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영주 부석사 (榮州 浮石寺)

鄕香 2009. 6. 11. 15:57

 

 부석사 주차장 옆에 인공연못이 있습니다.

소백의 봉황산 아늑한 산자락에 수억 년의 풍상과 사연들을 품었을 오묘하게 잘 생긴 바위들을 모셔 놓고, 靑澹하고 굽고 휘어 틀어져 기묘하고도 청아한 아름다운 솔로 꾸며 참 좋은데, 자연과 문명의 극을 이루는 이 배양은 왠지 어설습니다. 분수설치와 인공폭포가 없었더라면 그 얼마나 운치있고 더 없이 좋았을가 하는 아쉬움...   오로지 저의 느낌일 뿐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안목이 있는 것이니..

 

 

안내판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는 금빛 찬란한 현판이 달린 이 一柱文 안 옆 기둥 위 대들보에는 '海東華嚴宗刹'이라는 금으로 쓴

현판이 있고 기둥 양 안쪽에 금강장사의 그림이 생동감 넘치게 그려졌으며, 무지개라도 서린 듯 창연한 단청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山門중 첫 번째 문으로 글자대로  기둥이 한줄로 세워져 있다하여 一柱門이라는것이지요.

또한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一心의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불교의 근본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문을 들어설 때 우리는 미움도 집착할 탐욕도 원한도 모두 버려야 겠지요. 모든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둘이 아니라는 실상(實相)을 잘 알고 선하고 너그러운 본연의 허허로움으로 나를 만나야 합니다.

 

 

 당간지주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버찌가 엄청나게 많이 달려 검게 익었습니다. 어찌나 많은지 가지를 잡아내려 손으로 잡고 그냥 입으로 하모니가를 불었습니다. 입술과 혀가 까맣도록 먹었지요. 세상살이가 달콤한 것만은 아니듯이, 달착지근한 것 씁쓸한 것 새콤한 것 맛도 참 여러 가지더군요. 이 건 탐욕이 결코 아니고요. 하늘이 주신 감미로움을 음미하는 겁니다. ㅎㅎ

이런 맛을 주신  내 좋아하는 하느님, 부처님, 산신님, 성황님, 용왕님, 그리고 조상님 고맙습니다.

 

 

보세요 그 많은 나무마다 이렇습니다. 청정한 곳이라 깨끗하고 나무도 낮고 따 먹기가 참 좋았습니다.

 

 

이 幢竿柱(보물 제255호)는 신라 후기 부석사 창건 때 세운 것으로 압니다. 절의 위치와 동시에 종파의 분별을 나타내거나 큰 법회 때 지주 중간에 竿柱를 만들어 幢을 세웠던 것입니다.

 

 

四天王이 계신 곳 애구, 죄가 많다보니 오금이 저리고 무섭습니다. 살짝 옆으로 비켜가고 싶어요.

四天王門안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셔 놓고 있습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四天王天)에 살면서 제석천왕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지역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지요. 그래서 사바 속세와 경계지간 가까운 곳에 마련한 것이지요. 천상의 수문장이라고 보면 될까요.

따라서 저는 지금 천상(無量壽殿)으로 가는 것이랍니다.

 

 

다문천왕(多聞天王)이십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 중심적 위치에 계신 분이구요. 북쪽을 수호하며 비파를 들고 있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팔부중의 하나인 아귀를 발로 밟고 비파를 퉁기고 있으시네요.

 

 

증장천왕(增長天王) 이십니다.

수미산 남쪽 유리타(琉璃埵)에 살고 있는 천왕으로 남쪽을 수호하며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푸는 신이랍니다. 오른 손에는 용을 쥐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으며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거느리는 권속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는 '富單那'와 아귀의 두목인 '페러다'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광목천왕(廣目天王) 이십니다.
西方을 관장하는 천왕으로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埵)에 살며 서쪽을 수호한답니다.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고,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군요.

 

 

지국천왕(持國天王)인데요,  

지국천을 다스리며, 동방의 세계를 지키는 신이랍니다. 붉은 몸에 天衣를 입고 왼손에는 칼자루을  잡고 오른 손으로는 칼날을 바치고 금방이라도 칠것 같습니다. 불가에서 말하길 오른 손은 대체로 寶珠를 들고 있답니다.

 

 

괜히 무섭기만한 사천왕문을 지나고 보니 진땀이 온몸에 윤활유가 되어 오후의 햇살에 반짝입니다.

 

 

종무소와 삼층석탑과 약수가 있는 곳입니다. 약수로 오장을 정갈하게 씻고 앞을 보니 2층의 웅장한 건물에 '鳳凰山浮石寺'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천상전(無量壽殿)으로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이 탑은 좌측에 있는 종무소 앞에 세워진 통일신라 후기 3층석탑으로 쌍탑입니다. 

二重基壇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無量壽殿의 동쪽에 있는 石塔과 같은 양식입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 줍니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습니다. 윗부분(相輪部)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것은 보충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측의 삼층석탑입니다. 좌측의 탑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장엄한 2층 건물이 천년의 세월로 무겁게 가슴을 누릅니다. 이층에는 法鼓가 어렴풋이 보이는 데, 그 웅장할 소리에 묻혀보고 싶습니다. 누각 아래는 안양문(安養門)으로 가는 길입니다. 입구의 돌계단을 오르면,  누각 밑에 또 돌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지면이 2층의 누각 높이와 대등하여 바로 법고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는 살아 천년이요, 죽어서 천년이라지요. 이 우람하고 잘 생긴 기둥의 고요한 침묵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보니 살아 주절거리는 내 입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올라와 보니 법고(法鼓)· 외에 커다란 목어(木魚)가 있습니다.

목어는 큰 통나무를 겉은 물고기형상으로 조각하고 속은 파낸 것으로 막대기 두개를 양손에 쥐고 안쪽 양편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佛具로,  아침 저녁 예불하기 전에 범종(梵鐘)·과 법고와 운판(雲板) 등과 함께 사용합니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어고(魚鼓)·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보통 잉어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이 목어처럼 얼굴은 용의 얼굴로 표현 한 것도 있습니다.  법고(金鼓) · 범종(梵鐘) . 운판(雲板)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의 하나입니다.


 

 

梵鐘閣이 있군요. 그런데...

 

 

가운데 글자가 ...  鍾(술잔 종) ?

범종각의 종字가 쇠북 종(鐘)이 아니고 술잔 종(鍾)字로 쓰여 있습니다.

범종의 漢字는 鐘으로 쓰는 것이 통례인데,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저편있는 건물은 일반의 통행을 禁하는 군요. 생각으론 스님의 도량처 인것 같습니다.

 

 

 

 

이 건물은 현판()이 세 개가 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에는 安養門이란 현판(板) 이 걸렸고, 그 위 2층에는 浮石寺라고 쓴 편액(扁額)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 계단으로 올라서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있는 곳에서 돌아서 보면 건물위에 安養樓라고 쓴 현판(板)이 걸렸습니다.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는 이 건물은 하나의 건물을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입니다.

安養門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로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安養門)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無量壽殿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安養樓는 극락세계의 누각인 것입니다. 이제야 守門을 거쳐 대문을 지나 중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천상으로 들어서기 전입니다.

 

 

안양문을 들어서니 돌계단 위로 석등이 보입니다.

 

 

어려서  다락방에 올라가 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그 다락방으로 올라가던 그 기분입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安養門은 極樂으로 들어서는 입구이거늘, 보이시지요? 극락인 無量壽殿~~

 

 

안양루 현판이 보이는 이 누각 아래가 안양문입니다. 이 安養樓를 보자니 지난 세월에 만감이 서립니다. 평생을 배우고 익혔고 살아온 세월에 유별히 기억되는 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과 인연이 깊은 분 혜곡 선생입니다.

 

 

국보제17호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일반적인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랍니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地臺石 측면에는 眼象을 2개씩 배치하고 그 위에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바치고 있습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두는 火舍石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菩薩像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꼽히는데 손색이 없습니다. 연꽃 下臺石에 조각된 8엽 복판(겹꽃잎) 연꽃의 첨단부에 귀꽃의 장식무늬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제작 연대는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됩니다.

 

 

< 석등과 장명등>

석등과 장명등은 같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석등과 장명등은 모양에서 차이가 납니다. 장명등은 우선 높이가 낮고 장중합니다. 석등은 높이가 있고 다양한 양식과 문양이 있습니다. 

 (후대에 나온 것은 길고 단순하고 정원에 가등 같은 모양으로 꾸밈용도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석등은 一心의 불을 밝혀 진리의 광명을 선사한다. 즉 부처의 말씀으로 중생의 마음에 진리의 불을 지핀다.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나라에 장명등이 무덤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공민왕 무덤에서 입니다.

이후 조선시대 임금의 무덤에 세우다가 正一品 대신과 삼정승 그리고 내명부의 嬪에게 까지만 허용되던 신분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의미는 석등의 의미가 모방된 것으로 봅니다. 생전의 고인의 인품과 덕망이 백성에게 고루 미친다,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국보1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부석사의 本殿으로 '無量壽殿'이라하며 補處(주불의 양 옆에 모신 보살)없이 화엄도량(華嚴道場)의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있습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柱心包 (기둥머리에 얹은 포)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합니다. 건물 천장부의 아름다움과 장엄함, 기둥의 배흘림의 곡선의 흐름과 외관의 세련된 풍모와 아울러 한국 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고려 顯宗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964-1053)가 중창하였고,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墨書銘에는 恭愍王7년(1358)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2년 (禑王1376)에 다시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 光海君3년(1611)에 석가래를 갈고 단청을 하였으며 1969년에도 보수를 하였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 정토에 있는 부처로서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정토에서 교화하고 있으며, 이 부처를 염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간다고 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를 소조불상이라고 합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높이 2.78m, 광배 높이3.8m)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큽니다. 무량수전 안 서쪽에 마련된 불단에 모셔져 있으며, 다리는 結跏趺座를 하고 손의 모양은 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합니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습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 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팔작지붕이 공작의 날개처럼 아름답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날갯짓을 할 것만 같고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의 곡선이 공작의 배를 닮은 듯 유려합니다. 또한 노란색의 단청도 이채롭습니다.

 

 

무량수전 뒤 서까래의 정연한 멋과 넉넉한 자비로움 처럼 배부른 기둥,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지었을까..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답니다. 의상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화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답니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사는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들어 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와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답니다.

 

 

이 탑(보물249호)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二重基壇위에 3층 몸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입니다.

하층 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初層 몸돌이 높이에 비해 그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입니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 합니다. 

 

 

의상스님을 사모하여 선묘신룡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를 도왔다는 선묘를 모신 閣입니다.

  

 

 선비화가 있는 조사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상큼한 오솔길을 들어서니 서늘합니다.

 

 

조사당(祖師堂) 국보제19호인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입니다. 1916년 수리 중 발견된 묵서명(默書銘)의하면 고려 禑王3년(1377년)이 건립연대로 되어 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조선 成宗21년(1490) 重修하였고, 同王24년(1493) 단청을 하였습니다. 

조사당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상(四天王像)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1916년 수리하면서 떼어내어 지금은 寶藏閣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석사의 제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선비화(禪扉花)

세상에 나무도 잘못한 것이 있나요!  이렇게 철창에 가뒀을까요. 그래도 파랗게 살아있음이 참 신묘합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義湘祖師가 衆生을 위하여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이곳 祖師堂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푸르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에 대한 詩를 짓기도 하였다 합니다. 이 禪扉花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라고 합니다.

 

 

조사당 옆에 있는 건물인데 취현암(醉玄庵)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문을 들어갈 수 없게 폐쇄하였습니다. 외형으로 봐서는 노스님의 거처 같기도 하고...

 

 

조사당을 나와 왼편으로 꺾어 조금 올라가니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란히 남향으로 일곽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應眞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석가모니부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내부에는 석고로 만든 석가 삼존불과 16나한상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보물 제220호 자인당(慈忍堂)으로 응진전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안에는 가운데 석조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좌우의 두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폐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동편의 불상은 나선형의 머리에 상투 모양의 형태가 불분명한데 얼굴은 둥근 편이고 단정한 인상입니다. 눈은 두렷하지는 않지만 미소가 은은합니다. 어깨는 뒤로 젖혀지고 가슴과 배가 편평하게 표현되는 등 신체의 볼륨은 없는 편입니다. 서쪽의 불상은 동쪽 불상과 비슷하지만 신체가 좀 더 풍만하여 부드러운 편입니다.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毘盧자那佛)으로서 당시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양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은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한 부처입니다.

화엄(華嚴) 신앙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은 원래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이기 때문에 형상화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경에 이르러 중국에서 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여래는 표현 형식 규범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러 자세로 만들어졌으나, 밀교(密敎)에 수용되어 대일여래(大日如來)로 불리면서 절대적인 존재로 확립되고 표형 형식도 정해졌습니다. 또 주요한 밀교경전에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 만다라의 주불이 되었습니다. 금강계 대일여래는 지권인(智拳印)-가슴에 올린 왼 주먹에서 둘째손가락만을 세워 오른손으로 거머쥔 수인(手印)을 맺으며, 보살처럼 보관(寶冠)을 쓰고 구슬로 몸을 장식하며 천의를 걸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智拳印을 맺되 항상 여래상으로 표현되었으며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로 불렸습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9세기에 유행하였는데 흔히 독립상으로 봉안되었으나 삼존을 이룰 경우 문수(文殊) 보살과 보현(普賢) 보살이 협시로 채택되었습니다.  

 

 

 담백하지만 말 할 수없이 아름다운 조형과 건축미에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곳에 장인의 손길만 여운으로 남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없고 흔적도 없이 바람만 넘나듭니다. 인생은 잠시 다녀가는 곳이기에..

 

 

돌아서는 길에 바라 본 安養樓! 그 뜻은, 극락에 있는 누각이라고 합니다. 극락이든 천당이든 천상이든 사람에 따라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의미와 뜻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꼭짓점이라는 것에... 누구나 그 꼭짓점을 향해갑니다.

 

 

돌아 보고 다시 이자리에 서니 늘 가슴에 담아 그리던 분이 보이는 듯합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등에 기대서서"> - 최순우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회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중략)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위원장을 지내신 故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熙淳) 선생은 순직하신 그날 까지 박물관에서 50년을 우리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사랑하시고 세계에 그 우수함을 알리는데 혼신을 다하신 분입니다. 가까이서 모셨던 그 분은 천부적 안목과 혜안이 있으셨고 우리의 하늘과 산과 들, 바람과 물 우리 민족의 심성 그 모든 것에 그윽한 눈빛어린 사랑과 자애로움으로 살펴서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실상의 생활에서 그 아름다움이 배어나오는 삶을 세속을 벗어나 탈속의 경지에서 의연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은 조용한 언행과, 그 분이 사시며 가꾸신 성북동 한옥, 크지 않은 집이지만 안방과 대청, 사랑방과 뜰, 그 곳에 놓였던 살림살이 어느 것 하나도 그 자리에 있어도 없는 듯 편안하고 서로 조용하게 잘 아울려 장식을 위함이거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거나 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은 티 하나 없는 상호간의 조화로움이 은은히 흐르는 미풍에 융화되어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잊곤 했습니다.  일찍이 그 분이 깊은 심연의 물을 길어 내시던 자리에 서니 만감에 젖어봅니다. 

<그 분이 사시던 집은, 재개발의 수렁에서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살리기 운동에서 구입하여 시민문화 1호로 "최순우 살던 집" 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무엇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조각, 고운 미소가 담긴 마음이 단풍나무에 걸렸어요.

 

 

달리는 차창으로 이 거리를 애뜻함으로 담아봅니다.

 

 

죽령고개를 향해 그냥 달립니다. 지는 해를 잠시라도 보고 전할 말이 있거든요.

 

 

 태양의 저 아름다운 빛처럼 님의 일상이 늘 곱고 아름답게 물들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저 해를 보며 이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어둠이 밀려듭니다. 배도 고프고요.

 

 

지는 노을이 참으로 곱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를 내게 주신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는 동안 고운 미소가 번지는 빛처럼 늘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09/6/4 仁鄕 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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