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도산서원 (陶山書院)

鄕香 2011. 6. 8. 11:18

산과 들이 푸르른 무더운 여름에 예절의 고장 안동 도산서원의 크고 잘 생긴 정자나무(느티나무)아래 서늘한 그늘처럼, 시원하고 서글서글한 성품에 잘 생기고 햇살처럼 밝은 젊음을 보았습니다.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상냥하고 예절 바르고, 겸손과 자상함이 표정과 행실과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남에, 예절의 고장 영남지방의 표상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태산고악(太山高岳)" 일찍이 큰 산처럼 높은 봉우리처럼 기개와 학문이 높다는 안동지방(慶尙道)을 일컬어 이르는 말로써 이 지방에서 훌륭한 선비들이 배출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어제 그런 이야기의 산실과도 같은 뜻 깊은 곳(陶山書院)에서, 젊고 참으로 올바른 분들을 만날 수 있었음에 행복합니다. '그 사람을 모르면 그 벗과 그의 주변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반듯하고 인애(仁愛)로운 젊은 분들을 보니 뵙지 않아도 세 분의 부모님의 따뜻하시고 예의 바르시고 정있는 분들이심을 세 젊은 이의 품성과 행실에서 익히 보았음입니다. 젊은 세 분의 예(禮)와 그 착함(善)이 바이러스처럼 온 세상에 끊임없이 전이되어 즐거움과 행복이 충만한 사회가 끝없이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옛 성현의 흔적을 보러갔다가 그 보다 더 큰 보람을 받아 그 여운이 아직도 가슴에 훈훈합니다. 참 행복이 무엇에서 나오고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이여, 더욱 건강하시고, 하고자는 바람이나 일이 늘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옆 석축에 아름답게 핀 노란 꽃, 그 이름은 모르지만, 오가는 이들에게 밝은 미소를 안겨줍니다.

 

 

 

도산서원이 가진 예스러움에 반(反)하여 잘 정지된 길과 절지된 키 작은 가로수에서 도식화된 느낌을 봅니다.

 

 

 

도산서원(사적 제 170호)은 조선 선조(宣祖) 7년(1574)에 건립된 것으로 퇴계 이황 (退溪 李滉,1501~1570)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입니다. 영지산(靈芝山)을 뒤로하고 동취병(東翠屛), 서취병(西翠屛)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조가 이름을 내렸고, 편액은 선조 8년(1575)에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썼습니다. 

이 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李夏應) 서원철패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의 대상으로 지정되어 건물을 보수하고,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玉桭閣)을 신축하여 퇴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古書 1300여종 5,000여 책과 퇴계문집을 비롯한 목판 총37종 2,790판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시사단(試士壇)

정조 16년(1792년) 음력 3월25일 官員 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祭文으로 退溪 李滉의 功을 기리기 위하여 祭祀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도산서원 앞 강 건너편 백사장 송림에서 특별과거시험을 열었습니다. 正祖大王께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의 遺德을 기리기 위해 어제(御題)로 도산별과를 치렀는데, 응시자는 7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 시험을 기념하는 자리가 강 건너 비각이 있는 둥근 원형의 단을 쌓은 곳으로 시사단(試士壇)입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領議政)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지었습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壇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科擧)의 자리를 표(標)해 두고 있습니다. 碑閣은 조선시대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였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시사단 원경(遠景)

 

<시사단 비각>

 

시사단(試士壇) 近景

 

<도산서원 앞 마당에 있는 나무들>

(왕버들) 마치 용틀임을 하듯 참으로 크고 그 비틀림과 형상이 기묘합니다. 마무 전체가 마치 땅위를 기어가듯 늘어져 있어 나무 전체 여러 곳을 굄목으로 받쳐 주었습니다.

 

 

왕버들입니다. 참으로 우람하고 거대합니다.

 

 

 도산서원 입구에 서 있는 모과나무입니다.  

 

 

네 그루의 느티나무가 멋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넓은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두 그루의 왕버들

 

 

도산서원을 정면하고 있는 매실나무입니다. 매실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싱싱한 청매실이 탐스럽습니다. 한 입 깨물면 시큼하겠지요.

 

 

<열정(洌井)>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역경(易經)의 정괘(井卦) '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에서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지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습니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은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사람은 모두 떠났어도 이 우물의 맑은 물은 고여 있습니다. 다시 퍼내주기를 바라듯이...

 

 

도산서원으로 들어서는 문입니다. 문을 통해 서원의 중심인 도산서원건물과 현판이 먼 거리로 보입니다.  

 

 

출입문 안에서 바라 본 도산서원의 전경입니다. 맨 위 도산서원 건물을 향해 놓여있는 돌계단을 중심으로 東西로 건물이 시립하듯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기념식수비입니다.

 

 

<박 대통령 각하 기념식수>

이 금송은 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심어졌습니다. 우측 옆으로는 도산서당이 있습니다.

 

 

<몽천(蒙泉)>

이 우물은 박정희대통령께서 기념식수하신 금송과 함께 한 마당에 위치해 있습니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易經)"의 몽괘(蒙卦)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습니다.

 

 

도산서당으로 들어서는 문 입니다.

 

 

서당 안쪽 마당에는 2m가 넘는 도장나무(회양목)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이렇게 큰 회양목을 보기는 저로서는 처음입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 이황 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쳐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거쳐하시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습니다.

 

 

<정우당(靜友塘)>

퇴계 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습니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흐린 물을 정화하며 속은 비우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습니다. 이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름을 바르게 이끄는 군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靜友는 고요한 사색을 벗으로 여긴 것입니다.

 

 

전교당(典敎堂)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진도문(進道門)이라 합니다. 학문의 길로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명실(光明室)>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로서 현판은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입니다.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습니다. 광명(光明)은 "많은 책이 서광(瑞光)을 비추어 준다."는 뜻입니다.

 

 

진도문(進道門) 밖에서 바라 본 좌측에 있는 광명실(書庫)로 지붕은 맞배지붕입니다.

 

 

<전교당(典敎堂)> 寶物 第 210號

진도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을 추모하는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로 이름은 전교당이라고 합니다. 조선 선조(宣朝) 7년(1574)에 건립되었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강당인 대청(大廳)과 거실(居室)인 온돌방(한존재,閑存齋)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두었고, 쪽마루는 건물 뒷면의 대청 뒷부분과 온돌방의 오른편에만 설치하였습니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되었습니다. 선조임금이 내린 현판(懸板)의 글씨는 명필가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글씨라고 합니다.

전면 좌우에는 부속건물로 동편의 건물은 동재(東齋)로 박약재(博約齋)라 부르고, 서쪽의 건물은 서재(西齋)로 홍의재(弘毅齋)라 합니다.

 

 

대청인 전교당의 모습입니다. 뒷면은 3개의 여닫이 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측 한존재(閑存齋)현판이 걸린 곳이 온돌방인 居室입니다. "陶山書院" 이 현판의 글씨가 선조 때 명필가 한석봉의 글씨라고 합니다.  

 

 

전교당 천정의 모습입니다.

 

 

전교당(典敎堂) 건물 뒤에서 바라 본 전교당 안틀입니다. 진도문(進道門) 양 옆으로 밖에서 보면 누각식으로 지어진 서고(書庫)인 두 광명실(光明室)이 보이고, 좌우로는 부속건물로 동편의 건물 동재(東齋)로 박약재(博約齋)가 위치하고, 서편에는 서재(西齋)로 홍의재(弘毅齋)가 있습니다.

 

 

<동.서재(東.西齋)>

전교당의 부속건물로 도산서원의 유생(儒生)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서편에 있는 이 건물은 '홍의재(弘毅齋)라고 합니다.

 

 

<동.서재(東.西齋)>

전교당의 부속건물로 도산서원의 유생(儒生)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로 '박약재(博約齋)라고 합니다.

 

 

<장판각(藏板閣)> 책을 찍어내는 목판을 보관하던 건물입니다.

 

 

<장판각(藏板閣)> 본 건물 입니다.

도산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선조어필(宣祖御筆),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유묵(遺墨), 언행록(言行錄), 병서(屛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하던 장판고입니다. 장판(藏板)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습니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고(八萬大藏經板庫)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건축구조는 비슷합니다. 다만 경판고는 안바닥을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깔고, 참숯을 깔고, 그 위에 소금이 섞인 황토로 덮어 바른 바닥인 것에 비해 이 장판각은 마루바닥입니다.

 

 

<상덕사(祀堂)>寶物 第 211號

이 건물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를 둘러싼 담장도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정 당시에는 흙담장이었으나, 도산서원 정비사업 때 현재의 돌담장으로 바꾸었습니다. 본 상덕사는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는 곳입니다. 도산서원의 제일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2칸의 정문을 두었습니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만든 돌로 4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 맞배집입니다.

건물의 구조(構造)는 전교당(典敎堂)과 비슷하여 네모기둥에 공포(供包)를 두지 않은 간략한 굴도리집이며 부연(附椽)이 없는 홑처마로 매우 검소하게 지은 건물입니다.

 

 

이 사진은, 개방되지 않은 사당 안을 담장 넘어로 들여다본 정경입니다.

 

 

상덕사(祀堂)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입니다. 마주보는 두 건물은 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입니다.

 

 

 이 건물은 제수청과 마주하고 있는 주고(酒庫)입니다.

 

 

<고직사(庫直舍)>

書院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들의 살림집으로 상하에 고직사(庫直舍)가 있습니다. 이 사진은 고직사 건물의 행랑채에 붙은 대문입니다.

 

 

안에서 대문쪽을 바라본 내부구조입니다.

 

 

대문쪽에서 바라본 안쪽 왼편 구조입니다.

 

 

안쪽에서 행랑쪽 대문을 바라본 내부입니다.

 

 

건물의 각 초석 위 기둥이 부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벽과 기둥 사이에 공간을 두었습니다. 또한 굴뚝을 담장으로 내었습니다.

 

 

바깥에서 본 수직사(守直舍)대문과 담장입니다.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鄭士誠:芝軒/號)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합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입니다.

 

 

 

관람을 마치고,

 

 

2011년 6월7일.

도산서원에서..  - 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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