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洛山寺)는 신라 화엄종의 宗祖인 의상대사(625~702)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동해에 면한 명산인 오봉산에 문무왕11년(671)에 창건한 사찰로 '낙산사'라는 사찰명은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진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사찰로 인정되어 2009년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으며, 홍련암 및 의상대 주변 해안 일대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2007년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와 전쟁 등으로 파괴와 중건이 계속되었는데 신라 현안왕2년(858) 범일국사의 중창 이후 몽골군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파괴된 것을 그때마다 재건하였다. 특히 2005년 4월5일 양양지방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인해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과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2005년부터 2006년 발굴조사를 통해 원통보전 일대에서 6차에 걸친 증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조선 정조시대를 복원시기로 잡았으며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불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진신 사리를 봉안한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보물 제1723호), 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담장(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의상대(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 홍련암(강원도유형문화재자료 제36호) 등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동해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해수관세음보살상, 7관음과 1500관음을 모신 보타전, 의상기념관 등 많은 성보문화재가 있다. 2005년 화재 이후 국민들과 불자들의 정성을 모아 천년 고찰 낙산사를 금곡 정념스님과 사부대중 원력으로 중창 복원하였다.
<홍예문(虹霓門)>
세조13년(1467)에 세조 임금께서 직접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의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의 고을은 모두 26개였으며 고을에서 한 개씩의 석재를 추렴하여 건립한 것으로, 2단의 지대석 위에 각각 2개의 장대석으로 13개씩 2열로 쌓았다. 홍예문 위의 누각은 1963년에 세운 것으로 2005년 양양 산불로 소실된 것을 2007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주변의 석축은 강돌로 보수한 것을 양양 산불 이후 산돌로 교체하였다.
<낙산사 배 유래비(洛山寺 梨 由來碑)>
낙산 배는 조선 성종(朝鮮 第9代 成宗 1469-1494) 때에 主要 果樹로 指定된 在來種 黃實梨 品種이 낙산사 주변에 재배되어 上品은 나라에 進上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 植裁된 長十郞은 1893년 일본에서 개량되어 1915년 주지스님에 의해 道內최초로 경내에 재배되어 83년간 낙산 배 名聲을 지켜온 始祖木이다. 연구모임회를 중심으로 낙산 배를 세계적 명품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수출작목으로 육성하고자 뜻을 함께하고 이에 이 유래비를 건립 한다. 1997년 11월8일 襄陽郡守
홍예문을 지나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
사천왕문으로 오르는 길가 축대에 삐죽 돋아있는 귀여운 문양이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을 지키면서 사부대중을 돕고 보호하는 역활을 하고 있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3칸 규모의 내부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 지국천왕, 장검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용을 잡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 보탑과 창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1914년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을 개금이 이루어졌었고, 1988년에 보수하였으며, 2010년 다시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을 개금 하였다. 1950년 6.25전쟁과 2005년 양양 산불의 재난 속에서도 이 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국천왕/持國天王>
동쪽 하늘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건달바를 권속으로 삼으며,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증장천왕/增長天王>
남쪽 하늘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구반다를 권속으로 삼으며, 노한 표정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광목천왕/廣目天王>
서쪽 하늘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용왕을 권속으로 삼으며, 오른손은 용을 움켜 쥐고 왼손은 여의주를 쥐고 있다.
<다문천왕/多聞天王>
북쪽 하늘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야차를 권속으로 삼으며, 항상 손에 보탑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범종루/泛鐘樓>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어 고향실 옆 종각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용해되어 2006년 10월에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께서 낙산사에 행차함으로써 중창이 시작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睿宗)의 명으로 주조되었다. 鐘銘에 제작연원과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크기는 전체높이 158cm, 입지름 98cm이다. 종 꼭대기 장식인 용뉴(龍鈕)에는 쌍용이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다리로 천판(天板)을 밟고 있는 모습이 용맹스럽게 묘사되었다. 종신(鐘身)가운데 3줄의 橫帶를 둘러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연꽃잎 무늬의 띠(蓮瓣文帶)를 두르고 보살입상 4구와 범자(梵字)가 陽刻되었다. 종신 아래쪽에는 장문의 명문을 양각하고 그 아래에 파도무늬(波濤文)의 띠를 둘렀다.
(右側)
<빈일루/賓日樓>
빈일루는 동해의 日出을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으로, 사천왕문과 응향각 사이에 자리한 누각이다. 조선 중기 박종(1677-1750)의 기행문인 '동경유록(東京游錄)'에 '송월요(送月窯)'와 함께 처음 빈일루라는 이름이 나온다.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에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 두 번에 걸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5년 산불로 훼손된 이후 발굴된 유구와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전면은 팔작지붕, 후면은 맞배지붕 형식의 누각을 세웠다. 2009년 10월12일 낙성하였으며 누각의 일부 기둥은 지난 2005년 화마를 견딘 느티나무를 손질해서 세웠다. 현판은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스님이 썼다.
<응향각/凝香閣>
향기로움이 뒤엉기듯 서린다는 뜻을 둔 누각이다.
<설선당/說禪堂>
고요한 정적이 곧 말씀과 같은 곳이다.
<낙산사종무소>
<원장/垣墻>
원통보전 주변에 둘려져 있는 담장으로, 조선시대 세조(世祖)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해 온다. 일부 원형이 남아 있고 대부분 2005년 산불 이후에 연결 보수하였다. 장대석 기단이나 자연석 석축 위에 기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쌓고 중간에 원형 화강석을 박아 넣어 조형미가 뛰어난 조선시대 대표적인 담장이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법당이 성역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원형 화강석은 단조로운 벽면의 의장에 긴장감과 변화를 연출한다. 담장의 높이는 약 3.8m, 전체길이 약 220m이다.
<원통보전/圓通寶殿>
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한 낙산사의 금당으로 671년 의상대사가 홍련암 관음굴에서 21기도 끝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여의주, 수정염주와 함께 사찰을 세울자리로 전해 받은 이곳에 원통보전을 세웠다.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상은 고려시대 후반의 양식이며 강원도에서는 유례가 없는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2005년 양양산불로 전소되었으나 건칠관음보살상은 금곡 정념스님과 사부대중의 지혜와 원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으며, 현 전각은 2007년 11월에 복원하였다.
<낙산사 창건 설화/洛山寺創建說話>
낙산사는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며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의 '낙산'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온 해는 신라문무왕 10년(AD670)이었다. 대비진신(관음보살)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간절하게 기도한 뒤 7일 만에 자신이 앉았던 좌구를 물 위에 띄었더니 천룡팔부의 시종이 나타나 굴속(관음굴)으로 인도하였다. 들어가서 참례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수정염주 한 벌과 동해 용이 여의보주 한 벌을 주어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수행하자 드디어 관음보살 진용(眞容)을 뵈었는데 말씀하시길,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 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원통보전 자리이다.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흙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곧바로 없어졌으므로 바로 이곳에 관음보살께서 상주하심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낙산사'라 하였고 의상대사는 받은 구슬을 법당에 모셔두고 떠났다. 이후 낙산사는 134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하려는 수많은 기도불자와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칠층석탑/七層石塔>
의상대사가 처음 이 탑을 세울 때 3층으로 세운 것을 세조13년(1467)에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水晶念珠)와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탑은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은 있으나 상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높이는 6.2m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시대별 특징을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기단부에는 정방형 2단 지대석이 놓여 있는데 윗면의 24판 겹연꽃 무늬가 특징이고 탑신부는 각 층의 탑신석 아래 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갑석)을 올린 간략한 구조 형식이며, 상륜부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보륜 등을 장식하였다.
해수관음보살상 광장으로 통하는 문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보살상으로 가는 길에 본 옆 모습의 해수관음보살상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菩薩像>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는 곳에서 바라 본 의상대 모습.
<관음전/觀音展>
관음전 안 천정 유리틀을 통해 해수관음보살상이 보인다.
<보타전/寶陀壂>
7관음과 1,500관음을 모신 곳.
<낙산사중수비>
홍련암 앞 해안과 바다
<홍련암 감로수>
碑文 :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가 낙산사를 참배하기 위해 오다가 보니 흰옷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대사가 그 벼를 달라고 여인은 벼가 익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사가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을 만나 물을 청했는데 여인은 빨래를 빨던 더러운 물을 떠주었다. 원효가 그 물을 버리자 이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스님은 가지 마십시요" 하고는 숨어버렸다. 원효가 돌아보니 그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 짝이 관음상 앞에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앞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고 그 우물을 오봉산 정상 넘어 에서 찾아내어 우성건설 최승진 거사님의 시주를 받아 이 자리와 낙산사 원통보전에 흘러넘치게 하였다. - 1994년12월 도선 글 -
<연하당/蓮河堂>
여신도의 거처라는 푯말이 있다.
연하당 추녀에 달린 풍경(風磬)
<홍련암/紅蓮庵>
의상대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따라가 석굴 잎 바위에서 기도하다 붉은 연꽃 위의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세운 암자로 홍련암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신라 문무왕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수차례 중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의 전각은 2002년에 중건된 것으로 관음굴이 있는 해안가 절벽 위에 세워진 흔치 않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앞뒤의 지붕 형식이 다른 암자로 전면은 팔작지붕, 배면은 맞배지붕 형식이다. 불전(佛殿) 안 바닥에 난 구멍의 유리를 통해 절벽 아래 관음굴을 볼 수 있다.
연하당에서 바라 본 의상대 앞 해안.
<의상대/義湘臺>
<관음지/觀音池>
홍예문으로 가는 길
<선열당/禪悅堂>
스님과 신도들의 공양간 건물인 선열당.
되돌아다 본 홍예문 주변의 전경이 고즈넉하게 평화롭다.
2010년 9월29일에 다녀온 낙산사를 2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2년 전 보다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에서 화마로 전소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생기로운 모습에서 더불어 즐겁고 상큼한 하루였습니다. 새로 난 오늘의 낙산사가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분들의 정성과 땀이 배어났겠지요. 그 모든 분께 고마움을 드립니다.
2012년 10월9일 낙산사에서,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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