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돌비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奇岩 絶壁과 太古의 天然林이 深山幽谷의 맑은 물과 莊嚴한 山勢를 이루고 주위에는 서기 668년 문무왕때 세운 영국사와 천연기념물 제 223호인 은행나무가 있으며, 원각국사비, 3층석탑 등 많은 보물과 함께 자연경관과 동.식물 서식 환경이 우수하여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된 곳입니다. " 2001년12월14일 <충청북도지사.영동군수>
「폭포」
숲이 떨리는 소리, 오늘은 제법 우렁차다. 처녀의 하체(下體)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부끄러움 모르는 쪽쪽새가 내리 꽂는 나무로 대낮에 본연을 드러내고 우렁차게 떨고 있다. - 황태면 -
「永同 寧國寺 銀杏」
이 나무는 높이 31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이며, 나이는 대략 천년쯤으로 봅니다.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동서 방향으로 25m남북 방향으로 22m정도 퍼져 있습니다. 서쪽 가지 ㅜㅈㅇ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0.2m가 넘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충분한 수분을 공급 받고 있으며, 가을에는 이 은행나무의 주변의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격년마다 많은 양의 은행이 열린답니다.
(천연기념물223호)
「미류나무」
저의 소시적에는 서울 압구정동 고향에도 이런 미류나무가 밭뚝이나 개울가 그리고 동구밖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여름이면 그 푸르름 그늘아래 어르신들께서 밭 일이나 논매기로 적신 땀을 식혀주는 휴식처 였고, 또한 새참을 먹을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는 친근하고 정이 묻어나는 고운 추억이 소록소록 피어납니다. 그 미류나무가 70년대 성냥의 붐을 타고 모두 사라지다시피하여, 지금은 참 보기도 어려운 귀한 나무가 되었는데 오늘 이렇게 잘 생긴 미류나무를 보니 참 행복합니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한 마리 있었는데 사진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미류나무는 까치가 집을 짓는 훌륭한 보금자리지요. "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렸네, 산들바람 불어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대요."
산 정상에서 방명록을 보기는 난생처음입니다. 서명하시는 이분 누구신가요?
산상에서 둘러 본 주변의 경치입니다.
하산 도중 올려다 본 천태산 정상 모습입니다.
어느 女心이 소녀적 꿈을 엮었나보다 그 女深 엿 본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네
<寧國寺 石鐘形 浮屠>
이 부도는 원각국사碑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답니다. 부도의 양식은 석종형인데,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래 위의 연꽃 잎이 한 잎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대석의 연꽃 잎과 연꽃 잎 사이에는 작은 間葉을 두었으며 탑몸돌 위에는 寶珠가 있습니다. 이 부도는 6매의 석재로 만들어 졌으며, 전체 높이는 190cm입니다.
<寧國寺 圓球形 浮屠>
이 부도는 원각국사碑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둥근 모양의 부도로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무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상.하에 연꽃 잎이 한 잎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적으로 둥근 형의 탑몸돌과 팔각형의 屋蓋石을 서로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입니다. 지붕돌의 기와골과 합각마루(박공 위에 있는 마루)위에 있는 장식은 비교적 무디어 졌습니다. 지붕돌 위에 정교한 寶珠가 있어 각 부분의 형식이 완전하게 존재하는 부도탑이지만 탑몸돌이 원구형인 점과 장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이 그림양식으로 처리 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높이는 184cm입니다. (유형문화재 185호)
<寧國寺 圓覺國師碑>
이 비석은 고려 의종 7년(1154)에 禪師가 되었고 명종 1년(1171) 9월12일 王師가 된 원각국사비 입니다. 원각국사는 대선사 교웅의 밑에 들어가 아홉살에 중이 되었습니다. 선사의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고려 명종 10년(1180) 한문존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朝鮮金石總覽》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 몸돌은 점판암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전부 알 수가 없습니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碑 머리에 있는 네 마리 龍은 매우 특이하며, 각 부분의 조각은 그 제작 연대가 뚜렷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寶物 第534號) 所在地 : 永同郡 陽山面 縷橋里
<寧國寺>
이 寺刹은 新羅 文武王 8년(668)에 창건하였다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습니다. 고려 문종때 대각국사가 이름을 國淸寺라 일컬었고 고려 고종때에는 金堂을 건립하였다고 전합니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내습을 피하여 이곳에서 國泰民安을 기원하였으므로 이름을 寧國寺라 고쳤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栱包는 內.外三出目으로 쇠서(牛舌) 위에 蓮華를 조각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昌枋 위에 놓이는 平枋은 건물의 측면 앞쪽에만 짧게 놓여 이 지방의 특징인 多包系 맞배지붕을 꾸미는데 흔히 볼 수 있는 구조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민간신앙인 山神靈을 佛敎에서 편입하여 불교의 한 자락으로 사찰의 높은 자리에 閣을 짓고 모십니다.
<寧國寺 大雄殿>
이 건물은 주존불로 석가여래상을 모신 佛殿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고종 30년(1893)과 1934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 절은 圓覺國師가 신라 법흥왕14년(527) 또는 문무왕 8년(668)에 창건하였다고도 하지만 모두 분명치는 않습니다. 고려 문종 때 大覺國師가 國淸寺라 했으나, 공민왕이 亂을 피하여 이곳에서 國泰民安을 기원하였으므로 영국사라 했다고 합니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충북 유형문화재 제61호>
<永國寺 三層石塔>
이 탑은 신라 시대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일반형의 석탑으로서, 2중기단 위에 3층으로 만든 몸돌을 세운 것이 특징입니다.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향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탑을 옮겨 세울 때 2중기단의 위층과 아래층이 바뀌었던 것을 2003년 문화재 보수정비 사업 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신라 말(10세기경)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상륜부의 각 구조물에 쓰인 재료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통일신라 하대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보물 533호)
모든 활엽수 낙엽지고 가지만 앙상한데 홀로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 져간 가을을 놓고 싶지 않은가 보다. 내 마음도 너에 물들어 저 만치 간 나의 푸른 꿈을 부여잡고 싶구나...
古風스런 「萬歲樓」
영국사 길목에 전국의 여러 단체나 산악회의 꼬리표가 만장처럼 반깁니다.
<삼신할미바위>
영국사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삼신할미바위입니다. 옛날 이 바위에서 그 얼마나 애타는 많은 여심이 기원하고 빌었을까요. 대 이을 孫을 점지해 주십사고, 그래도 안 되면 절에 치성도 드리고 육보시를 받기도 했으리~~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지나치는 제게 탁배기 한 잔 보시하신 처사님 고맙습니다. ♥
2010년 11월 14일, 제천산악연맹 산우님들의 영동 천태산 산행사진 - 仁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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