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북로 자전거도로를 타고 구리시한강시민공원 유채꽃밭을 지나 왕숙천 초입에서 다리를 건너 강변자전거도로를 이용해 덕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남양주시 수석동의 각종 음식점(주로 한강 조망을 이용한 멋진 한정식집)을 거쳐 옛 한강의 3대 나루로 이름난 '미음나루'가 나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른 고갯마루 좌측에 조말생 묘 안내 푯말이 있고 다시 좌측 야산 길(수석리토성)을 50m정도 오르면 아래 사진의 이정표가 보이며 백제시대에 축성된 수석리토성과 인접한 곳에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의 묘가 있습니다.
<문강공 조말생 기적비명/文剛公趙末生紀蹟碑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2-1
<문강공 조말생 신도비>
신도비문에 의하면 1410년 기주관으로서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전농시부정장령, 예문관직제학,판성공감사,승정원동부대언,지신사 등을 역임하였고, 태종18년(1418)이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정대부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에 올라 태종을 측근에서 보좌하였습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해적이 변방을 침범하는 일이 빈번하자 세종임금께 진언하여 장군 이종무로 하여금 해적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징벌케 하였습니다. 세종15년(1433) 여진족이 침범하자 함길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으로 이를 막아 싸웠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순찰사로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축성을 감독했고, 1439년 궤장(机杖)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剛)으로 글씨가 뛰어났으며 임금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직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前面部
前 左側面部
後 右側面部
이 신도비는 숙종 33년(1707년) 금곡 옛 묘소 앞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1938년 5월 현위치(남양주 수석동산2-1)로 옮겨 세웠습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정교하게 조각한 옥개(屋蓋)와 고개를 왼편으로 틀고 있는 용머리를 한 거북형상의 비대석을 갖추었습니다.
귀부(龜部)의 규모는 길이 350.3cm, 폭 272.7cm,로 장대(莊大)한 모습입니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303.6cm, 폭91cm, 두께30cm,입니다. <이 신도비는 묘 아래 좌측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말생 (趙末生,1370~1447)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文臣)입니다. 자(字)는 근초(謹初)·평중(平仲), 아호(雅號)는 사곡(社谷)·화산(華山). 이름(瑋)은 말생(末生)이며, 본관은 양주(楊州)입니다. 고려 말 판원사(判院事) 趙岺의 증손으로 趙誼 (書雲觀正)의 아들로 生員에 든 후 1401년 태종1년에 중광시를 장원하고 정언·감찰·헌납, 이조정랑 등을 지냈고, 140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종7년(1407년)에 文科重試를 2等에 入第한 후 장령·예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대언 등이 되었습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던 인물입니다. 그는 태종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35년간 두 왕을 모시며 나랏일을 돌보았습니다. 특히 태종의 파벌이었던 조말생은 세종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의 사이를 조율하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실하게 지켜낸 현명하고도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으나, 뇌물수수로 재산을 축적했다가 그로인해 귀양을 가게 되는 모습에서는 조말생이 어질고 현명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교수형에 해당하는 그 죄 값을 요구하는 많은 신하들이 주청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다만 귀양을 가게끔 한 세종임금의 결정은 조말생이 나라와 조정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결국 조말생은 세종에 의해 다시 관직으로 불려나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승진하면서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점차 나이가 들고 몸이 허약해서 세종임금께 몇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세종은 조말생 만한 인물도 드물다는 이유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세종임금도 조말생의 정치적인 견해와 영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석 전문/碑石 前文>
(輔國崇祿大夫領中樞院事兼兵曹判書藝文館大提學諡文剛趙公末生之墓/貞敬夫人平山申氏祔右)
후손들이 금곡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 하면서 묘의 봉을 크게 조성한 것인지, 본래 금곡에 있던 크기로 조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크기가 웬만한 왕릉 크기에 버금갑니다. 어쨌든 간에 이런 점으로 보아 그 시대의 권문세가의 세도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모든 석상은 좌우로 세웠습니다.
이 동자석상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양형의 석상은 본디 있던 것이 아닌 근대에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인석은 당시 세운 것으로 보이나 보존상태가 너무 좋습니다.
이 망주석은 문양과 형식으로 보아 조선 초에 제작된 망주석입니다. 특히 망주석에 돋을새김으로 표현된 혼이 무덤에서 나외 외유할 때 타고 다닌다는 細虎의 형태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묘 앞의 전망이 확 트여 시원스럽습니다. 보이는 아파트단지는 덕소입니다. 그 뒤의 산들은 적갑산과 예봉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묘 앞 혼유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너무 커서 옛 비석의 고풍스런 맛과 품위를 위축시키고 초라하게 만들어 옛 모습을 살리지 못했으며 묘(墓)와 비(碑), 혼유석(魂遊石) 그리고 석물(石物) 등의 상호 크기의 비례가 부자연스러움을 주었습니다.
본래 묘소는 금곡동 묘적산 끝자락에 있었는데, 1900년 9월 그곳이 고종황제의 능으로 공표되자 이곳 (남양주 수석동산2-1)으로 이장 한 것입니다.
2013년 5월14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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