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喜는 1786년(正祖10年)에 慶州金氏 집안에서 태어나 1856년(哲宗7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字는 元春, 號는 秋史 또는 阮堂이며 그밖에도 그가 書畵에 사용한 낙관(落款)이 禮堂, 果坡, 東國儒生, 東夷文人 등의 백 수십여 개가 됩니다. 그는 일찌기 열혈 北學派인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15 . 北學議의 著者)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819년에 式年文科에 급제, 규장각 대교(奎章閣 待敎)를 거쳐 벼슬이 吏曹參判에 이르렀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완당은 북학에 뜻을 두고 24세때 冬至副史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燕京에 가서 당대 연경학계의 巨儒인 阮堂 . 옹방망(翁方網) 등과 교유하면서 淸朝 考證學의 衣鉢을 전수하는 등,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歲寒圖》는 秋史(阮堂)가 1840년(憲宗6年)에 尹尙度의 獄事에 관련되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59세때(1819年)의 작품으로서 당시 淸의 연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逸品입니다.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이 권세를 따르는 세속과는 달리 門下의 舊宜를 다하는 데 감격하여 歲寒(겨울에 홀로 푸른 소나무)에 比한 그림입니다. 수묵과 마른 붓질 및 필획의 감각만으로 그려졌으며,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주위에 송백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른편 상단에는 "歲寒圖"라는 畵題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는 글과 관지(款識)가 보입니다. 이처럼 극도로 생략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완당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이며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같습니다. 작가의 농축된 내면 세계에서 비롯된 필선과 먹빛이 풍기는 담백 아담한 분위기는 문인화가가 지향한사의(寫意)와 문기(文氣)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歲寒圖》야 말로 그 畵格이나 고고한 筆意로 보아 조선왕조 오백년의 걸작으로 꼽힐 만합니다.
좌측의 題文은 아래와 같습니다.
완당 김정희 필 세한도 (阮堂金正喜筆歲寒圖)
朝鮮時代 / 金正喜(1786~1856) / 紙本墨畵 縱 69.2cm 橫 23cm /國寶 180號 / (孫昌根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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