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초정 박제가 필 목우도(楚亭朴齊家筆牧牛圖)

鄕香 2011. 2. 6. 16:16

楚亭  朴齊家는 密陽朴氏로 1750年(英祖26年)에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1815年(純祖15年)에 쎄상을 떠났습니다.

자(字)는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 호(號)는 초정(楚亭), 위항도인(葦杭道人)입니다. 그는 초년(初年)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熱河日記 26卷을 저술하여 그 뛰어난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實學의 大家)의 門下에서 학문을 배웠고, 사신(使臣)으로써 여러 차례 중국 淸의 수도 연경(燕京)에 가서 문화교류(文化交流) 사상(思想)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북학의(北學議) 내편·외편을 썼습니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습니다. 이무렵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연암(燕巖) . 담헌(湛軒) 등 보다 급진적인 북학론(北學論)을 주창(主唱)한 國民主義 경제사상의 先驅者이며 실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詩 . 書 . 畵에 두루 능하였고, 특히 중국을 왕래하면서 古今 名家의 그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탓으로 많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지만 모두 畵格이 높습니다.

 

이 "牧牛圖"는 비록 小品이기는 하지만, 단원의 佳作을 방불케하는  作風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선비풍(士人趣向)의 文氣가 곁들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畵題를 붙였습니다.

『 청장운 목아 도기우 시천연화의 약기요정중 시속목아 불효사 靑莊云 牧兒 倒騎右 是天然畵意 若騎腰正中 是俗牧兒 不曉事 』

「 靑莊館 주인이 말하길 "목아가 거꾸로 소를 타는 것이 바로 天然의 畵意이다. 만약 허리 가운데 탔다면 이는 속된 목아로서 멋을 모르는 것이다.」

 

楚亭 朴齊家 (1750~1815) / 紙本淡彩 / 幅 33.7 x 25.5cm / 朴漢洙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