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제석기의 盛用과 稻作, 지석묘의 조영 및 청동기의 등장 등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특징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색은 종합적으로 우리의 전통사회의 基礎인 '농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농업생산의 토양인 대지와 결합된 人間, 즉 농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今昔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의 전개 과정을 生産力의 關係에 局限하여 표현하면 토지확보의 過程에 다름 아니라, 농촌의 탄생과 함께 耕地擴大를 위한 伐採 용도로서 대형의 蛤刃石斧類가 등장하고 자귀, 끌, 대패날, 등 木工具 세트가 완성되어 住居建築의 기술이 발달되고, 목기의 제작이 이루어져 생활용구의 다양화가 촉진되는 등 力動的인 변화가 뒤따르게 됩니다.
여기에 대륙으로부터 새로이 청동기가 유입되고 점차 제작 확산되면서 技術革新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는 급격한 사회적 變換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의 핵심은 사회질서의 再編이라 하겠습니다. 大谷里나 草浦里 유적에서 보이는 지역적 首長墓의 出現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鐵器가 開始되면 그 波長은 보다 광범위해 집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內部的 수용능력은 농업생산력에 基礎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생산력의 증대가 집단의 통합을 위한 고리이고 이를 위해 耕地開拓과 水路의 擴充을 비롯한 토목사업이 전개되며 이들을 수행할 根據로서 정치적 지배력의 强化와 儀禮行爲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程度는 광주 新昌洞遺蹟의 발굴성과를 통해서 점차 파악되어지고 있습니다. 유적에서 알려진 155cm에 해당되는 벼껍질층위의 두께는 확인된 陸稻를 재배한 밭, 그리고 출토된 다양한 木製農具와 함께 당시 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창동유적에서는 農村儀禮와 관계된 유물은 물론이려니와 織造道具 및 漆工具, 樂器 등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 생활문화 내용은 三國志魏志東夷傳의 기록과도 일맥상통함을 보여 줍니다.
이 유적은 잔구상(殘丘狀)의 구릉지대와 그 아래의 충적대지(沖積臺地)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소댁지 외에도 초기철기시대부터 삼한시대에 이르는 집자리와 밭이랑 등의 생활유적과 함께 무덤군이 있는 복합유적입니다.
소택지에서는 나무로 만든 각종 농구류를비롯하여 생활 관련 목기류, 칠기. 토기류, 동물뼈, 씨앗류, 민물패류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경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삶과 죽음의 공간을 함께 보여주고 있어 이 지역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新昌洞低濕地調査全景>1997年
<新昌洞의 稻>
신창동 저습지유적의 최대 특징은 벼껍질층의 존재입니다. 이 층위의 기본 屬性은 벼껍질과 함께 볏집을 비롯한 禾本科 및 草本類가 集積된 것으로 최대 155cm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층위의 중심 素材인 벼껍질은 精穀過程에서 벗겨진 왕겨가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는 낟알이 없는 벼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퇴적층의 두께로 보면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連續的으로 발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목제농구 등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벼의 栽培技術은 어떤 難關에 놓여 있었거나 종자개량이나 단위 면적당 제한된 수확량 속에서 재배면적의 증가가 이루어진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신창동의 토양샘플 및 炭化米 그리고 벼의 줄기에 대한 분석결과 본 유적에서 재배된 벼의 품종은 短粒種으로 밝혀졌으며, 다량의 花粉이 集塊狀態로 검출된 점은 아직 開花後 受粉되지 않았거나 未熱한 '쭉정이'의 존재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신창도 벼껍질층 노출상태>
<신창동 炭化米>
<두형토기(豆形土器) /광주 신창동 소택지 / 높이30.3cm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木製農具>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농구류에는 괭이와 괭이자루, 낫자루, 절구공이, 등이 있습니다. 괭이는 가장 기본적인 농기구로 起耕具인 동시에 土木用具이며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괭이 날의 형태는 평괭이와 가지괭이가 있는데, 모두 장방형의 자루를 끼우는 구멍(柄孔)에 곧은 손잡이 자루(直柄)를 끼워서 부착하여 사용합니다. 낫자루는 작은 자연목 또는 가지(枝)를 막대상으로 잘라내어 만든 것으로 直柄이 기본입니다. 刃部(낫)는 출토되지 않았지만 자루에 낸 구멍은 鐵鎌의 것입니다. 절구공이는 곡식을 빻거나 찧는 정곡도구로 지금도 농촌에서 사용되고 있는 형태와 같습니다.
<괭이/길이37.6cm><절구공이/길이31.3cm>
<괭이(木器) 광주 신창동 /길이 (괭이)32.2cm (자루)91cm /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쇠스랑형괭이/길이30.5cm>
<낫자루(오른쪽)길이36.6cm>
↑
<시루(甑) 광주 신창동 소택지 / 높이 21.7cm / 국립광주박물관>
<시루(甑) 밑 모양 >
이 현악기는 광주 신창동 소택지 유적과 경산 임당동 A지구 121호 무덤 출토품을근거로 복제한 것입니다. 신창동에서는 반만 남아 있는 채로 출토되었으며 길이 77.2cm, 너비 28.2cm 가량으로 복원됩니다. 두부(頭部)에 소공(小孔)을 뚫어 현(絃)을맬 수 있도록 하였으며, 미부(尾部)에 평면 역삼각형의 돌출부를 만들고 여기에 촉구멍을 뚫어 현고정부를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현공(絃孔)은
6개이나 원래는 10개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부는 중앙부가 약간 솟아 있으나 전체적으로 파내어 요자형(凹字形)을 이룹니다.
한편 임당동121호 무덤의 현악기, 칠초동검(漆鞘銅劍), 부채, 목제두(木製豆), 의 배열상태가 다호리11 . 15 . 17호 무덤에서 확인된 칠기판과 출토위치가 유사하여, 다호리의 것도 현악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로 볼 때 기원전 1세기경의 삼한 전역은 동일한 문화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들이 우리나라 현악기의 최고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가야금의 시원형(始原形)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악기 출토상태 길이 77.2cm>
< 현악기 복제(絃樂器 複製) / 光州廣域市 新昌洞, 長77.2cm, 國立光州博物館 所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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