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조선국 제 7대 세조·정희왕후 윤씨(광릉) / 世祖·貞熹王后 尹氏(光陵)

鄕香 2009. 7. 4. 09:19

《세조·정희왕후 윤씨 /광릉》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 99-2  

 

 

세조대왕 광릉으로 가는 오솔길가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표석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유내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標碑〉

조선왕릉(광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의 陵(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2009년 6월30일 .

 

 

사적비와 하마비가 나란히 능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여기는 국가 史蹟地입니다. 몸가짐을 엄숙히 하시라는 듯합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貟皆下馬) 

고관대작, 양반 상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여기서 부터는 반드시 걸어서 가라!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여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가 옆에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능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정자각을 가운데 두고 좌측 언덕에 세조 능침, 우측 언덕에 정희왕후 능침이다.  

광릉은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시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15년 뒤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광릉의 동쪽 언덕에 능을 만들고 이름을 동광릉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고 하여 정희왕후의 능도 광릉으로 합치고 정자각을 두 능 사이로 옮겨 지었다. 이로서 광릉은 조선 최초로 같은 능역내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을 조성한 이른바 동원이강(同原異岡) 형태의 능이 되었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재궁(棺) 을 두는 방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으로 만들고 봉분을 두르는 호석(屛風石)을 생략하여 왕릉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력을 절약하셨다. 병풍석 면석에 새기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와 어로는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광릉 입구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가 남아 있다. 

 

 

〈정자각丁字閣〉

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그 까닭이 있다. 

 

 

2009년6월1일 담은 사진.

 

 

세조 비각(世祖 碑閣)

 

 

〈세조대왕 표비世祖大王 標碑〉(前文)

 

朝鮮國

世祖大王光陵

貞熹王后祔左岡

 

 

〈세조대왕표비 음기 世祖大王表碑 陰記〉

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皇明永樂十五年丁酉九月二十九日誕生 宣德三年戊申初封晋平大君後改咸平又改晉陽又改首陽景泰六年乙亥閏六月十一日受禪成化四年戊子九月七日傳位于  睿宗同月八日昇遐十一月二十八日葬于楊州東注葉山直洞子坐之原在位十四年壽五十二   皇朝賜諡惠莊

妃慧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永樂十六年戊戌十一月十一日誕生 宣德三年戊申封 樂浪府大夫人 景泰六年乙亥冊封 王妃成化十九年癸卯三月三十日昇遐六月十二日葬于 大王陵左崗丑坐之原壽六十六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八年乙亥二月 日立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강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은 명나라 영락15년(태종17년 1417) 정유년 9월29일에 탄생하시고 명 선덕3년(세종10년, 1428)에 처음 진평대군에 봉해지셨고, 다시 함평대군으로 개봉되시고 다시 진양으로 바뀌었다가 또 다시 수양으로 개봉되셨다. 명나라 경태 6년(단종3년 1455) 윤 6월에 선위 받아 즉위하였다. 성화 4년(세조14년, 1468) 무자년 9월 7일 예종에게 전위하시고 같은 달  8일 승하하시어 같은 해 11월28일 장사하여 양주 동쪽 엽산직동 남향자리에 모셨다. 재위14년에 52세를 사셨다

중국 명나라 황제는 '혜장'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비혜성흠인경덕선렬명순원숙소신혜의신헌정희왕후윤씨는 명나라 영락16년(태종18년, 1418)무술년

 11월11일탄생하시었다. 중국 선덕3년(세종10년1428)무신년에 낙랑부대부인에 봉해 지셨고 경태6년(단종2년 윤6월1455)에 왕비에 오르셨다. 성화19년(성종14년, 1483)계묘년 3월30일 돌아가셨다. 같은 해 6월20일 장사하여 대왕릉외쪽 언덕 남서방향 자리에 모셨으니 보령 66세이시다. 숭정기원후128년(영조31년,1755년) 을해 2월 모일 비를 세우다.

 

 

〈세조대왕비 · 정희왕후 표비각 世祖大王·貞熹王后  表碑閣〉

 

 

                        세조대왕릉 (바위가 드러난 골짜기) 정희왕후릉                

 

 

세조의 능침

 

 

왕과 왕비 사이에 드러난 거무죽죽한 바윗돌 모습 

 

 

정희왕비릉 

 

 

光陵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1417-1468, 재위1455-1468) 임금과 왕비 貞熹王后 尹氏(1418-1483)의 陵이다.

세조는 太宗 17년(1417) 忠寧大君(제4대 世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진평대군(晉平大君), 진양대군(晉陽大君)을 거쳐 세종27년(1445)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 兄인 文宗의 뒤를 이어 1452년 어린 조카인 端宗이 왕위에 오르자 1453년 黃甫仁 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아우 安平大君을 제거하였으며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교서(禪位敎書)를 내리게 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成三問 등의 集賢殿 학자들과 아우 錦成大君 등을 처형하고 단종을 강원도 단양으로 귀양 보냈다가 賜死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정관정요주해 본국지도 등을 편찬하고 변방의 경비를 굳건히 하며 國稅의 조사에 힘을 기울였다 국조보감의 찬술, 군제개혁, 察訪신설, 각 도에 巨鎭 설치, 호패법의 새실시, 常平倉 제도시행, 蠶業장려, 屯田制실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간행, 간경도감(刊經都監) 신설, 八方通貨주조 등 문무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동국통감(東國通鑑) 역학계몽요해(易學啓夢要解), 잠서(蠶書)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원각경(圓覺經), 오륜록(五倫錄)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규형(硅衡) 인지의(印地儀)를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쉽게 하였다. 또한 북쪽 변방을 침범하는 만주족을 정벌하였다. 세조는 재위 14년 동안 많은 업적을 쌓아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만년에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죽인 것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번민하다가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하다가 1468년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날 수강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1418-1483)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따님으로 세종10년(1428년) 당시 진평대군(세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樂浪府大夫人)에 봉해졌고,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1469년 아들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13살이던 손자 성종을 왕위에 올린 후 조선 최초로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셨다. 선종14년(1483) 온양 행궁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세조 능침 정경  

 

 

왕릉에서의 신도비는 세종대왕의 신도비가 마지막이었다. 신도비를 만드는데는 150명이나 되는 많은 인력이 필요되는 것에 여론이 분분하자 세조 임금이 정인지와 신하들과 의논 끝에 문종 대부터 비를 세우지 않다가 숙종 때 부터 다시 표비를 세웠다 그러나 정작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신도비 세우는 일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그래서 인가  광릉은 태릉이나 대다수 다른 왕릉에 비해 상당히 담박하고 검소한 느낌이 있다. 

 

 

곡장 뒤에서 바라본 정경.

 

 

《世祖의 妃 정희왕후(貞熹王后) 陵寢》

 

貞熹王后 尹氏(1418-1483)는 坡平府院君 尹번의 따님으로 태어나 세종 10년(1428) 당시 진평대군이셨던 세조와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 지셨고,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셨다. 德宗, 睿宗, 懿淑公主를 낳으셨다. 1469년 아들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13살이던 손자 成宗을 왕위에 올린 후 7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첨정을 한 왕후가 되셨다. 

 

 

〈능침 앞 장명등 陵寢 앞 長明燈〉

장명등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적 기능을 갖고 있다. 

 

 

曲墻 뒤에서 바라본 정경, 

장명등을 환히 밝히고 문무인석과 함께 하시니 고요함 중에 담소 있어 적막하다 할 수 없네.

 

 

〈수라간水剌間〉

산릉제례山陵祭禮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

 

 

〈수복방守僕房〉

제기祭器를 보관하거나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청소 등 능의 잡다한雜事일을 맡아 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 

 

 

〈광릉 재실 光陵 齋室〉

재실은 왕른을 지키고 관리하는 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祭享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재실은 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安香廳, 祭器기를 보관하는 祭器庫와 그 외 공간인 행랑만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문헌인 「春官通考」에는 典祀廳 6칸, 제기고 3칸, 안향청 · 재실 6칸으로 구성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실 정면

 

 

2009년 6월 1차 촬영, 2023년3월14일 2차 촬영.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