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樂浪郡)은 기원전 108년 중국 한나라가 우리 역사상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한 4개의 군현(낙랑.현도.임둔.진번) 중 하나입니다. 400여년간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 지방에 존재하면서 우리 고대문화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낙랑군 초기에는 고조선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북방 문화의 영향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장기간 군현 지배를 거치면서 중국 문화의 침윤을 받아 고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가 결합한 이 지역만의 독특한 낙랑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낙랑군 아래에는 조선현(朝鮮縣), 점제현(秥蠐縣) 등 25개의 현이 있었으며 군(群)과 현(縣)에는 중국에서 관리가 파견되었고, 이들은 토성(土城)을 거점으로 고조선의 옛 지배세력을 이용하여 서북한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낙랑군의 주민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과 고조선의 옛 주민들로 구성되었는데, 기원전1세기 말「한서(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62,812호(戶), 406,748인(人)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기원1세기 초 고조선 주민이었던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약 6년 동안 자립하기도 하였으며, 동해안 일대의 7개 현이 폐지되는 등 점차 세력이 위축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변경지대인 황해도 지역에는 따로 대방군(帶方群)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313, 314년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낙랑.대방군 두 중국 군현은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낙랑군의 중심지 였던 평양시 대동강 남쪽에는 당시 관청이 있었던 자리인 낙랑 토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주변으로 3,000여기의 무덤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여러 지역에도 현의 중심지였던 다수의 토성과 함께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역사 - 지리적 고증작업에 주목하였으며, 고고학 유적과 유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사되었습니다. 1909년 세키노 다다스(關野貞)가 최초로 볃돌무덤을 조사하였고,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설립되어 1916년부터 낙랑고분을 활발히 조사하였습니다. 1931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외곽 단체로 출범한 조선고적연구회가 발굴조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해방이전 조사된 낙랑고분 출토 유물과 관련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되다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넘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낙랑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뒷바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역사를 낙랑군의 설치로 인해 중국의 선진 문화가 이입됨으로써 타율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기존 연구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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