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담양 소쇄원 (潭陽 瀟灑園)

鄕香 2010. 11. 21. 17:45
소쇄원 (瀟灑園)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시대 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자연에 대한 옛 선인들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 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경관의 아름다움이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적 유산입니다. 홍문관(弘文館)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瀟灑翁 양산보는 기묘사화(己卯士禍 : 중종14년(1519)11월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대신들에 의해 조광조, 김정, 김식 등 士林이 禍를 입은 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관직과 출세의 뜻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1,400여 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과 조경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내며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있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이러한 공간 조성은 조선 중종 때의 선비인 소쇄옹 양산보(瀟灑翁 梁山甫 1503~1557)의 주도로 이루어 졌으며,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은 梁山甫의 號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조성된 시기는 1520년 후반과 1530년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소쇄원 들어가는 길에는 대나무를 빼곡히 심어 곧은 기개의 선비정신으로 울타리를 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굽어진 대나무 숲길을 들어가면 우리 민족의 정서적 향내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정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에서 험난한 奇岩山을 헤매이다 복사꽃이 만발한 桃園을 찾았다는 이야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서늘함이 몸에 스미는 竹林을 헤매다 마침내 아늑하고 아름다운 園宇 瀟灑園을 찾아들게 되니 그야말로 도원에 버금가는 곳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소쇄원의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넓은 축대가 있습니다. 그 축대 위에 초가로 작은 정자를 꾸미고 그 축대 아래 옆에는 물길을 내어 작은 연못을 만들어 고기를 놓아먹여, 손님이 오면 낚시로 건져 회 안주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 초막은 작고 낮은 데 위치했으나 소쇄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새소리 물소리 대숲 스치는 바람소리에 가히 仙遊亭이라 해도 넘치진 않겠지요. 

단풍이 붉게 물들어 흐드러지게 호젓한 가을 돌담길가에 이엉을 올린 초막이 옛 참외밭 원두막처럼 아스라한 추억으로 포근하게 다가옵니다. 

 


 

대봉대(待鳳臺), 선비들은 이 초막에서 임금의 그 무엇을 기다렸을까..

 

 

시내(川) 건너에서 올려다본 대봉대(待鳳臺),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고암정사(鼓巖精舍) 등 10여 동의 건물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 동백과 오동, 산시나무, 치자나무, 배롱나무와 황매, 살구와 산수유, 측백나무 등의 수목과 석창포와 창포, 먹문동과 꽃무릇, 국화와 수련 등의 초본에 너럭바위, 우물, 탑과 두 개의 연못 그리고 계곡을 이용한 석축과 담장이 계곡을 중심에 두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적절히 조화를 이룬 園宇입니다. 인위적이되 인위적이 아닌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은 조선의 아름다움입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있는데,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모두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과 영조 31년(1755)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오곡문(五曲門)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霽月堂 :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 :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당시 이곳에 정송강(鄭松江) 등 시인 . 문인 등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송강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 속(續)사미인곡과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은 이곳을 배경으로 쓴 명시로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곳입니다.

 

 

〈제월당/霽月堂〉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둔 주인집.

 

 

제월당霽月堂의 정면입니다. 정면 3칸에 좌측 한칸은 구들방을 들인 누각형식의 집이요 가옥형식의 누각입니다.

'제월'이란 宋史 周敦傳에 나오는 霽月光風에서 따온 말입니다. 宋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무숙 주돈이의 인물됨을 보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뜻을 새기자면, '가슴에 풍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 라고 한 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월 . 광풍이란 이름을 붙인 樓亭이 광주 동북쪽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에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제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됨에 따라 낙향하여 소쇄원(瀟灑園)을 조성하면서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은 제월당(霽月堂)이라 하고 계곡 가까이 지은 누정은 광풍각(光風閣)이라 하였습니다.  

주돈이(周敦) : 中國) 北宋의 유학자. 자는 茂叔,호는 溪,라고 불리우며, 「 태극도설()」과 『』를 하여 종래의 에 宇宙觀을 통합하고, 거기에 한 원리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性理學으로 하였습니다.


 

제월당의 뒷면입니다. 구들방을 들인 오른쪽에 벽장으로 보이는 것이 불거져 있고, 부엌 없는 아궁이가 보입니다. 平瓦와 황토로 쌓아 올린 굴뚝은 지붕을 기와로 덮은 굴뚝이 제월당 과 떨어져 뒤뜰 축대 위에 독립되어 있어 운치를 더합니다. 

 

 

〈광풍각/光風閣〉 비온 뒤에 해가 뜨면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을 가진 사랑방.

 "광풍"은 宋史 周敦傳에 나오는 霽月光風에서 따온 말입니다.


 

광풍각의 전면입니다. 광풍각 누각마루 위 가운데에 앞뒤로 툇마루처럼 남겨 양옆마루와 연결되어 있고 중앙에 구들방을 두었습니다.

 

 

 

계곡에 축대를 쌓아 길과 화단과 연못, 그리고 돌담을 주변의 경관을 거스르지 않고 운치 있게 조화를 이뤄냈습니다.

 

 

남서방향에는 대나무숲을 조성하여 소쇄원의 깊은 맛을 더했습니다.

 

 

 

五曲門을 나서니 계곡 바로 옆에 우물이 있고 소쇄원의 뒤 산자락이 아늑하게 안깁니다. 이 문짝 없는 문은 뒤 산자락이 너무도 아늑함에 양산보가 부인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계곡의 물길이 담장 밑으로 흐를 수 있도록 마련한 水口 둘이 참으로 자연스럽습니다.

 

 

조선의 신선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물씬 배어나는 이 담장의 고움을 어찌할꼬..

 

 

1530년(중종 25) 조광조의 제자 소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南面) 지곡리(芝谷里)에 건립한 원우(園宇).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입니다.

2010년 11월16일 담양 소쇄원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