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옛 미음나루터와 수석리토성

鄕香 2013. 5. 15. 23:25

<미음나루>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외미음에 있는 옛 나루터로, 남양주시(양주군)와 하남시 미사리(광주군)를 이어주는 한강나루입니다. 미음나루는 한강의 나루터 중 광나루에 버금가는 곳으로 지금도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콘크리트 둑을 쌓아놓은 상태입니다.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미음진의 주위 동쪽 70리에 있어 광주로 통한다."고 나와 있는데, 미음진은 평구역(삼패동에 있던 역)에서 광주를 잇는 나루터의 하나로 남북 교통로의 요지였습니다.

조선시대 하남 일대 한강변 곳곳에는 나루가 있었는데 군량미나 둔전세를 하역하여 남한산성으로 운반하던 포구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도미진(渡迷津)은 흔히 '두미나루' · '두미진'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의 배알미동 팔당댐 부근으로 사평소로와 평해대로를 이어 주었습니다. 도미진 하류에 미호진(渼湖津)이 있었는데 흔히 미음나루, 둔지나루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또한 미음나루는 석실사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주위에는 김창협(金昌協1651/효종2년~1708/숙종34년)이 살았다는 삼주삼산각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강을 타고 내려오는 배들이 미음나루에서 석실서원에 필요한 물건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주변은 겸재 정선이 '삼주삼산각'이나 '석실서원'을 그린 것처럼 주위에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며, 특히 석실서원 앞에 있는 한강을 미호(渼湖)라고 하여 한강이 마치 호수같이 보인다고 하여 아름다움을 극찬하였으며, 강 건너 광주 분원리에 있는 왕실용 백자를 굽던 분원(官窯)에서 왕실용 백자를 만들 때는 도화원 화원들이 분원으로 와서 왕실용으로 생산되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 중에는 이곳 수석리의 풍경을 그린 청화백자가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용 자기를 제조할 때 사옹원(司饔院) 소속 관리가 매년 도화서(圖畵暑)의 화원(畵圓)을 인솔하고 광주 관요(官窯)에 나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습니다.>

 

 

이 자리(미음나루)는 지금의 남양주시와 하남시를 건너던 한강나루 중의 하나였습니다. 인근 야산에 축조된 수석리 토성과 함께 삼국시대에 한강변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 였으며, 조선시대 안동 김씨 석실서원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미음나루의 '미음'이라는 이름도 안동 김씨 후손의 號를 따서 붙여졌습니다. 주위에는 김창협(金昌協1651/효종2년~1708/숙종34년)선생이 살았다는 '삼주삼산각'이 있고, 여기를 통과하여 야산을 가로 지르면 석실서원지(石室書院址)가 나옵니다. 

예부터 한강을 오가는 배들의 중간 쉼터이자 남북 교통로의 요지로써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주막들이 번성했던 자리로서 지금은 분위기 있는 카페와 음식점, 레저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강변의 풍경과 한강의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미음나루 위치에서 본 이 언덕받이 자전거도로를 넘어가면 수석리 토성과 조말생 묘를 거쳐 덕소로 가는 자전거전용도로입니다.

 

 

 

<水石里 土城>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의 이 토성은 한강을 건너는 나루를 지키기에 알맞도록 한강 북쪽 산봉우리 위에 築造된 백제시대의 유적입니다. 해발 100m쯤의 丘陵위에 타원형을 이룬 작은 규모의 土壘(흙으로 조성한 진지)는 둘레가 145m에 불과하지만, 성벽은 지금도 바깥쪽 높이가 7~8m나 되어 우리나라 초기에 쌓여진 성터(城址)들과 일반적 형태가 같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 구릉지대에는 비슷한 양식의 성터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백제초기의 중심적 취락(聚落)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성벽은 백제의 성터에서 흔히 보는 판축(版築)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듯하며 성의 안팎에서는 삼국시대의 그릇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삼국이 빼앗고 빼앗기는 각축전이 이루어진 곳 중의 한 곳이라 하겠습니다. 이 성터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빼앗긴 다음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사용했을 듯하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 폐기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터와 조선초기 재상 조말생 묘로 가는 산길입니다.

이 지대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백제가 서울을 공주로 옮긴 이래 관방(關防)이나 진보(鎭堡)로 삼아 군사를 주둔시켜 국방의 요새를 삼았던 곳입니다. 한강가에 자리잡고 남으로 남한산성을 의지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전략의 요충지였습니다.

 

 

수석리 토성을 가로질러 열린 길이자 자전거도로입니다.



수석리토성 옆 강변 쉼터에는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하고 있어  여름철에 이곳 옛 마을사람들이 무더위로 흐르는 땀을 삭힐 수 있는 곳이었겠지요.

  

 

 

조말생신도비를 답사하고 다시 미음나루 앞을 지나 수석동의 각종 음식점과 카페가 있는 마을을 지나 구리시민한강공원의 유채꽃밭으로 힘차게 패달을...

 

 

2013년 5월14일 수석동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