 서산군 일부와 서해도서를 합하여 오천군을 신설하고 천동면 천동리(川東里 現 오천면 소성리) 舊장교청에 사무실을 정하였습니다. 1914년 부군폐합령(府郡廢合令)에 의하여 오천군을 폐지하고 천동면 지역과 도서지역을 합하여 오천면으로 하였고 면소재지는 소성리로 하였습니다. 현재는 성지(城址)와 서문(虹霓門), 진휼청(鎭恤廳)이 남아 있고 장교청(將校廳)과 삼문(三門)하나가 자리를 옮겨 보존되어 있어 옛 역사의 애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쪽 성벽이 보이는 포구 옆 시가지 모습입니다.

 

 

오천항은 옛 회이포(回伊浦)로 자라모양의 쌍오도(雙鰲島)가 갯고랑에 있다하여 오천(鰲川)이라는 地名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오천항 해산물 횟집들이 줄지어 있는 포구 인근입니다. 갑오징어가 제철인지 아주머니들이 많은 갑오징어의 뼈를 발라내고 있습니다. 갑오징어 뼈는 지혈제로 효능이 탁월하고 위장병에도 좋습니다. 서울 경동한약재시장에 가면 팔고 있는데, 하나 달라고 하니 그냥 버리는 것이니 다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작은 상처에 오징어 뼈를 곱게 갈아 그 분말을 상처에 뿌리면 대번에 피가 멈추는 훌륭한 지혈 효과가 있습니다. 지혈제로 쓰기 위해 세 개만 가져온 것입니다.

 

  

 

이곳 충청수영 관광을 하시는 분들은 수영 남문 앞의 "오양칼국수"집에 들려보세요. 보리밥과 비빕국수, 바지락국수 삼합 7천원인데 맛과 量에서 모두 만족하니 참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작은 어촌인데도 문전성시를 이루어 줄을 서 기다리고서야 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보리밥을 먹고 난 후 나온 비빔국수는 모양도 예쁘게 나왔는데 비벼서 먹다가 참 맛있다는 생각에 먹던 것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가운데에서 상차람을 받은 자매님들도 보아하니 타지에서 오신 분들이신가 본데,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남문(湧金虹霓門)입구와 성벽주변은 보수 및 도로정비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13일 보령군 오천면 소성리에서, <香村仁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