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중순께 이곳 청량사를 처음으로 왔었습니다. 당시 등산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닭실마을과 이곳저곳 둘러보며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왔었던 청량산, 너무 늦은 시간으로 인하여 청량사경내만 둘러보았는데, 산세와 풍부한 물과 수려한 경관에 억만 년에 백악기에 형성된 자갈 박힌 퇴적암들의 이야기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는 청량산을 후일 다시 찾아보고 싶었기에 가을빛 따라왔습니다.
들머리인 입석주차장 앞 등산로입구입니다.
등산로는 청량폭포가 있는 곳에서 두둘마을 지나 바로 주봉인 丈人峯(870m)으로 오르는 길이 있으나, 대부분 입석에서 출발하여 청량사로 하산하거나 청량폭포로 하산하는 코스인데, 저는 입석을 출발하여 입석→총명수→응진전→김생굴→자소봉→연적고개→하늘다리→장인봉→두들마을→병풍바위→청량정사→입석, 으로 회귀하였습니다.
<산행 안내도>
입석 앞 산행 들머리입니다.
산행초입등산로 옆에 있는 퇴적암벽 밑에 있는 동굴입니다. 자갈과 모래를 시멘트에 섞어 쌓아 굳힌 것 같은 모양의 거대한 암벽 밑이 부식되어 떨어져나간 것같이 보입니다. 본래 호수나 강 또는 바다에 침식된 모래와 바윗덩이 같은 자갈들이 굳어진 후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솟어 오른 것이 마치 콩설기처럼 버무려 놓은 것 같은 바위가 부식되어 굴이 형성되었습니다.
청량사와 응진전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응진전으로 가려면 우측으로 들어서 가파른 오름길로 가야합니다.
이곳 청량산의 바윗돌은 자갈과 모래를 섞어 만든 콘크리트 같은 모양의 퇴적광상물(堆積鑛床物)의 바위입니다. 캠브리아기 약 5억만 년 전)에 바람과 유수로 생긴 퇴적암, 억 만의 세월에 형성된 이 불규칙한 덩어리들, 이렇게 높고 廣大한 산을 이루어 놓은 가공할 그 힘을 생각만 해도 참으로 믿기지 않습니다. 암벽에 수없이 박힌 자갈들은 봄의 햇살을 받아 번득이는 눈짓으로 말합니다, 억 년의 세월을 이 자리에 버티고 서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노라고 ..
넉넉하고 풍성한 산과 산사이 계곡이 청량사로 들어오는 도로이지요.
금탑봉 중간에 응진전이 보입니다.
측간, 사찰에서는 解憂所라고도 하지요. 굴참나무 껍질로 꾸몄는데 참 운치 있고 자연스러워 좋은데, 그 좋은 느낌을 그만 문짝의 색깔과 석면슬레이트지붕이 다 걷어가고 말았습니다.
바위 절벽에 고즈넉한 암자는 잘 어울리는 배필과도 같지요. 좀 너절한 잡동사니만 없으면 맞배지붕에 절벽에 붉게 물든 담쟁이에 기괴한 바위가 한층 더 조화를 이뤄 절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動風石 說話>
"어느 스님이 좋은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자리를 찾았다. 다만 바위 하나를 치워야 했다. 그래서 힘쎈 스님이 절벽 아래로 그 바위를 밀어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떨어진 바위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절을 짓지 않았다."
현재 웅진전 뒤 높은 절벽 위에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세게 밀어도 건들거리지만, 한 사람이 밀어도 건들거리고 바람이 불어도 건들거릴 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動風石이라 부른답니다. 기묘한 바위 표면에 곱게 단풍든 담쟁이 덩굴이 그물무늬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이 應眞殿은 金塔峰 중간절벽 動風石 아래에 위치한 淸凉寺의 부속 건물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柱心包系 맞배 기와집으로 내부에는 釋迦三尊佛과 16羅漢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특히 16나한과 더불어 법당 내부에 高麗 恭愍王(1330-1374)의 부인인 魯國大長公主의 像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공민왕의 청량산 몽진(夢塵)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앞뒤가 모두 절벽으로 형성 되어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는 동풍석이, 요사체 옆의 절벽 사이에는 甘露水가 흘러나옵니다. 또한 법당 앞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周世鵬(1459-1554)은 자신의 字를 따서 景遊臺라 이름하였답니다.
응진전 안 모습입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합니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입니다
金塔峰 中層에는 신라 말 대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崔致遠,857~?)에 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致遠庵 . 총명수 . 風穴臺 등을 들 수 있는, 그 중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신 뒤 더욱 총명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천길 절벽이 상하로 우뚝 솟은 곳에서 물이 일정하게 솟아나는데, 가뭄이나 장마에 상관없이 그 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합니다.
이 물을 마시면 지혜와 총명이 충만해진다고 하여 예로부터 과거 준비를 하던 선비들은 물론,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효험을 보았다고 합니다. 총명수 바로 옆은 최치원의 이름을 딴 致遠庵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총명수)
청량사의 전경입니다. 금탑봉 중층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淸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금탑봉 중충에는 어풍대와 함께 치원대(致遠臺), 풍혈대(風穴臺), 요초대(瑤草臺), 경유대(景遊臺)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臺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에 자리한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퇴적암과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지만, 봉우리는 뾰족함이 없는 둥근 모습이어서 보는 마음이 안정되고 부드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응진전을 거쳐 김생굴로 갑니다.
<김생이 은거하던 굴과 폭포가 있는 그 일대>
김생굴(金生窟)은 擎日峰 中層에 위치하며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金生(711~?)이 글씨를 연마하던 장소인데, 상하가 절벽으로 되어있고 그 중앙으로 수십 명을 수용할 만한 반월형의 자연암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김생은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십여 년간 글씨 공부를 하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金生筆法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書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 냈으며, 이로 인해 해동서학의 宗祖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굴 앞으로는 金生庵 터가 남아 있으며, 굴 옆으로는 천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김생폭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김생굴을 보고 자소봉을 향해가는 길에 바라본 솟아오른 바위산 둥근정상에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꼭 남근석을 닮았네요.
갈림길의 이정표, 우측으로 700m 오르는 자소봉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계곡에 걸쳐있는 아취형 다리, 구름이 머무는 구름다리는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다리는 더더욱 아니고, 애라 모르겠다! 계곡을 가로 지른 것이니 계곡다리라고 하자. 지어놓고 보니 이름 괜찮네.
나무사이로 우측을 쳐다보니 웅진전을 중턱에 안고 있는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자소봉 아래 가까이 있는 표지판, 자소봉을 올라가보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 봉우리 표면을 자세히 보니 이 바위도 퇴적암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자소봉 오르는 철계단을 힘차게 오르는 이름 모를 두 여인.
<자소봉/紫宵峯>
높이 840m의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날처럼 뾰족한 봉우리 8부정도에 편평한 좁은 바위공지가 있어 그 곳까지 철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자소봉 정상입니다. 정상은 사람의 발길로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자소봉 정상아래 표석과 망원경.
<자소봉>
장인봉 쪽으로 가다가 돌아본 자소봉의 자태입니다. 일명 '보살봉'이라고도 합니다.
자소봉 표석을 보고서 다시 그 아래 표지판 있는 갈림길로 되돌아와 장인봉을 향해 갑니다.
<탁필봉/卓筆峰>
卓筆峰은 긴 붓자루 같습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뾰족한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높이 십여m)라 그 밑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좀 거시기 한데..
탁필봉 꼭대기는 오를 수 없고 그 아래 조금 평편한 위치에 있는 標石
서편에서 본 "탁필봉" 봉우리도 멋있지만, 정상 아래에 있는 소나무 정말 멋집니다.
<연적봉/硯滴峰>
硯滴峰에서 바라 본 '자소봉과 탁필봉' 입니다.
연적봉 정상은 완만하게 둥근 봉우리여서 잠시 앉아 시원하고 상큼한 바람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연적봉의 모습입니다. 둥그스럼한 봉우리 모양이 연적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겠지요.
보이는 큰 봉우리가 장인봉 입니다.
<연적고개>
紫宵峰, 卓筆峰, 硯滴峰, 연적고개 등 이러한 지명이나 이름이 문방과 관계되는 이름이 많은 점으로 볼 때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 문필가 김생과 무관치 않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거쳐 온 길 쪽을 보니 연적고개라고 쓰인 푯말의 뒷면에는 청량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소나무의 형태>
이곳의 소나무들은 한 줄기에서 사람의 하체 모양으로 갈려나와 다시 그 가지마다 연속적으로 같은 모양을 연출하고 있는 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띄어 시선을 이끕니다.
<이정표>
자상한 아버지처럼 표시판이 세세하여 길을 헤매는 일이 없겠습니다.
< 丈人峰 >
어떤 사연이 있어 장인봉이라 했을까,
<하늘다리>
하늘다리를 사진기에 담고 있는데, 한 여인이 오던 발길을 멈추고 사천왕 같은 얼굴로 노려봅니다. 아, 무섭습니다. 오해 마세요. 그대가 아닌 하늘다리를 담았을 뿐입니다. 난 여인보다 뒤에 보이는 소나무에 더 눈길이 가는 汝無關心與男랍니다.ㅎ
하늘다리에서 내려다 본 계곡의 모습이 어려서 같이 놀던 옆집 인경이 색동저고리 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영감님의 머리 같은 바위에 영감님 머리털처럼 성글은 잡목가지, 사모(紗帽) 같은 바위에 어사화 같은 소나무 한 그루, 정말 멋있습니다.
어여쁜 때때옷 차려입은 고운 처자 너무도 아름다워 하얀 너울 햇살 뒤집어쓰고 고운 자태 감추나니..
내 그리움 자소낭자 저 편 저만치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건만, 엄하신 미래의 장인 조만치에서 손짓하며 나를 부르시네, 이리 가야 하나 저리 가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에 하늘은 파랗게 자지러져 숨넘어간다.
청량사의 정안스님이 詩를 판각하여 걸었군요.
장인봉으로 올라가는 철조계단입니다.
넓적한 자연석의 장인봉 비석의 글씨체는 金生의 서체를 集字한 것이랍니다.
丈人峰 碑石 뒷면에는 주세붕 선생이 지은 詩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登淸凉頂>
我登淸凉頂 兩手擎靑天 白日正陽頭 銀漢流耳邅
俯視大瀛海 有懷何錦錦 更思駕黃鶴 逝向三山巓
(청량 정상에 올라)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 받치니,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장인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계곡.
아낙의 넉넉한 품처럼, 둔부처럼 두리 뭉실 누워 있는 능선의 경작지는 여인의 품이던가! 마치 상흔처럼 뭇 사내의 흔적같이 그 상흔은 아물 줄 모르네.
(완만한 등성이 마다 일궈진 밭을 보며,)
장인봉에서 300m 내려온 지점에 있는 거리안내판
청량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청량폭포 쪽으로 내려오다 올려다 본 장인봉
<두둘마을>
계단을 다 내려오니 장인봉산자락 쪽 좌측으로 벗어난 오솔길이 있어 오솔길 따라 눈길을 주니 山家가 보입니다. 장인봉 중턱 400고지가 넘는 곳에 단 두 가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옆 건너 중턱에도 두어 채 가옥이 이룬 마을이 보입니다. 길섶에, 단 석자(三字) '막걸리'라고 쓴 허름한 널판자 조각이 있기에 이런 산중에서 노인네가 술을 빚어 살림에 보탬을 하나보다 싶어 찾아 들어갔습니다. 흔치 않은 老村婦의 손맛으로 빗은 산골주를 기대하며 말입니다. ㅎ
어린 시절 방학 때면 가던 경기도 광주군 하대원리(現 성남시 하대원동) 외가의 부엌 곁에 쌓여있던 나뭇동처럼 꼭 그런 나뭇가지를 묶어놓은 땔감이 뭉클 가슴을 치밉니다. 제법 볼만한 산골 모습인데.. 어울리지 않는 부탄가스통만 없으면, 내 보는 눈이 더욱 행복하련만..
보기 쉽지 않은 정취에 한껏 내 정 스며들어 간다.
노부부가 계신 집에서 술을 파는데, 안주가 아무 것도 없다며 검게 묵은 된장에 풋고추와 대추 한 움큼, 술은 1.5L PD병에 가득 담아내어줍니다. 풋고추는 약이 오를 대로 올랐으니 엄두가 안 나고, 막걸리에 대추가 안주라니 어디 될 상이나 싶은가, 할 수없이 배낭에 먹다 남은 찬을 꺼내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시니 참으로 걸쭉하고 입맛을 당기기에 여쭈어 보니 차조로 담근 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이서 넉 잔을 마셨는데 취기가 돕니다. 아직 석잔 정도 남았는데, 이걸 다 마셨다간 산길에 온전치 못할 것 같아 남은 것은 물병에 담고서, "얼마지요?" 여쭈니, ' 만원인데 비싸지요?' 하신다. 도심의 양조 술에 비하면 비싸지만, 언제 이런 술을 또 먹을까 싶고, 어차피 노인네들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어 찾아 든 것이니 값은 고사하고 기분만 상큼합니다.
옆 집을 보니 그래도 구색이 한 때는 따슨 숨결소리 들렸을 법한데 지금 그 숨결 오간데 없고, 술 내준 노인네의 헛간이 웬 말인가.
술 한 사발을 마시고 무심코 올려다본 장인봉이 빙긋 웃네요. 거 참! 이 나이 되도록 장인이 주시는 술맛을 못봤는데, 장인봉 아래서 산골주를 마시고 보니 까닭모를 웃음에 절로 행복합니다.
거나해진 기분으로 길로 나서는데 걸음이 온전치를 않습니다.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청량폭포인데, 저는 마을 옆 좁은 오솔길로 해서 청량산 봉우리들을 끼고 거쳐 온 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며 병풍바위를 거쳐 청량정사로 해서 들머리였던 立石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퇴적암은 기묘하고 못생기기는 했어도 듬직하고 거무죽죽한 바위에 온전히 애가 달았는지 붉디붉어진 담쟁이가 온몸을 비틀며 열정을 태우고 있습니다.
봉우리 등성이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다시 팔부능선을 타고 오던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좀 전에 걸어왔던 봉우리와 등성ㅇ을 올려다보니 그 또한 아릅답고 감회가 깊습니다.
시들어가는 고추나무에 매달린 풋고추와 바알갛게 물든 고추를 보니 술과 약오른 풋고추 내 주시던 촌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엎어놓은 둥근 통 모양으로 생긴 봉우리들이 특이하고도 아름답습니다. 내 저 봉우리들을 이미 거쳐 왔건만 저 모습은 지금에야 봅니다.
이제야 내 알겠네, 옛 사람들이 왜 소나무를 흠모하고 좋아 했는지, 모든 초목 시들어 가건만, 홀로 獨也靑靑 하는 그 氣槪!
좌측 능선에는 내가 거쳐 온 산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고운 모습으로 배웅합니다.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한 하늘다리가 아득하게 보입니다.
산세도 좋지만, 깊고 깊은 골짜기의 맑은 물은 언제나 신비롭지요.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본질..
이 억세 사이에 숨어 있는 길을 찾아갑니다.
선학봉, 문필봉, 자소봉, 이 아름다운 산수를 강세황과 정선은 어찌 보질 못했을까, 아니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그려내질 못한 걸까..
노란들국화 그 화사함에 나절로 말없이 읊조려 봅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임의 모습 찾아서 외로이 가는 길에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송이 그리운 임의 얼굴, 바람은 말없구나 님 어디 계시 온지 거니는 발자국마다 그리움 되어 남네.
청량산은 호젓한 이 길에 단풍 곱게 물들여 놓고 내 마음을 앗아 휘돌아갑니다.
저만치 앞서 가던 님, 어찌하여 발길 멈추고 허공에서 무엇을 눈에 담는가!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그 님 머물었던 자리에 서서 허공에 눈을 주니 경이로운 산하나 살포시 눈길 따라 내게로 스며듭니다.
드디어 청량사로 오르는 넓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보니 두둘마을에서부터 이제까지 지나온 길이 폐쇄된 등산로였습니다.
이제부터 자연의 길이 아닌 길로 걸어 청량사주차장까지 사람에서 인간으로 회귀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으로 회귀되는 과정에도 자연이 못내 아쉬워 주변을 추억으로 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찰과 십자가에서 부처와 예수를 찾기보다 자연의 신비에서 부처와 예수를 봅니다. 작은 풀포기, 부는 바람에서 자비와 은총을 느낍니다.
이 풍경을 보는 사람들 모두 아름답다 하지요. 그 안에 부처를 믿는 이, 하느님을 찾는 이, 조상을 모시는 이, 성황님을 모시는 이, 모두 하나같이 감탄하며 아름답다 하는 것은 모두가 자연의 신비에 의한 것입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하늘에 의한 신비이며 믿음의 길은 달라도 결과는 꼭짓점인 하늘입니다.
'산꾼의 집'과 청량정사 앞을 거쳐 원점인 주차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청량사 앞 갈림길
청량정사와 산꾼의 집 앞으로 가는 언덕
<나란히 있는 정량정사와 산꾼의 집>
지난해 2월에 왔을 때 올린 사진과 설명문이 있어 이 번에는 청량정사와 산꾼의 집 두 건물을 함께 찰영하여 간단히 올립니다.
청량정사는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의 계곡에 자리 잡은 건물로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청량산에 遊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士林들이 뜻을 모아 1882년(순조 32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이후 청량정사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에게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으며 구한말에는 淸凉義陳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되어 있으며, 본체는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왼편에 止宿寮를, 오른편에 雲棲軒을 두었습니다. 堂號는 吾山堂이고 문은 幽貞門이며 현판 글씨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썼습니다.
『淸凉精舍』
빨간 우체통이 젊은 날의 추억을 한 아름 주기에 나 또한 알콩달콩 했던 이야기들을 알록달록 예쁜 단풍에 담아 배불뚝이 되도록 담아주었습니다.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고생대 캠브리아기(약5억4천년 전)에 폭풍이나 물에 의해 형성된 모래와 자갈로 콩설기마냥 버무려 놓은 퇴적암의 실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르던 길을 되짚어가는 길이지만 다시 새롭습니다.
청량산 봉우리들의 모나지 않은 곡선에 매료되어 산봉우리만 보이면 두고 올 수가 없었나봅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은 가을바람에 연록에서 노랑 또는 갈색으로 물들고 시들어가건만 산꼭대기에 성글게 서있는 짙은 청록의 소나무들은 더욱 싱그럽습니다.
멋진 자태의 소나무에 한 줄기 폭포, 그 어울림이 매우 좋습니다. 마르지 않은 폭포는 여성처럼 늘 아름답습니다.
여성적인 넉넉한 면면에 남성적 뼈대를 가진 청량산.
이 후 사진들은 이 청량지문을 지나 잠시 쉬며 둘러본 주변풍경들입니다.
<자연의 儀味의.意美>
<청량폭포>
청량사 입구 전경
2010/11/2 경북 봉화군 청량산에서,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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