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사진

아차산 (서울 광진구 - 구리시 ) 2010/4/11

鄕香 2010. 9. 23. 23:30

 

 광나루역에서 광장중학교를 거쳐 광장초등학교 정문 을 지나 오르면 자연생태공원이지요. 그 공원을 지나 아차산 들머리를 들어서 藥水를 지나 잘 생긴 老松들이 群林한 곳에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게 공연장을 조성한 곳이 있는데. 이 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음악공연을 하는군요.  

 음색과 달리 검은 니트와 검은 스타킹은 관능적으로 율동의 線을 타고 시야를 녹여 내립니다.

 

 

↓ 아차산 팔각亭으로 가는 길이지요. 온통 바위산이지만 틈새를 비집고 몸을 멋지게 휘어 비틀어진 우리 소나무들이 땀에 젖은 우리를 시원한 솔바람과 쉼터를 선사합니다.  

 이 길은 온달샘으로 가는 곳이지요. 저만치 워커힐의 골프연습장과 한강 그리고 미사리가 보입니다. 신석기인들이 움막을 짓고 물고기를 잡던 아득한 세월이 흘러갑니다. 강물을 따라~~

 바윗길 길목에는 여릿한 진달래가 봉우리를 피워 내고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새색시 마냥 수줍은 자태, 옛 조선의 아기씨가 보입니다.

 진달래에 젖은 마음 채 가시기도 전에 다다른 곳은 옛 절터(寺址)이자 온달샘입니다. 좀 너른 곳에 사람들이 한 백년을 살고자 운동시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30년은 족히 되었을 거예요. 당시 제가 광장동에 살았으니까요.

 산불조심이란 푯말있는 곳이 온달샘이랍니다.

 ↓ 대성암이나 너럭바위로 가는 길목 이곳은 본시 스님들의 다비식을 올리던 '다비장'이지요. 한 여인이 샘물을 받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대성암으로 가는군요. 저는 너럭바위로 간답니다.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고구려대장간마을'이란 세트입니다. MBC에서 방영한 배용준 주연의 "太王四神記"라는 드라마를 여기서 촬영하기도 했답니다. 배용준이 촬영 당시 올려다 본 이 너럭바위 암벽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처음 발견하였는데, 당시 그 형상을 본 사람들이 배용준씨를 닮았다고 해서 그 연유로 지금은 그 형상을 '배용준 얼굴 바위'라고 합니다. 

 아차산은 소나무도 많지만 진달래도 많지요. 봄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피어 산사람들의 마음을 곱게 물들이지요.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아랫마을 '牛尾村'과 구비구비 흐르는 한강. 우미촌은 자유당 시절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낚시를 하시던 곳이지요. 광나루에서 구리시 방향으로 워커힐을 지나자 마자 있는 첫 동네랍니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산은 하남의 검단산입니다.  

 너럭바위 위에 있는 15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지는 석곽묘입니다. 양벽과 뒤쪽과 천장을 각기 한 장의 장대석으로 세우고 덮고 앞 입구도 하나의 돌로 막아 조성한 삼국초기의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는 어찌하여 땅속이 아닌 흙 한줌 없는 바위산 정상 돌방 안에 묻혔을까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재위455~476)이472년 위나라에 고구려 토벌의 원군을 청하였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간첩 仲 도림(道琳)의 계책에 빠져 토목 공사로 국고를 탕진하고 475년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394~490.재위413~490)의 공격을 받아 왕도(王都)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풍납토성에서 몰래 탈출하려다가 백제의 호족출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하여 고구려 장수가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에게 사로 잡혀 갖은 수모를 당하다 이곳 아차산성에서 독전하던 장수왕에게 끌려와 아차산 아래에서 치죄 후 참수되었다고 전해오는데, 그의 시신을 묻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혹여 이 무덤이 개로왕의 무덤은 아닌지 생각에 잠겨봅니다.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590.재위기간559~590)의 사위로 용맹을 날리던 溫達將軍(平岡公主의 夫)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아단성(阿旦城)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합니다.

아차산성의 축성은 문헌상 백제 漢城時代 책계왕(AD286년)때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름도 시대에 따라 阿旦城, 阿且城, 長漢城, 峨嵯城. 등으로 불리웠으며 또한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등이  차례로 점령하였던 전략상 중요시 되었던 城이었습니다. 아차산성은 광개토왕비,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문헌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뒤에서 본 石槨墓입니다.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모래와 낙엽이 쌓여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2010년4월11일 구리시 아차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