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烏竹軒>
오죽헌은 15세기 후반(1450-1500)에 강릉 儒賢 崔致雲(1390-1440)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이 둘째 사위 이시온에게 물려주었다. 이시온의 외동딸, 용인이씨는 서울의 신명화와 혼인하여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그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용인이씨는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머물러 있을 때 오죽헌에서 사임당을 낳았다. 또한 사임당도 서울의 이원수와 혼인을 하였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용인이씨)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비록 시집은 갔어도 친정부모를 보살피려는 '孝' 때문에 사임당과 율곡이 오죽헌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임당의 어머니(용인이씨)가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 현재의 오죽헌을 물려주었는데 '오죽헌'은 집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아 권처균이 자신의 號를 '烏竹軒'이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栗谷 李珥(1536-1584)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進士初試에 합격하고 明宗 19年(1564), 生員試, 式年文科에 모두 壯元及第한 후 황해도관찰사, 大司憲, 등과 吏曹, 刑曹, 兵曹의 判書를 역임하였다. 朝鮮 儒學界의 退溪 李滉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畿湖學派를 형성했고 黨爭의 調停, 10만 군대의 養兵을 주장하였으며 大同法, 社倉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文廟에 從祀되었고 宣祖의 廟庭에 配享되었으며, 파주의 紫雲書院, 강릉의 松潭書院 등 20여 곳의 서원에 祭享되고 있다.
<자첨문/自檐門>
이 문을 들어서면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마음과 몸가짐을 정갈해야 한다는 게시를 이 대문의 현판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문성사담장 옆 감나무.
<문성사 정문>
<오죽헌/烏竹軒>
烏竹軒은 강릉 儒賢 崔致雲(1390-1440)이 創建하여 살았으며, 그의 아들 崔應賢은 사위 李思溫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사위 申命和(사임당의 아버지)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權和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文誠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조선초기에 지어진 別堂建物인 (烏竹軒)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師表가 되는 師任堂 申氏가 태어나고 또한 그의 아들이자 大學者요 政治家로서 救國愛族의 先覺者인 栗谷 李珥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건물은 住居 건축으로는 드문 二翼工式을 취하고 있어 柱心包와 翼工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건물이다. 율곡선생은 우측 방 '夢龍室에서 태어났다.
<사임당 배롱나무>
배롱나무꽃은 강릉시의 시화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故死)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사임당과 율곡, 母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栗谷松), 율곡매(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문성사/文成祠>
栗谷 李珥의 影幀을 모신 祠堂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고 한다. '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께서 율곡에게 내린 諡號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政事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文成祠'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옥필이다.
<율곡소나무/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君子식물이다. 곧은 德과 굳쎈 節槪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天工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 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율곡 李珥의 소나무 예찬에서 -
오죽헌에서 안채로 가는 사잇문이다. 주변에는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다.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兵曹參判을 지낸 崔應賢에 의해 傳承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別堂)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
안주인이 생활하는 곳이다.
<부엌>
이 부뚜막에 걸린 3개의 무쇠 솥 중에서 작은 솥에는 주로 밥을 했고 가운데 걸린 솥에는 국을 끓이고 오른쪽 큰 솥에는 주로 날씨가 쌀쌀해지면 식구들의 세면이나 그 밖에 용수로 쓰기 위해 물을 끓이는데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반듯한 반갓집 부엌에서는 주로 장작을 사용하였지만 궁색하고 어려운 서민들을 주로 검불(검부나무) 즉 낙엽이나 마른 풀, 농작물 마른 줄기나 짚을 땔감으로 사용하였기에 검부나무를 쌓아 놓기 좋게 부엌 안 뒤를 넓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바깥채 측면>
<바깥채(사랑채)>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고 벗과 학문과 정담을 교우하던 사랑채이다. 이 바깥채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柱聯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어제각/御製閣>
어제각은 栗谷 李珥의 著書 '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께서는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현에 보관디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신 후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내셨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金載璨)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御製閣'이다.
<어제각/御製閣>
어제각 안 모습
<격몽요결/擊蒙要訣>
학문의 필요성, 부모의 도리, 자식의 도리, 신하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신의, 어른에 대한 공경, 일상의 마땅한 일 등의 지침서 입니다.
(擊蒙要訣 序文)
余定居海山之陽 有一二學徒 相從問學 余慙無以爲師 而且恐初學 不知向方 且無堅固之志而泛泛請益 則彼此無補 反貽人譏
故 略書一冊子 粗敍立心飭躬奉親接物之方 名曰擊蒙要訣 欲使學徒觀此 洗心立脚 當日下功 而余亦久患因循 欲以自警省焉
丁丑季冬 德水李珥 書
"내가 해주(海州) 남쪽에 살 곳을 정하자, 한두 명의 학생(學生)이 찾아 와서 묻고 배웠다. 나는 그들의 스승이 될만한 자질이 없음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처음 배우는 학생이 공부하는 방법과 방향을 알지 못하고, 또 학문에 대한 굳은 뜻이 없이 대충 배우고서 더 가르쳐 주기를 청하면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이 서로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비난을 살까 두려웠다.
그래서 간략하게 책 한 권을 써서 뜻을 세우고 행실(行實)을 삼가며 어버이를 받들고 남을 대하는 방법 등을 대략 서술하고 책 이름을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 하였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이 책을 보고 마음을 씻고 새롭게 출발하여 바로 그날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 나 또한 오랫동안 구태의연(舊態依然)하게 생활해 온 것을 근심했는데, 이로써 스스로 경계하고 반영하고자 한다."
선조(宣祖) 정축년(丁丑年, 서기 1577년) 12월 덕수(德水) 사람 이이(李珥)는 쓰다.
<벼루/硯>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벼루 밑바닥에 새긴 정조대왕 친필탁본
<오죽헌 문 (右側 門)>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임당 신씨(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經文을 익히고 文章, 針工, 刺繡 뿐만 아니라 詩文과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女流 藝術家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賢母良妻의 귀감이 되고 있다.
어찌하여, 머리를 숙인 모습으로 조형했을까.. 보는 이로 하여금 좀 더 자애롭고 편함을 느끼면서도 조신함을 지닐 수 있는 자세를 잃지 않을 범접할 수 없는 귀품을 느낄 수 있도록 얼굴을 조형할 수는 없었을까..
<제주용담>
제주용담에 대해서 아는 게 없네.
<석불여래입상/石佛如來立像>
고려시대 석불입상으로 높이는 1.8m 가량이며 신체와 불상의 받침대인 臺座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민가에 있던 것을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 떨어져 있던 머리의 윗부분은 손상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사각형의 납작한 얼굴에 두 눈은 수평으로 길고, 코는 마모가 심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두 발은 불상의 몸과 함께 조각하지 않고, 받침대인 대좌에 붙여 조각되어 있다. 굴곡 없는 통 모양의 신체 표현이라든지 사각형에 가까운 토속적인 얼굴, 발을 신체와 함께 조각하지 않고 따로 대좌 위에 조각하여 하반신의 발목과 연결하게 한 점은 고려시대 石造刻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불상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光背가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마모도 심하지만,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불상이다.
<장독대>
옛 시절의 추억과 정이 곱다시 묻어나는 장독대, 겨울 이른 아침 눈을 뜨고 나오면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동그라미가 된 그 위에 손바닥도 찍고 순이 얼굴도 그리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면 눈이 부셔 얼굴을 찡긋 하기도 했지... 옛날 장맛으로 그 집 찬 맛을 알 수 있듯이 장맛은 곳 모든 반찬의 맛의 근원이고 조화 속이었지만, 지금은... 그 장 담그는 살가운 정 묻어난 손 찾아보기 어렵네.
<너와정자/橡板瓦亭>
너와지붕이 맘에 꼭 들어 사진을 찍으려니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관광 나온 자매님이신가 일어설 줄 모르시네, 추측컨대 연로하신 저 어머니 이 넓은 오죽헌 구경에 허리와 다리 오죽이나 아프셨을까 싶어 그냥 찍었다오. 그래도 고마운 것은, 모델료 내라고 하시지 않으니, 그저 고맙습니다.
오죽헌과 시립박물관이 이웃해 있는 광장
2012년10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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