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문신인 근암 윤급(近菴 尹汲 1697-1770)의 영정으로 사모(紗帽)와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표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半右向)으로 앉은 뒤 공수(拱手)하고 있는 전신상이다. 쌍학흉배(雙鶴胸背)와 서대(犀帶)를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윤급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 1품에 오른 영조 38년(1762)의 66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변상벽(卞相璧)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이 인용되고 있어, 동 초상이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였던 변상벽이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의 사마귀와 검버섯, 붉은 홍기(紅氣)까지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이며 족자표장도 18세기 후반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준다.
윤급( 尹汲 1697-1770)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유(景孺), 호는 근암(近庵). 영의정 두수(斗壽)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세수(世綏)이다.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의 문인이다.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지평·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734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이조판서 송인명(宋寅明)의 인사행정을 비난하다 파직되었다. 1736년 사간으로 다시 기용되었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우부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741년 대사성으로 유생의 기강쇄신에 힘썼으나 그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조참의로 체직되었다. 1744년에는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다 일신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46년 도승지로 다시 기용된 뒤,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호조참판·부제학·형조판서·개성유수·예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영조의 탕평책을 여러 번 반대하다 파직 또는 좌천되었으나 계속 재기용되어 이후에도 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판윤·좌참찬 등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나 그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이루었다. 저서에 〈근암집〉·〈근암입조시말록 近庵立朝始末錄〉·〈근암연행일기〉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필자미상 윤급 초상(筆者未詳尹汲肖像) <寶物1496號>
조선시대 / (軸) 絹本彩色151.6 × 82.2 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德3505)
필자미상 윤급 초상(筆者未詳尹汲肖像) <寶物1496號>
조선시대 / (軸) 絹本彩色151.6 × 82.2 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德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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