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운 그리 늙었다 할 수 없을 해방둥이가 정년 후 15년을 이리 포스팅을 하다보니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과 마우스에 손에 얹고 2시간만 있으면 다리는 저리고 손가락이 전류가 통하는지 찌릿찌릿 하고 붓는데도 이리 흔적을 모아 남기고 있습니다. 글귀는 생각대로 타자해서 그대로 올렸습니다. 사진 분량이 많다보니 끼적인 글귀를 일일이 재검할 여력도 느긋함도 없고 분량에 질려서 그냥 올리다보니 오타나 글귀가 어설픈 것이 많습니다. 보시더라도 혜량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소사원길은 칠원을 거쳐 경기도의 남쪽 끝까지 이어집니다. 새마을운동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던 칠원에서는 물맛이 훌륭하다 하여 인조 임금이 벼슬을 내렸던 옥관자井을 볼 수 있습니다. 봄이면 평택의 자랑인 배꽃이 만발하는 들판을 지나면 대동법시행기념비에서 옛 소사원 자리와 미륵불을 본 후 소사벌을 거쳐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안성천교에 이르게 됩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2021년7월17일 토요일 제9길 진위고을길(17.9km)과 제10길인 소사원길(15.6km)을 합쳐 완주할 생각으로 06시34분 1호선 전철을 타고 오산역에서 하차(08시32분), 맑음터공원을 출발(09시)하여 원균장군묘에 도착(12시10분)하였다. 다시 소사원길로 들어서 팔용저수지를 지나 옥관자井 물맛을 음미하고 통복천을 지나 비전2로 삼거리에서 배다리생태공원으로 가는 부근에서 장대비를 만났다. 덕암산자락 숲에서 상처난 다리를 끌고 더이상 갈수 없어 귀가후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7월25일)에 다시 비전2로 삼거리에서부터 제10 소사원길의 종착점 '대동법시행기념비'와 안성천교까지 탐방을 마쳤다.
(내리 저수지와 원균 장군묘)
내리 저수지 앞 도로에서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방향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길 끝에서 우측으로 갑니다.
원균 장군묘에서 큰길 따라 내려와 가로놓인 도로 우측에 안내판과 이정표말뚝이 나란히 있는 모습입니다. 도로 건너편 평택 브레인시티 공사장 앞에서 길 건너기 전 우측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안내 리본을 확인하고 우측 큰길 따라 도착한 317번 도로 사거리에서 이쪽 저쪽 사방의 모든 길을 오가가며 살펴 봐도 보이지 않는 경기옛길 안내 표시물을 찾아 한 시간을 헤매다 공사장 남쪽으로 둘려진 휀스를 따라가니 송탄동 복지센터와 타이어 대리점, 주유소 등이 있는 다른 큰길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내리버스정류장이 있는 원점으로 가서 이정표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다 평택 브레인시티 조성공사장 남쪽 휀스를 끼고 원곡초등학교 방향으로 오르면 공사장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문이나 길이 있거나 동쪽 공사장 휀스 뒤 산자락에 있을 것 같은 삼남길 이정표를 기대하며 공사장 가림막을 따라가다 보니 공사차량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어 공사장을 가로질러 북쪽 휀스 방향 내리버스정류장으로 갈 생각으로 들어섰는데 넓은 공사장 안 동편 산라락 가깝게 위치한 컨테이너사무실 옆으로 임시포장된 도로가 동쪽 휀스 밖 야산으로 이어져 있어 그리 나가면 원점 내리버스정류장 건너 경기옛길 이정표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포장길 따라 동편 휀스 밖으로 나오니 원, 세상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리본이 저수지 길가에서 나풀거리며 나 찾았냐는 듯이 눈에 들어온다. 삼남길이 내리저수지에서 내려와 도로에서 우측 317번도로 사거리 방향을 가리켰는데 길 건너 휀스 안 공사장으로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어쨌거나 뙤약볕에 땀으로 온몸이 젖었고 다친 무릎이 쓰리고 아팠어도 그나마 길을 찾았으니 다행스러워 안도의 긴 숨 휴우~~
(원균장군묘에서 내려온 길 우측 가로지른 큰 도로가에 세워진 안내판과 이정표말뚝입니다 우측 산자락 끝에 원균 장군의 묘가 보입니다. 안내판 좌측 전신주에는 삼남길 리본이 매달려 있고 푯말 우측에는 원균 장군묘에서 내려온 도로 끝으로 큰길과 ┴形의 삼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청색선은 삼남길 진행 노선이고 붉은 선은 길치가 고생스럽게 헤맨 루트입니다. ㅎㅎ 지금은 웃을 수 있네요. ^^
공사장 안 현장사무실(컨테이너 건물) 앞 좌측 산자락으로 이어진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휀스에 이르니 길 폭만큼 터진 바깥 산자락에 본래에 있던 길로 이어져 있고 연잎이 가득한 저수지가 보입니다. 이름 하여 '팔용 저수지'.
연꽃이 피었더라면 바라보는 내가 참 좋았을 것을 아쉽다.
둑 끝에 자동차와 물가 나무 그늘에 가족이 모여 한여름 무더위를 삭히고 있다.
지나다 보니 연못가에 낚싯대도 늘여 놓았다.
어렵게 찾은 팔용 저수지를 뒤로 하고 갈증을 달래 보려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당상관(옥관자) 벼슬을 받은 우물을 찾아 땡볕도 마다하지 않고 발길을 독촉한다.
물맛이 훌륭하다기에 달려온 옥관자井의 모습에 저으기 실망스럽다. 하기야 세상이 뒤집히고 하루가 멀다고 여기저기 파헤치는 요즘 고즈넉한 옛 우물을 떠올린 내가 불찰이겠다.
옥관자玉貫子는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 종1품 이상의 관원은 환옥 관자이고, 당상 정3품 관원은 조각을 한 옥관자이다.
음용을 해도 될까 싶지만, 그래도 명색이 당상관 벼슬을 받은 물인데 안 마셔 볼 수 없지, 꼭지를 비트니 물이 콸콸 쏟아진다. 빈 물병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물병 가득 채워 배낭 옆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옥관자井 지킴이 인증함에서 꾸욱 인증을 받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오고 가는 곳마다 보이는 건 아파트촌인데 집이 모자란다는 것에 고개가 갸웃거린다.
도무지 낯설고 이름 모를 곳이다. 차를 타고 한 번이라도 지나쳐 본 적 있을까 싶다. 그러니 새롭고 옛길에 더욱 끌린다.
지하도로 들어서면 그럴듯한 하천길이겠다 싶어 내심 즐거웠던 곳이었지요.
지명도 모르고 이름도 모를 아파트촌 외곽 시원스럽게 말끔한 도로를 따라 걷노라니 기분은 더없이 상큼하다.
그저 바람에 춤을 추는 리본 따라가는 발걸음 여기가 경기옛길에서 말하는 통복천인가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알아보기도 싶지 않네. 반가운 잡초와 반기는 내가 있을 뿐..
황순원님의 '소나기'에 나오는 고즈넉하고 자연스러운 징검다리에는 못 미치겠고 병약하고 가녀린 윤 초시 손녀도 떠올려 볼 수는 없어도 징검다리 그 자체만으로 내 어린 시절의 동심을 상기하며 건너야겠다.
통복천징검다리 건너 좌측으로 오릅니다.
푸른 들판에 기라성 같은 건물들이 야금야금 좀 먹듯 저 싱그러운 남은 들판마저도 깡그리 잠식하리라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뜨거운 아황산열기에 생명은 시들어가리.. 그런데 저 많은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경제 기반은 갖추고 있는 곳인지.. 괜한 걱정을 하면서 길 갑니다.
발길은 점점 푸른 초원의 즐거움을 뒤로한 채 달갑지 않은 답답한 도심을 향하고 있네.
현대 주유소 옆 골목을 빠져나가면 좌측으로 간다하던데..
주유소 좌측 진행할 방향의 정경입니다. 길치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이 넓은 길 어디서 리본을 찾지?
보이는 로터리에서 황단보도를 건너서 우측 도로 비전2로(소사벌지구)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수제갈비 냉면 집 앞 샛길로 갑니다. 2번째 찾아와서 익힌 실력입니다. ㅎㅎ
앞 횡단보도를 건너 가든 저쪽 횡단보도를 건너가든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곳을 지나 샛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차들이 주차된 안쪽 샛길로 들어섭니다.
아파트 건물이 끝나는 곳까지 갑니다.
그물망 친 밭 끝머리에서 우측 산길로 들어섭니다.
나무숲으로 들어서는 삼남길입니다. 이 길은 '배다리생태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입니다.
산책하기 좋은 숲길 좌측으로 갑니다. 우측은 성당과 아파트로 들어서는 길입니다.
둘이 산책해도 좋지만, 심지 깊은 짝지가 아니라면 혼자이면 더욱 좋습니다.
소담스런 광장을 가로질러 갑니다.
길을 둘이가면 벗은 하나지만, 혼자가면, 풀 나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말벗이 되고 친구가 됩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숲은 '당산근린공원'이라는군요. 앞으로 갈 곳은 배나무근린공원이구요. 이렇게 또 배웁니다.
지대가 자못 낮다 할 수 없는 곳인데 저수지가 있습니다. 하기야 山上의 호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 물의 문제는 맑아 보이는 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겁니다.
지나온 길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공원조성은 잘 되었는데.. 흐르는 물이 맑아 보이지만 오수를 정화시킨 물인지 역한 냄새가 납니다. 곤충이나 양서류가 뛰어 들까봐 염려도 됩니다.
높지 않은 능선에 흘리는 물은 비탈진 지형에 따른 그 흐름이 빠릅니다.
서울 방향으로 뒤돌아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볼수록 아쉬운 건 이 무더위에 아이들이 들어가 놀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수 입니다. 내 어린 시절 환경에 비교하면 흐르는 물도 땅도 중병을 앓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생활수와 산업폐수를 거리낌 없이 하천으로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 물을 다시 우리가 먹는데도 말입니다.
공원 정상부에 돌탑의 형태가 돌무지 무덤을 떠올리게 합니다.
좌측 철조망 휀스 밖으로 평택세무소가 보입니다.
이리가나 저리가나 길은 만나지요. 바로 가봅니다.
갈렸던 길들은 모두 광장으로 모였네요.
여러 길에서 나무에 그려진 경기옛길 로고를 찾아 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법 작지 않은 저수지인데 냄새가 없지 않습니다.
배다리생태공원 앞 광장입니다.
배다리공원 앞 사거리에서 양 편 아파트 사이의 소사로 우측 동부근린공원 쪽 길로 건너갑니다.
배다리생태공원에서 두 번에 걸쳐 건너온 황단보도 앞에서 친절하게 길 안내해주는 이정표 선생을 뵌 곳은 동부공원 초입이기도 끝머리이기도 한 곳입니다.
걸어가는 우측은 동부근린공원입니다. 공원 안 길로 가도 되는데 리본이 보이지 않아 초행길에 길 헤맬 가봐 리본 따라 인도로 갑니다.
공원 전 사거리의 정경입니다. 로터리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숲이 동부공원입니다.
우측은 동부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소사동방향으로 갑니다. 도로표시판에 고동색 바탕에 흰 글씨 '대동법시행기념비' 안내글이 보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우측 횡단보도 건너 '치유하는 교회' 옆 샛길로 내려갑니다.
이 길로 들어서면 100m이내에 대동법시행기념비가 반깁니다.
50m 정도 거리 큰 나무 숲에 비각이 있습니다.
삼남길 전 구간을 종결하는 마지막 인증함이 있는 곳입니다.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 / 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
이수(螭首) 바로 밑 碑身 상단 위에 큰 글씨를 橫으로 새겨 놓은 머리글입니다.
이 비는 조선시대 대동법 시행에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운 김육(金堉1580-1658)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호서지방 백성들이 효종 10년(1659)에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건립한 것입니다. 대동법은 공납을 특산물 대신에 쌀과 무명으로 납부하는 제도로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후 100여년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김육은 인조 16년(1638)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대동법 시행을 건의 하였으며, 효종2년(1651) 영의정에 오른 후 충청도 지역에서 대동법이 시행되게 하였다.
비는 귀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췄으며 비문은 홍문관부제학 이민구(李敏敍) 짓고(作文), 의정부우참찬 오 준 (吳 葰)이 글씨(書)를 썼습니다.
이 비는 이곳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 대에 이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합니다.
동판에 새겨진 글은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 / 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의 비문을 지금은 고인이신 당대(1970 - 1990년) 최고의 한학자이셨던 임창순 님께서 영의정 김육 선생이 호서지방에서 실시한 '대동균역법'을 실시한 '공적비문'을 역술한 것을 동판에 새겨놓은 것입니다. 읽어보기가 쉽지 않아 아래에 옮겨봅니다.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이 대동균역大同均役법을 실시한 공적비〉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실시한 세납과 공물 징수의 방법은 모두 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하는 기준을 두었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양곡을 뭇(末) 단위로 정하여 열 물을 한 짐(負), 백 짐을 한 결(結)이라 하였다. 종래의 납세제도는 토지세와 공물의 댓가를 모두 결에 따라서 쌀과 무명으로 책정하여 징수하였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과중하지 않게 거두어들이고 절제 있게 지출한다면 옛날 제도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토산물인 공물을 쌀과 베로 징수한 때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자의 댓가와 이를 징수하기 위한 출장비까지 계산하여 받아가서 당초에 책정한 액수보다 몇 갑절이 넘는 부담을 지게 되므로 백성의 고통은 더욱 심해 갔다.
宣祖41년(1608년)에 文忠公 李元翼(일명 오리대감)이 처음으로 大同法을 창설하여 경기도에서 이 법을 실시하여 경기도민이 혜택을 입었다. 이십 년 뒤인 1627년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완평군의 취지에 의거하여 도 전체의 토지 실태를 조사하고 이에 납세액을 조정하여 조세를 일원화시키는 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실시하지는 못하고 장부만 정리하여 두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638년에 김 공 육(金堉)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 장부를 꺼내어 보고 "백성을 살릴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하고 자고 먹는 것을 잊어가면서 밤낮으로 고심 연구하여 이 법을 실시하기 위한 세밀한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다시 중앙정부에 들어갔는데 얼마 안 되어 지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 公은 특별히 등용되어 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공은 정사를 논의하는 여가에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임금께서는 이 정책에 대한 이해관계를 밝게 통찰하시고 모든 실시계획을 공에게 일임하셨다.
公(김육)은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새로 관청을 설치하고 명칭을 大同廳이라 하고 연성군 이시방(延城公 李時昉)도 이 사무에 참여하였다. 그 제도의 내공은 한 도의 인구 총수를 파악하여 각 군의 대소를 막론하고 토지의 결수結數에 준하여 한 결(一結)에 대하여 쌀 열 말(十末)씩을 징수하여 배를 이용하여 강으로 수송하고 산간과 해변지역에서는 쌀 대신 무명으로 징수하여 모두 서울에 수송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궁중 사용하는 물품이나 종묘의 제사, 빈객 접대 등에 쓰이는 것을 위시하여 말먹이 여물 땔나무 같은 세미한 것까지도 모두 이것을 가지고 충당하게 되었다.
관청에서는 시기에 따라 부과액을 늘리거나 줄이는데 고심할 필요가 없고 아전들이 수납할 때에 농간이나 협잡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과세의 책정에 변경이 없고 일정한 액수로 고정이 되어서 백성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봄, 가을 두 철에 바칠 것만 바치고 나면 나머지 것으로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문충공이 제도를 창안했으나 일부 지역에서만 시험한 것뿐이었고, 길천공은 계획만 세우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을 김公과 이 판서가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위대한 업적을 새웠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이 있었지만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더욱 치밀한 계획과 확고한 신념으로 백성들의 시급한 고통을 풀어주고 한 지역의 안정한 정책을 수립하였다.
김 공의 강한 집념과 임금의 밝으신 판단이 서로 합치되어 영원불멸의 업적을 남기었으니 어찌 기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하여 이 기념비를 큰 길가에 세워서 김 공의 위덕을 칭송하려 하는 것이 충청도민 전체의 뜻이다.
김 공의 자는 伯厚, 본관은 淸風, 벼슬은 右議政에 이르렀다.
원비 조선 孝宗 十年(1659년) 4월 전임 홍문관 부제학 이민서(李敏敍) 지음, 의정부 우참찬 오 준(吳 葰) 書글씨.
1980년 10월 문화재위원 임창순 역술.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 / 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
비 뒷면과 좌우측은 새겨진 글자가 없습니다.
두껍고 견실한 등갑 밖으로 내민 얼굴(龜面)은 왕방울 같은 눈에 혀를 살짝 내문 양 입술에는 자못 날카로운 이빨 3개 씩 표현되었습니다. 前面에서 본 느낌은 섬세하고 세밀한 맛은 없으나 투박하지만 순박하고 우직해 보인다하겠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발가락이 얼굴과 몸체에 비해 재밌습니다.
옆 모습은 입꼬리에 서기가 표현되고 얼굴에 잘 맞춘 귀와 머리에 뿔이 양각되어있는데 표현과 균형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앞면과는 다르게 아주 잘 생긴 옆 얼굴입니다. 몸 등갑 가운데 비받침돌 앞 뒤로 등골이 양각된 귀갑문이 표현되고 비 받침돌 아래 물결무늬를 새겼습니다. 귀갑 밑으로는 네 다리가 잘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머리와 몸통과 다리의 비율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조각품입니다.
등뼈를 이어져 내려온 든실한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져 있습니다.
기념비와 마주하고 있는 풍경, 좌측에는 기념비를 해독한 글을 새긴 동판이 있고 전면에는 경기옛길 인증함이 기념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좌로부터(작은 비석)
선정비 군수 李觀九
불망비 안성군수 尹英烈.
영세불망비 郡守 李源喆,
영세불망비 郡守 李重哲,
〈소사/素沙〉
이 마을은 高句麗 때 사복홀沙伏忽,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적성赤城, 조선 태종13년(1415) 양성현陽城縣 금통면今通面에 속했던 마을로서 평평하고 넓은 들이어서 소사素沙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어귀로 부터 시작되는 소사평素沙坪은 포십면浦什面까지 백리길이 되어 이 마을 이름은 소사평의 소사를 따서 지은 것이다. 평택시 1994. 12
대동법시행기념비에서 고개를 넘어서면 보이는 좌측 골목으로 돌미륵을 보기위해 들어섭니다.
세 번째 집 옆 대나무 숲 뒤에 돌미륵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연로하신 분이 관리를 했다는데,
지금은 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방치되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옆집주인의 귀띔입니다.
이 돌미륵을 찾기위해 3번을 찾아와서야 운 좋게 대동법시행기념비 앞 카페 주인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숨어 있듯 대나무 숲 뒤에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약 2m 높이의 이 미륵불입상의 화강암의 재질로 머리와 몸체가 잘린 것을 다시 합치한 것으로서 두상은 타원형으로 왼쪽 귀 부분만 조금 불거진 외에는 윤곽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두손은 희미한 흔적으로 보건대 복부아래 포겐 형태이며 머리 위에는 화강암이 아닌 흑회색 사암으로 마치 고려시대의 탑의 옥개석을 뒤집어 옥개받침이 위로 향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그 위에 몸체와 같은 성질의 화강석 돌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 부처상은 체형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해 봅니다.
머리 위 방형의 돌은 위 모양이 옥개받침이 표현 되어 있고 방형의 홈이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탑의 옥개석을 뒤집어 올린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이 불상의 지대석은 한 장의 방형의 판석 가운데를 파내고 안치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돌미륵은 대나무 숲 뒤에 숨어 있어 소사평을 세 번째 와서야 대동법시행기념비 앞 집 카페 주인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돌미륵을 탐방 후 다시 골목 입구로 나와 소사1교를 건너 우측으로 갑니다.
갈림길에서 좌측 벌판길로 들어섭니다.
벌판마을로 들어섭니다.
벌판길을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갑니다.
마을을 관통하는 길 따라갑니다.
우측 '유천1동마을회관' 앞에서 좌측 농수로 옆 농로로 들어섭니다.
수로를 따라가면 저만치 보이는 건물 뒤편 안성천둑길로 이어집니다.
휘어진 길 끝머리 첫 번째 2층 건물을 지나 큰 건물(유천정수장)'을 향해 갑니다.
안성천둑 옆에 위치한 '평택유천정수장'
정수장 앞 둑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둑 위에 서쪽 방향을 가리키는 빨간 삼남길 이정표가 보입니다.
안성천 둑길입니다. 좌측 건물은 정수장입니다. 끝도 없을 것만 같은 평택 소사벌 동쪽입니다. 목적지 안성천교는 이 길의 반대편 서쪽으로 가야 있습니다.
안성천과 그 건너편 벌판의 정경입니다.
드디어 좌측에 안성천교가 보입니다.
경기옛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그 지역을 소개하는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판이 있고 많은 유적이나 문화를 볼 수 있어 인문학여행을 곁들여 건강을 다질 수 있는 보람찬 길입니다.
삼남길 易시발지이자 종착지 알림판입니다.
끝으로 아쉽게도 소사벌에 있다는 돌미륵을 찾아보지 못했기에 조만간 다친 무릎이 치유되면 다시 소사들 돌미륵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삼남길 10개 코스의 중 마지막 제10 소사원길의 종착지 안성천교의 모습입니다.
안성천교 중간에서 바라본 안성천 풍경입니다. 좌측에 제법 큰 건물은 '평택유천정수장' 입니다.
안성천교 중간에서 다시 평택으로 향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7월 25일 일요일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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