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옛 인물초상화

필자미상 조흥진 초상(趙興鎭肖像)

鄕香 2012. 1. 30. 22:33

조흥진(趙興鎭 1748(영조24)~1814년(순조14)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수보(秀甫). 대수(大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錫命)이고,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재세(載世)이며, 어머니는 이현보(李玄輔)의 딸이다. 큰아버지 재임(載任)에게 입양되었다.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정자()를 거쳐 1780년(정조 4)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도당록(錄)에 올랐다. 그해 개성부경력()에 이어 교리가 되었고, 1782년 부제학, 1786년 동부승지(旨), 호조참의, 1801년(순조 1) 곡산부사(使), 1809년(순조 9) 대사간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의주부윤() 재임 중에는 압록강 주변의 위화도()를 비롯한 여러 섬의 토질이 비옥함을 알고 개간할 것을 건의하여, 조정의 후원으로 대규모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해 함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을 이끌고 철산()·용천() 등 7읍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난 평정 후의 논공행상에서 관비()를 허비하였다는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공이 작게 평가되자 사직하였다. 그 후 대간의 건의로 병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이어서 한성부우윤 . 부종관()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처음 숙정()이었으나 충헌()으로 개시()되었다. 

 

사모에 쌍학운문 흉배를 붙인 짙은 녹색 운문단 단령과 학정금대를 착용하고 오른쪽을 향한 좌안칠분면의 반신상이다. 화면에 ‘증이판 시충헌 조공휘흥진 유상(贈吏判 諡忠獻 趙公諱興鎭 遺像)’이라 씌어 있어 조흥진의 초상화임을 알 수 있다. 갈색 선으로 윤곽선과 이목구비, 주름살 등을 그리고 눈두덩과 눈꺼풀, 양 콧날 옆, 얼굴에 마마의 흔적과 가장자리 등에 어둡게 음영을 넣었다. 음영부분의 경계가 뚜렷하고 매우 도식적이다. 사모는 검은 바탕에 세부형태를 광택이 있는 먹 선으로 정의하였고, 둥근형태가 드러나도록 양 끝부분에 호선을 중첩하여 그려 넣었다. 몸체는 배채한 후 먹 선으로 윤곽선과 옷 주름을 그리고 선을 따라 음영을 살짝 넣었다. 운문단 바탕에 쌍학과 오색구름을 수놓은 흉배를 부착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비해 얼굴 표현이 다소 판에 박은 듯 도식화되는 양상이 보이는데 19세기 들어 점차 경직되어 가는 단계의 화법으로 생각된다.

 

 

 

 필자미상 조흥진 초상(趙興鎭肖像)

조선시대 / (軸) 絹本彩色60.5×40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