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金堤 碧骨堤)
김제를 옛 馬韓時代에는 辟卑離國, 백제시대에는 碧骨郡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벼(稻)의 골이라는 뜻으로 稻鄕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地名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古語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 碧骨堤라 표기된 것은 이두표기에 기인한 듯합니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金萬平野를 비롯하여 정읍시(古阜郡, 仁義縣), 부안군(扶寧縣)등 1만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습니다. 제방의 길이는 3.3km, 상단폭 10m, 하단폭 21m에 이르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21년조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열었는데 그 둘레가 1,800보(步)이다"라고 하여 AD 330년에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벽골제를 발굴·조사한 결과 그 시축연대가 1600(오차 100)BP 즉 AD 300년경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을 보면 축조연대는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330년은 당시 신라의 영역과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이후 영역확장 기록을 통해 볼 때, 백제의 영토로 추정되며, 벽골제 축조시기는 백제 11대 비류왕(比流王) 27년(330)으로 백제에 의해서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사가(史家)의 착오로 신라측 기사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구수왕(仇首王) 9년(222) 2월조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방을 쌓게 했다"라는 기사로 미루어 백제 지역에서는 이미 이른 시기부터 제방수축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수지의 축조는 당시 벼농사의 보급을 알려주는 것인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상주의 공검지(恭檢池), 의성의 대제지(大堤池) 등이 있습니다.
한편 벽골제는 그 축조 규모로 볼 때, 당시의 토목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벽골제는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년) 증축한 뒤, 고려·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 2년(1420년)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습니다.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몇 차례의 수축이 있었으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아 폐지되었습니다. 현재 단지 내에 제2수문 장생거가 있으며, 제방을 따라 남으로 약 2km 내려가면 제 4수문 경장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重修碑)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長生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라고합니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團地 內에 있는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에 위치한 경장거 뿐입니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의 기록에 제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 뚝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언덕(丘壟)처럼 바라보였다. ···· 또 (수문)양쪽의 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永樂 13년(明의 연호 태종 15년, 서기1415년)이다. ···· "
전체 길이 약 3km에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총 5개의 水門(신증동국여지승람 참조)이 있었으나 지금은 제방 및 제2수문 장생거와 제4수문 경장거가 남아 있습니다. 벽골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서 治水의 기능을 헤아려야합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치수는 식량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존속의 문제였습니다. 대규모 수리시설은 국가기관시설이었으며, 왕의 권능은 치수자로서의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 만 연인원 32만여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 등을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벽골제의 축조.유지.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적 사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 碧骨堤의 古籍소재 제방 규모 」
<1415년 重修 時 동원인력>
사역인원 : 각 郡의 장정 총 1만명, 간사자 3백명을 증발.
감 독 :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과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김방.
일 시 : 9월 갑인일~10월 정축(24일간).
수문규모 : 수문 넓이 13자, 돌기둥 높이 15자, 땅속 길이 5자.
제방 단면 규모 : 둑 아래 넓이 : 70자, 둑 위 넓이 30자, 둑높이 17자.
제방길이 : 6만8백43자(尺), 제방둘레 : 7만7천4백6보(步), 관계 수전 : 9천8백40결(結)95복(卜)
제1 수여거(水餘渠) :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境縣)의 남쪽.
제2 장생거(長生渠) :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
제3 중심거(中心渠) :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
제4 경장거(經藏渠) : 한 줄기의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
제5 유통거(流通渠) : 한 줄기의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김제군조 중수비문 中 -
<丹若樓>
<丹若閣>
이 건물은 한 낭자의 영정을 모신 閣입니다. 통일신라 제 38대 원성왕 때의 일입니다. 벽골제가 축조된지 오래되어 나라에서는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을 파견하여 重修토록하였습니다. 원덕랑이 벽골제에 도착하여 보수공사에 힘을 쏟는 동안 이 지역 태수의 딸 단야는 원덕랑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큰 공사에는 '용추에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는 俗信이 있었는데, 원덕랑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백성들 사이에는 공사에 대한 우려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김제 벽골제에 이르자, 태수는 딸 단야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월내를 보쌈하여 재물로 바치고 보수공사도 완공 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계책을 알아챈 단야는 자신을 희생하여 제방도 완성하고, 원덕랑과 월내를 결합시키며, 또한 아버지의 살인도 막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고, 벽골제는 무사히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근거해 최근에 벽골제에 단야각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金堤 碧骨堤碑 堤防>
이 제방은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쌓았는데, 이처럼 대규모의 제방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통일신라 원성왕(785~798)때 늘려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려 수리하였으나 이후로 호용도가 적어 방치되었다.
지금은 포교리로 부터 월승리에 이르는 약 3km 정도의 제방이 남아 있다, 그 남북단의 두 곳에 수문으로 썼던 커다란 돌기둥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제방을 관계수로로 이용하여 원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원래 제방의 높이는 6m 내외이고 밑변 너비는 23m 가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방 아래 장생거 동쪽에 조선시대에 세운 이 벽골제비가 있다. 이 비석에 제방을 고쳐쌓은 내용을 새겼는데, 마모가 심하여 읽기가 어렵다.
《碧骨堤碑閣》
<벽골제 쌍용>
사적 제111호 벽골제 저수지에는 이 제방을 훼손코자하는 청룡과, 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백룡이 살았다는 설화가 전래되고 있어 본 소재로 쌍룡을 형상화한 조소물입니다.
<월촌입석.月村立石>
立石은 신석기시대에서 삼한시대에 이르기까지 내려온 우리나라의 풍속적 신앙입니다. 입석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재앙을 막아주는 守門神이자, 마을의 豊農과 平安을 지켜주는 守護神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巨石文化財)입니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 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습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립니다. 입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cm, 폭 62cm, 두께 40cm입니다.
벽골제 앞에 농경단지 학습장을 만들어 놓은 전경입니다.
<용두레>
물이 많고 무넘이가 높지 않은 곳의 물을 대량으로 퍼 올리는 두레입니다. 흔히 논 한 귀퉁이에는 가뭄에 대비한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둠벙(웅덩이)이 있습니다. 이 둠벙의 물은 어느 정도까지 용두레로 푸고 나머지는 맞두레를 이용해서 퍼냅니다. 용두레를 사용할 때는 기둥3개를 원뿔형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용두레 끈을 매어 앞뒤로 움직이면서 물을 풉니다. 용두레에는 보통 두 말의 물이 실리고 두세 사람이 교대하면서 푸면 하루에 1000석(石) 정도를 옮길 수 있습니다. 통두레, 파레, 품개, 풍개로 부르기도 합니다.
<무자위>
무넘이가 아주 얕은 곳에서 대량으로 물을 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물을 자아올린다하여 '무자위'라고 부릅니다. 1개의 굴대(軸)주위에 여러 개의 나무판을 돌려 붙여 마치날개달린 바퀴처럼 보이는데 이 나무판을 두발로 번갈아 밟으면 바퀴가 돌아가고 퍼 올려진 물이 봇도랑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지방에 따라서는 자새,자애,물자새,수룡,수차, 등으로 부르며, 주로 평야지대의 논에서 사용되었고, 특히 염전에서는 근래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네>
간결하면서도 매끈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꼭 춘향이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의 댕기머리 아가씨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치마폭을 날릴 것만 같은 느낌이 서렸습니다.
『 碧骨堤로 인한 이야기』
<신털이산>
제방의 북단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산으로 초혜산(草鞋山)이라고도 합니다.
1415년 (태종 15년)에 벽골제를 대대적으로 중수할 때 벽골제 수축에 동원되었던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해진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 하여 신털이산이라 합니다. 중수 후 산 위에 벽골제 중수비를 세웠는데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벽골제 단지 내로 이전하였습니다.
<되배미>
벽골제를 중수할 당시 동원된 일꾼들이 만여명이나 되어 인원을 일일이 파악하기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지게를 진 장정 500명이 들어설 수 있는 크기의 논에 일꾼을 모아 되로 되듯이 한꺼번에 500명씩 인원을 파악했다고 합니다. 곡식을 되질하듯이 논으로 사람을 되질했다고 하여 이 논을 되배미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제주방죽>
벽골제 중수에는 전국에서 많은 일꾼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중 제주도에서 동원된 장정들이 일하던 곳이 제주방죽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중수에 동원된 제주도 일꾼들이 멀리서 오느라 중수가 끝난 뒤에야 도착하였고, 몹시 허탈해하면서 명금산 아래에다 방죽을 파놓은 것이 제주방죽이라는전설도 전해집니다.
<명금산 (鳴琴山)>
통일신라 때 벽골제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낭자는 일꾼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거문고를 연주하였다고 합니다. 단야낭자가 거문고를 뜯었던 산을 鳴琴山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김제시 곳곳에는 벽골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지명들이 많습니다.
김제 봉납면의 접주(接舟), 내주평(內舟坪)등의 지명은 배(舟)와 연관이 있고, 양전동 용두(龍頭)마을에는 용이 살았다고 합니다. 황산 기슭의 강정(江停)마을은 벽골제 물이 머무른다는 이름입니다. 멀리 정읍에도 벽골제가 뻗어 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벽골제로부터 동남쪽 6km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五舟里)는 배가 들어왔다 하여 '배들이'라 부릅니다. 10km 떨어진 방교리호락(湖落)마을은 '호수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이름입니다.
'◈ 세월에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양 소쇄원 (潭陽 瀟灑園) (0) | 2010.11.21 |
---|---|
竹綠苑 .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 (담양) (0) | 2010.11.21 |
오대산 노인봉 소금강 (五臺山 老人峰 小金剛) (0) | 2010.11.07 |
청량산/淸凉山(봉화) (0) | 2010.11.03 |
고성리산성 . 동강 / 古城里山城 . 東江 (정선) (0) | 2010.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