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출발하여 2시간을 달려 동해시 국립공원 두타산무릉계곡관리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08시50분 차를 주차하고 매표소를 통과 산행을 시작한 시각은 09시05분, 무릉관리사무소-<2.1km/(1시간20분소요)10시25분>-두타산성-<4km/(3시간20분소요)13시45분>-두타산정상-<2.3km(1시간10분소요)14시55분>-박달령-<3.2km(1시간15분소요)16시20분>-박달계곡-<2.8km(2시간00분소요)18시29분-무릉관리사무소. 총14.4km / 9시간 소요. (사진280장 촬영시간 포함)
《두타산/頭陀山》
속세의 번뇌를 떨치고 불도 수행을 닦는다는 이름을 가질 만큼 기묘한 바위 절벽에 소나무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깊은 계곡을 이룬 두타산은 태백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동서간에 분수령을 이루고 있습니다. 북서쪽으로는 청옥산(靑玉山, 1,404m), 중봉산(中峯山, 1,259m) 등을 연결하는 험준한 준령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이 두타산에 이르러 한 줄기는 북쪽으로 두타산성 줄기를 이루고, 또 한 지맥은 동쪽으로 뻗어 50개의 구덩이가 바위 위에 형성되어 빗물이 고이면 마치 우물 같아 유래된 쉰움산[五十井山]에서 배수고개로 이어지는 두타산은 대부분 화강암에 석회석 및 사암이 주변에 분포하고 선캄브리아기 편마암이 높은 산지 능선을 이루고 있어 기암과 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릉계곡의 화강암 지역은 급사면인 수직 절리로 인하여 절벽과 폭포 등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거의 연결된 쌍봉을 이루고 있으나 그 모습은 전혀 다른 형상을 보여줍니다. 두타산은 정상부가 첨봉(尖峯)을 이루고 주변은 급사면이어서 날렵한 산세로 남성적이라면 청옥산은 완만하고 후덕스런 모습에서 수더분한 여인과 같습니다.
두타산은 3개의 溪流를 이루는데, 하나는 북동 사면의 하천으로 박달골 계류와 사원터士院基골 계류가 모여 무릉계武陵溪를 형성하고, 살내箭川가 되어 동해시를 거쳐 동해로 흘러듭니다.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은 골지천骨只川과 합류해서 한강 상류가 되며, 또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계류는 오십천五十川과 합류됩니다. 산이 깊고 험준하기 때문인지 식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산정 부근에는 관목대와 초본대가 형성되어 고산식물의 군락이 있고 철쭉·만병초·조릿대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관리소 옆 계류에 놓인 이 다리를 건너 감으로서 자연의 한 미물로 초목과 물과 바람과 바위와 하나로 승화되는 신선의 경지로 들어설 마음의 채비를 갖춘다.
수많은 나무와 수많은 풀과 움직이는 생명들을 잉태하고 탄생하여 보듬고 키우는 웅장한 이 산세는 어머니와 같고 보시하는 마음이니 頭陀요 하늘의 뜻이 웅집한 자연이 아니겠는가!
<무릉반석 암각서/武陵磐石 岩刻書>
무릉계곡을 들어서면 넓은 암반으로 된 계곡바닥에 가로로 써 새긴 힘차고 웅장한 글씨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玉壺居士書辛未' 가 陰刻書되어 있는데, 신미년에 옥호거사라는 사람이 썼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에서,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 또는 불교를,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의미한다. 이 글씨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년에 광천(비천)〉에 문상 왔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고도 하고, 또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썼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 末尾에 옥호거사란 필명이 새겨져 있는 만큼 옥호자의 글씨로 보아야겠지요. 이 모형석각은 동해시에서 오랜 세파에 글자가 마모되어 희미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보존하기 위해 1995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금란정/金蘭亭>
대한제국 光武7년(1903년) 당시대 삼척지방 유림재생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玄學을 講磨하고 예의를 존중하며 봄과 가을의 정취를 읊고 즐겼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폐강되었고 이를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金蘭契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亭閣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고, 그 후 당시 계원들은 선배 계원들의 뜻을 받들어 1947년 북평동 단봉 석경지에 금란정을 건립한 것을 1958년 이곳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무릉반석/武陵盤石>
석장 또는 석장암으로 부르기도 하였던 무릉반석은그 넓이가 5천㎡나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석위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 등이 음각해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보이고 금란계원들의 명단을 새겨놓은 것이 여럿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계각층으로 契모임이 활발했습니다. 양반은 양반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관리는 계급과 품격대로 친목을 통하여 상호간 지식과 정보 등을 나누고 협력하였습니다.

암반위로 흐르는 청정옥수는 하늘과 무릉계곡 주변풍경을 품어 안고 굴곡진 높낮이 따라 휘휘 감돌아 끝없는 길 떠나고 있습니다.
무릉계곡 아래쪽 풍경.
무릉계곡 길가 안내판에 게시된 무릉계(武陵溪)그림은
『 金剛全圖 全 五帖 중 第三帖 (十二幅) <25~36>』「 《와선대(臥仙臺)》《계조굴(繼祖窟)》《가학정(駕鶴亭)》《현종암(懸鍾巖)》《무릉계(武陵溪)》《대호정(帶湖亭)》《해산정(海山亭)》《해금강 전면(海金剛前面)》《해금강 후면(海金剛後面)》《치폭(馳瀑)》《만물초(萬物草)》《환선정(喚仙亭)》」중에서 제29폭 '무릉계'입니다.
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畵帖《금강사군첩(金剛四群帖)》은 1帖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으로 오동나무판을 겉표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겉표지에 「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되어있을 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제화시(題畵詩) 등은 일체 없고 각 폭 그림마다 해당 진경(眞景)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이는 단원 글씨는 아닙니다. 이 화첩은 본래 70폭이었다고 하는데 근년(近年)에 10폭이 흩어지고 60폭만이 다시 5첩으로 꾸며진 모양입니다. 흩어진 10폭은 다음과 같습니다.
1.청허루(淸虛樓), 2. 천연정(天然亭), 3. 영랑호(永郞湖), 4. 단발령(斷髮嶺), 5. 정양사(正陽寺), 6. 만폭동(萬瀑洞), 7. 신계사(神溪寺), 8. 옥류동(玉流洞), 9. 외선담(外船潭), 10. 유점사(楡岾寺).입니다.
본래 이 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의 해산승경(海山勝景)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니던 화첩인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서영명위장해산화권(書永明尉藏海山畵卷)」(『淵泉集』권20)과「 제단원해산첩(題檀園海山帖)」칠십수 선이십삼(七十首 選二十三) (『淵泉集』권4) 및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1786~1841)의 「 제해산첩후(題海山帖後)」(『삼롱을참(糂礱乙懺)권5)등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화첩이 정조대왕의 유일한 부마도위(駙馬都尉)이던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1793~1865)가 지녔던(舊藏)것이며, 그 정조 어람본(御覽本) 해산첩(海山帖)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연천(淵泉)과 항해(沆瀣)는 영명위의 형(伯仲氏)들로 이들이 남긴 윗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정조임금이 단원에게 관동의 海山 승경을 그려 오게 하자 단원은 왕명을 받들어 70폭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되고 정조는 이를 5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왕실 內部에 비장합니다. 그 뒤 순조 9년(1809년)에 순조가 이 화첩을 매제인 영명위에게 하사하게 되고 영명위는 3년 뒤인 순조12년(1812년)에 맏형(伯氏)에게 부탁하여 그 서문을 짓게 하였으며, 다시 9년 뒤인 순조21년(1821년)에는 연천이 매 폭 마다 제화시를 지으니 70수에 이르렀었습니다. 이 글들을 화첩 속에 미쳐 써넣지 않고 있다가 다시 8년 뒤인 순조29년(1829년)에 영명위는 둘째형(仲氏)인 항해에게 부탁하여 이를 정서하여 화첩에 넣게 하고 그 전말을 밝히는 후기(後記)를 붙이도록 합니다.'
이런 내력을 가진 화첩이라면 응당 연천 형제들의 서문이나 발문은 물론 연천의 70수 제화시가 이 화첩에 합장(合裝)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금강전도첩'은 이런 것들이 하나도 합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화첩이 곧 영명위가 지녔던 화첩이자 정조어람첩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합니다. 10폭의 그림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런 글씨들이 분리될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분리시켜 영명위 구장(舊藏)이거나 정조 어람본이라는 증거를 인멸할 이유가 없으니 이 역시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금강전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원 특유의 산수기법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경산수화첩>을 일단 《해산첩(海山帖)》의 원형으로 보고 다른 문제들은 장차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의 「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표암유고 「豹庵遺稿」권4)에 의하면, 이 《해산첩(海山帖)》은 정조12년(1788년) 戊申 가을에 단원이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관동9郡을 편답하면서 그려 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76세인 표암이 44세의 단원을 그의 큰 자제인 강인(姜 寅) 이 부사(府使)로 와 있는 회양에서 만나 9월13일부터 17일까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생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5첩으로 꾸며진 이 '금강전도'는 10폭이 흩어질 때 장첩(裝帖)도 일부 교란된 듯 편답 순서가 곳곳에서 뒤바뀌어 있습니다. 연천이 읊었다는 제화시는 23수만 "연천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남은 시들을 찾아내는 일도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第 29 幅 《무릉계(武陵溪)》 朝鮮時代 / 金弘道 1748年(44歲)作 / 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頭陀山三和寺>
<용오름 길>
용오름 길은 삼화동 초입에서 시작하여 용추폭포에 이르는 6km에 이르는 무릉계곡을 말합니다. 옛 서적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 당시 藥師三佛 伯, 仲, 季 삼형제가 처음 西域에서 동해로 龍을 타고 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때 맏형은 黑蓮을 가지고 흑련臺에, 둘째는 靑蓮을 가지고 청련臺에, 막내는 金蓮을 가지고 금련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龍이 약사삼불을 등에 태우고 오르던 길이 용오름 길입니다.
이 길의 地質은 대부분 학술적 가치가 높은 화강암 침식 및 퇴적암으로 두타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용오름 길을 따라 北東 방향으로 흘러서 동해시 진천으로 유입되어 동해로 들어갑니다. 용오름 길의 정점인 용추폭포는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계곡은 맑고 깊으며 산림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계류가 흐르는 암반에 검은 띠가 있어 용오름 길이라는 전설이 성립된 것은 아닌지 나름 생각을 가져봅니다.
삼화사 이르기 전의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위에서 용추폭포 쪽으로 담은 풍경입니다. 계곡의 암반에 검은 띠선이 보입니다.
삼화사 이르기 전에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위에서 옥류동을 담은 풍경입니다.
三和寺 담 외벽에 줄지어 서 있는 十二支 神像의 모습입니다. 子에서 亥까지.
12支 중 여섯째 천간09~11시 방향 巳, 짝지는 '蛇'
12支 중 열째 천간 17~19시 방향 酉, '鳳鷄'
12지 띠 가운데 유독 두 발에 날개를 가진 것은 닭이 유일합니다. 또한 수많은 날짐승 중에 고상하다는 학(鶴)도 아니요. 용맹스런 수리(鷲)나 매(鷹)도 아니요.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봉황도 아닌 닭이 하늘을 나는 금(禽)의 대표 격으로 낮이 저물고 밤이 스며드는 초저녁 녘의 중한(幕重) 시각을 지키며, 또한 모든 귀신을 물리치고 새벽을 맞는 之神의 자리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벼슬(官職), 공명(功名), 벽사(酸邪)>등의 의미가 있는 닭띠, 그 수탉이 서 있는 것은 집 안에 길한 운세가 일 년 내내 가득하기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밝음을 예고하는 새로 신조(神鳥)로 생각했으며, 새벽에는 귀신을 쫓는 대길(大吉)의 새로 여겼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옛사람들은 새해를 맞을 때 온 집안의 재앙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호랑이, 용, 닭 등의 세화(歲畵)를 대문에 붙였습니다.
이렇듯 닭 그림이 백수의 왕이라고 하는 호랑이나 신령스러운 동물인 용과 함께 세화(歲畵)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어둠이 걷히고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온갖 귀신들이 물러난다. 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옛사람들은 새벽이 밝는다는 것을 닭의 울음소리로 알았고 귀신도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옛사람은 또한 닭이 오덕(五德)을 갖추었다고 여겼습니다. 머리에 관을 썼으니 문(文)이고, 발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으니 무(武)이고, 적을 보면 물러서지 않고 싸우니 용(勇)이고, 먹을 것을 보면 서로 부르니 인(仁)이고,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니 신(信)이라 했습니다. 머리의 관(冠)이라 함은 닭의 볏을 은유한 것으로, 관을 썼다는 것은 관직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닭은 벼슬길에 나아감을 기원하는 의미의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지금까지도 닭의 볏을 닭 벼슬이라 부르는 사투리가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수탉은 웅계(雄鷄)라 하여 영웅을 상징하며 수탉의 울음소리를 공계명(公鷄鳴)이라 하여 부귀공명의 공명(功名 :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과 같은 의미로 파악했습니다. 닭과 함께 맨드라미를 그리기도 하는데, 이를 관상가관(冠上加冠 : 관 위에 관을 더함)이라 하여 입신출세의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길상적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맨드라미 역시 그 모양이 닭의 볏과 같기 때문입니다.
병아리를 돌보는 닭 그림 또한 여러 점 전하는데, 이러한 그림은 닭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자식들을 잘 키워 출세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듯 옛날부터 닭은 신성시 되었으며 상서로움의 길상동물로 전해오는 것입니다. 봉황새나 주작 또한 닭을 根源으로 하여 여러 동물의 특정한 부위를 조합하여 탄생시킨 상상의 동물입니다. "어째 닭만 세세하게 기술하는냐고요? 제가 乙酉生이요 鷄입니다. ㅎ"
<三和寺 寂光殿>
삼화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능선의 한 모습 .
삼화사 적광전 뒤 봉우리의 모습.
여기에 게시된 사진은 제7코스인 (1-1)~(1-17)번 두타산 코스를 타고 박달령코스(2-10)~(2-1)로 하산한 풍경이자 8시간 산행기록입니다.
<학소대/鶴巢臺>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학소대입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아 물기조차 볼 수 없습니다. 비라도 내렸다면 좋았을 경관입니다.
武陵亭公 崔潤祥이라는 사람의 '무릉구곡가' 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 떠난지 이미 오래되어 臺는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무릉계곡관리사무소에서 600m 정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계곡에는 검고 큰 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이 경쾌한 음률을 타고 흐릅니다.
큰 암반을 타고 내리는 폭포도 장관이겠지만, 작은 바위에 거울처럼 흐르는 물결에 내비친 아담한 암반의 표면이 세모시에 내비치는 뽀얀 살결처럼 곱습니다.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왼쪽 가파른 산으로 오르면 두타산성(500m)을 거쳐 두타산 정상(4.5km)으로 오르는 길이요, 계속 앞으로 가면 쌍폭포(900m)와 용추폭포(1km)가 있고 박달령(3.95km)과 청옥산(5.1km) 연칠성령(5.1km)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나는 두타산성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죽어서 수피가 다 떨어져 나간 나무의 모습이 실을 모아 틀어 꼰 타래처럼 경이롭습니다. 모진 풍파에 꺾이지 않고 견디기 위한 삶의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가파른 바위로 이루어진 이곳에 자생하는 나무들은 물푸레, 박달, 참나무 등 단단한 樹種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탈진 바위에 단단한 나무로 사다리모양의 틀을 짜놓고 칸 안에 돌을 채워 밟고 오르기에 수월하도록 설치한 것에서 강원도 산골마을의 소박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정감이 솟습니다.
두타산성 인근입니다. 웅장한 준령들이 그래프를 그리고 있습니다.
잿빛 석회암이 수직으로 절리 되어 이룬 기암들이 다투어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바위와 소나무는 각별한 사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멋진 바위에는 그에 맞는 近似한 소나무가 반드시 있거든요.
두타산성에 이르기 전 까지는 거의 보이지 않던 소나무들이 기암괴석이 죽순처럼 솟아 있는 이곳에 준수하게 멋진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무리지어 기묘하게 틀어지고 뻗은 절지를 뽐내고 있습니다.
두타산성 주변의 모습입니다. 소나무는 기암을 알아보고 기암은 소나무를 끌어 들입니다.
<백곰바위> 두타산성 화강암지대에 돋아 있는 바위의 형상이 머리를 옆으로 돌린 백곰의 뒷모습을 빼어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백곰바위' 백곰은 재물과 권력을 상징한다니 고목에 꽃이 피듯 老耉의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암반의 저 소나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서늘한 석간수를 먹고 살아 저리도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나보다.
흰 화강암 위에 균형잡힌 몸매로 당당하고 도도한 소나무 한그루...
이 높고 아슬아슬한 절벽에 왜 성을 쌓아야만 했을까.. 암반위에 옛 사람의 손길 닿은 산성의 잔해를 보는 가슴에 애틋함이 스며든다.
오르며 흘린 땀방울 손수건에 흥건했는데 모두 바람에 보시했나봐 홀가분한 손수건 나풀나풀 춤을 춘다.
이제 겨우 2km 정도 와서는 한 경관에 넋 놓고 있는 마음 추스르고 길 떠날 채비를 합니다.
《두타산성 / 頭陀山成》
삼국유사에 의하면 두타산성은 신라 제5대 파사(婆娑) 이사금(尼師今↔王)23년(102년)에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安康, 또는 蔚津)과 실직곡국(悉直谷國:지금의 三陟)사이의 영토 분쟁을 가야국 김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해 준 뒤에 다시 움직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는데 이 때 쌓은 城으로 보입니다. 이후 조선 태종 14년(1414년) 삼척부사로 부임한 金孟孫이 다시 둘레 2.5km, 높이15m 규모로 쌓았습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처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이 산성으로 피난하였고 이 고장 청년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산성 밑에 허수아비를 절벽사이마다 세워놓는 위장전술을 써서 왜군으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였으나 이어 다시 벌어진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끝내 함락되어 피난민과 의병들이 장렬하게 전사한 거룩한 호국정신이 깃든 유서 깊은 산성입니다.
성벽 옆 등산로 나뭇가지에 메달아 놓은 수많은 산악회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는데 호국과 안위를 위해 수성을 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신 선조들의 넋을 위로할 양 달아놓은 만장 같다는 생각에 눈길이 머뭅니다.
두고 온 자리가 못내 아쉬워 돌아보니 어느새 다른 이 그 자리에서 넋 놓고 서서 얼레의 연실 풀어 연 날리듯 감성을 풀고 섰네.
이곳 두타성벽은 자연으로 형성된 바위 경사면의 윗부분에 올려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구조는 내외협축(內外夾築 : 흔히 산에서 보는 돌탑 쌓은 방식)의 형식을 취해 축조되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나와의 고행이지만 지나면 기쁨보다 한 끗 높은 행복입니다.
온통 바위산에 길조차 바위돌인데 어떻게 이리 많은 나무들이 살 수 있는 것인지.. 모두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바위는 풍화로 마사를 만들고 나무는 이파리를 섞어 부엽토를 만들어 일궈낸 결실이리라.
길가 옆 샛길 앞에 서있는 푯말의 손길을 외면할 수 없지요.
보아하니 그 이름 거북바위. 널 보았으니 나도 너만큼 건강하게 장수하는 거 맞지? 옆에 있던 소나무도 요염하게 몸을 꼬며 내 눈길을 붙잡으며 말하네. '나도 십장생 중 한 몸이야!'
한걸음 내려서서 옆 골짜기를 보니 숨었던 12폭 치마를 걷어낸 고쟁이 사이로 깊고 깊은 여인의 속살이 보시시 드러나는구나!
물이라도 넉넉 했으면 더욱 좋았으리..
바위는 보고 보아도 나는 싫지 않더라. 심심하지도 않더라..
날카로운 저 바위들 한 성깔 하련만, 보듬고 감싼 저 나무들 덕성스러움에 한가지로 보기에 아름답다.
다시 발길을 다잡고 가는데 조만치 뭔가 나를 기다리고 섰다오.
아니나 다를까 이정표 선생이 잠시 목 좀 축이고 가라 하시네. 바위틈에서 틀어 논 수돗물처럼 석간수가 쏟아지나 보다. 어깨가 처지도록 배낭에 담긴 건 물 뿐 갈 길이 바쁘니 다음에 뵙지요.
이런 곳은 한여름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저승으로 가는 지름길이 십상이지..
푯말을 보니 두타산으로 가는 길이 둘인데, 宮闕址를 거쳐서 가면 4km, 바로 가면 3.5km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궐 터를 둘러보고 싶은데 이제까지 온 약 2.6km의 어려움으로 보아 500m라고 쉽게 볼 일이 아니고 앞으로 가파른 오르내림이 10km가 넘으니 그냥 지나쳐 갑니다.
길을 가다 고개를 돌려 바위도 보고
어마어마하게 크고 잘 생긴 나무와 이야기도 나누며..
꼿꼿하게 자란 포피도 붉고 아름다운 나무들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도시인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강함으로 우뚝 솟아 자란 소나무들이 그냥 기쁨이고 행복이고 고마울 뿐입니다.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포피를 가진 나무야, 너의 이름을 나는 모른단다. 꼭 알아볼게..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고 기품이 넘칠 수 있는지, 한참을 보듬고 안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무탈하고 천년 만년을 살라고 사랑한다고..
나무는 무엇에나 늘 긍정적이고 가지로 춤을 추며 잎으로 속삭이며 노래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헤하려 들면 파르르 떨며 숨죽여 울 줄도 압니다.
아, 너는 어쩌다.. 아픔에 고통에 못내 그 아름다운 가지로 몸부림을 치는구나!
곧고 붉은 정갈한 아름다움이 넘쳐 가지마다 그 기운을 온 산에 품어내고 있는구나!
어느 님인들 이 가파름이 버겁지 않으랴 서낭당에 올리는 치성인 양 놓은 돌이 탑을 이루었네.
나무숲에 폭 싸여 가는 녹색 동굴에 누가 창을 내었나보다, 뽀얀 연무에 지친 능선이 질식이라도 했는지 생기 없이 늘어져 마냥 누워있네.
활석으로 뒤덮인 가파른 산에서도 건강하게 솟아오른 소나무여 옛 선비들 너의 기상과 곧은 절개 근본삼아 그리도 닮고 싶어 애달았었던 게야!
춤을 추는 소나무야! 좋은 생각이 난다. 너의 기를 받고 네가 추는 춤을 배워 저 속세에 내려가 네 춤을 추면 맑은 기운 모두에 전이되어 너와 같은 푸르고 푸른 네 심성을 닮을까!
저 돌멩이를 올려놓고 간 사람들 무엇을 빌며 놓았을까? 궁금 했지..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도 못 미칠 어느 그림쟁이가 그렸는지 솜씨 좋은 풍경화도 보면서 좌우만 보았지 땅은 못 봤네. 그런데..
아이쿠! 나도 모르게 내 지른 소리와 함께 발끝이 얼얼하여 내려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도 없이 애꿏은 바위를 걷어 찾네, 순간 파득 나는 궁금증 하나 답이 보인다. 아까 본 돌무지에 오가는 사람마다 왜 돌멩이를 놓고 가는지, 돌무지탑이 왜 만들어 졌는지, 탑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만치 무너져 내리다 멈춘 두타성곽이 보입니다.
멀게는 약 이천년 (신라 제 5대 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王)23년/102년), 가깝게는 4백여 년 전(선조宣祖25년/1592년) 선조들의 생각과 손길이 머문 자리에 다가서니 만감이 떠올라 가슴이 떨립니다.
성벽이 자연으로 형성된 바위 경사면의 윗부분에 둘려 있는 테뫼식으로 성벽의 구조는 내외협축(內外夾築 : 흔히 산에서 보는 돌탑 쌓은 방식)의 형식을 취해 축조되었습니다. 이곳 성벽의 기단부는 암반을 이용해 기초를 삼고 있습니다.
안내 푯말하단에 노란색 위에 1-6이 표시되고 두타산성까지 약 2.2km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두타산성 푯말에 1-2를 표시하였으니 그렇다면 1-1은 약 550m거리가 되겠지요, 정상이 1-10이니 정상까지 2.2km가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표시판에서 두타산 정상까지의 거리표시가 보이지 않아 초등하교 산수 좀 했습니다. ㅎ 이거야 정말..
길가다 보면 앞을 가로막는 이런 훼방꾼도 있습니다.
두타산 오르는 길은 눈이 황홀합니다. 미인 보다 아름다운 소나무들의 요염한 裸身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으니까요.
이 나무의 교묘한 손(가지)좀 보십시오. 그 자태에 자지러집니다.
2km 정도야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인데 왜 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까! 답은 길입니다.
키를 재는 잡목사이로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처럼 선도 예쁜 요리조리 길을 따라 나도 요리조리 빠져갑니다.
글쎄, 괴석은 소나무를 사랑한다니까! 아니지, 소나무가 괴석을 사랑하는 거지, "아이참, 길이나 가시지 왜 그러실까! 남의 사랑에..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우리 사랑하는 건 맞아요!"
소나무가지 사이로 이제까지 걸어온 능선이 줄줄이 나를 따르고 있네.
너를 보니 정상은 아직도 멀고나! 그리 힘겹게 걸어 왔건만.. 네가 야속하네. 그런데 가만있자, 너도 2.3km냐? 훨씬 앞에 있던 네 친구도 2.3km라고 하던데, 내가 산수까지 했는데.. 너도 날씨가 더운가보다.
왜 이리 힘들지! 어, 그 많던 아름다운 소나무 다 어디로 숨었을까! 소나무야 네가 없으니 더 힘이 빠진다.
키 작은 잡목만 있으니 창문을 열어 놓은 듯 훤하다. 바람도 솔솔 옷깃으로 들어오고..
앞을 보니 봉우리 두 개 어느 봉우리가 두타산일까! 설마, 앞 봉우리는 아니겠지! 그런 행운이 내게 있을까!
오호! 네가 누구냐! 엄청 반갑다. 넌 이름도 참 곱지! 너의 고운 얼굴, 매력 넘치는 그 빛깔, 고혹적인 향기 그모습 그대로 널 아끼고 사랑해~~ "수수꽃다리"야~♡
누군가 앞서 간 님, 힘 드셨나 보다. 정성 모아 탑을 쌓으며 쉬어가셨으니..
가파른 오름에 절로 꼬부랑 할배가 된다. 나처럼 기어가듯 앞서 가는 님 그 또한 얼마나 힘들까! 저 님도 나도 頭陀의 길 어렵고도 힘드네.
숨이 턱에 차오르면 고개를 들어본다. 눈에 들어오는 건 태산 같은 준령 줄지어 섰다. 해는 중천을 넘어 섰는데 나는 언제 저 산맥을 기어 넘을까..
넘고 넘을 봉우리에 풀린 눈으로 옆으로 고개 돌려 보았네. 아득한 고산준봉이 눈을 가리네, 그 기세에 그만 숨이 막힌다.
흙길을 걸었는지 낙엽을 밟았는지 모르게 왔는데, 희번덕이는 바윗길에 후딱 정신이 놀란다.
뽀얀 휘장 둘리고 紫紅으로 방을 꾸미고 이제나저제나 님을 기다리는 너 참 청순도 하다.
꽃 중에 꽃은 봉오리가 아닐까..!
그윽한 눈길에 수줍었나 살포시 고개 숙였네.
1-9에 바탕은 희네. 불쑥 솟는 힘, 그럼 550m 선착순 달리기해도 되겠다. 이미 일등도 꼴지도 모두 따 놓은 당상이지..
녹색터널 밖으로 보이는 건 헬기장, 결승점도 따라 있지 않을까..
<두타산 정상>
추측대로 헬기장이 마련되어 있는 두타산 정상입니다. 높이 1353m 강원도에서는 보편적인 높이가 아닌가 싶은데, 오르기 어려웠던 것은 할석이 많고 가파른 까닭이겠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09시05분) 출발하여 두타정상도착(13시45분). 4시간40분,소요.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하산길은 어떤 길일까 얼마나 걸릴까,, 돌탑을 안 쌓아도 좋을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다.
6.1km를 4시간40분을 소비하다니! 이제 나도 은퇴해야 하나 고민 들어오네.
이 길은 삼척 댓재로 가는 길.
이 길은 내가 걸어온 길. 대궐터와 두타산성을 거쳐 무릉계곡관리사무소로 내려가는 길.
이제부터 내가 가야할 길. 박달령을 거쳐 청옥산 정상에 이르는 길.
두타산정상을 뒤로 하고 들어선 초입부터 빛깔도 순한 연둣빛 터널이네. 상큼해진 마음에 쉬엄쉬엄 여유로운 선비 걸음으로 느긋한 발길..
박달령이 1.6km, 이 정도의 길이라면 넉넉잡고 40분이면 능히 갈 수 있겠다.
그런데 그리도 내 마음을 훔치던 멋진 소나무들 보이지 않고 참나무만 무성합니다. 멋진 소나무 그늘 시원스러운 정자는 아니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녹색터널에 상큼함도 있으니 요기 좀 하고 가야지 싶어 작은 컵라면에 과일로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쉬파리가 많은지..
나무에 걸린 하얀 표시판에 1-13 숫자가 눈에 보인다. 흰색은 무난한 길이라는 의미요. 1은 두타산길이라는 번호요 13은 지점 표시랍니다. 두타산 정상이 10이었으니 정상으로부터 제3지역에 이르렀고 거리는 165m를 걸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구간이 55m 정도 되거든요.
오, 참나무 밑에 조릿대가 보입니다. 조릿대가 있는 것은 이 지점이 해발 800고지 정도 된다는 이야깁니다.
두타산 정상에서 13시50에 출발하여 도중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1.3km를 걸어 여기까지 50분이 걸렸다.
두타산을 오르던 쪽은 온전히 소나무 세상이었는데 반대 쪽 하산 길은 참나무 類 세상이다. 그 밑에 조릿대와 함께..
박달령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57분, 두타산 정상에서 박달령까지 1시간 07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1.4km 가면 넉넉한 품에 푸른 옥으로 단장한 청옥산을 거쳐 무릉계곡에 이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무릉계곡으로 하산하겠습니다.
푯말을 보니 두타산 정상에서 이곳 박달령까지 2.3km를 도중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대략 45분 정도 걸린 셈입니다.
박달령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서니 나무에 설치한 로프가 보이고 길 또한 심상치 않은 모습입니다.
가파르고 미끄러지기 쉬운 길을 정신 없이 살피며 내려갑니다.
박달령 코스의 지점표시판은 빨간색 즉 위험경고색입니다. 그만큼 가파르고 위험한 코스였습니다. 박달고개에서 2-10번으로 시작하여 2-7 지점에 도달 했으니 어렵고 위험한 코스를 10분의7을 내려왔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박달계곡까지 10분의3이 남았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박달계곡, 짙은 숲속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에 보기만 해도 시원한 맑은 물이 눈도 가슴도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적셔줍니다.
맑은 물을 보니 중국 초(楚)나라 때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 (漁父辭)에 나오는『淸斯濯瓔濁斯濯足(청사탁영탁사탁족)』즉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 의 글귀가 떠오릅니다. 갓끈을 씻는 다는 것은 홍진에 물든 마음을 면경같이 깨끗이 하겠다는 뜻이 겠지만, 무거운 온 몸을 떠받들고 살아온 발의 희생에 포상을 하고 싶어 이 맑은 물에 濯纓 대신 濯足을 하여 달궈진 발이 한여름 뙤약볕에 얼음 녹듯 식어 내림을 기쁨으로 느낀다.
굴곡지고 맑은 물 넘치는 계곡은 언제나 호기심을 불러냅니다. 나만 그런가요? 벽계수가 따로 있나요! 황진이의 계략이 담긴 유혹 한 마디에 돌아보다 그만 말에서 떨어진 '이종숙'이 이 물이고 벽계수겠지만. 그런 것이 사내지, 화담 서경덕처럼 고고한 인품과 사랑이 어디 그리 흔한가요. 그나마 오늘날에는 그런 사내 눈을 씻고 찾아도 없거니와 있어도 개밥에 도토리이기 십상이지요. 어디 요즘 화담 같은 사내 좋아라 할 여인이 있을까 싶어 한 말입니다.
『靑山裡碧溪水 莫誇易移去 一到滄海不復還 明月滿空山 暫休且去若何. 청산리벽계수 막과이이거 일도창해부복환 잠휴저거이약하.』
여러 단을 이룬 암반에 단마다 고운 잔물결 이는 沼를 이루고 다시 좁아진 암반 사이 물길이 조선시대 백자술병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 맑은 물을 보는데 걸쭉한 막걸리가 생각나네.
네가 바위인지 나무인지 알쏭달쏭 하구나.
가파른 바윗길에 지난 해 낙엽이 덮였으니 나무에 엮어 놓은 줄을 잡고도 조심스럽다.
무릉계곡으로 가는 길은 해묵은 낙엽이 쌓인 산자락 허리를 돌아가는 다소 미끄러워 조심스런 길입니다.
길 옆에는 고운 연둣빛 맑은 물이 또르르 졸졸 여울처럼 흐르는 이 계곡이 소시적 하늘고기, 피라미, 중걸태, 구구락지 잡아 매운탕 끓여 먹던 정늘골짜기요 우이동골짜깁니다.
수북한 낙엽 쌓인 그 속에는 많은 할석들이 숨어서 작은 방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길을 올리니 검은 암벽이 금시라도 덮칠 것 같은 위압감에 그만 숨길이 멈춥니다.
당장이라도 돌이 굴러 내릴 것 같은 벼랑을 위로 하고 한순간 실수로 벼랑 밑 계곡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돌멩이들 숨어 있는 낙엽 쌓인 길은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지고 철다리 놓인 길이 놀란 가슴을 다독여줍니다.
검은 암벽 물러간 자리에는 만 가지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화강암과 석회암을 이룬 바위들이 수직으로 절리 되어 절벽을 이루고 벌어진 틈새마다 소나무들이 群林하여 절경을 이루고 계곡에는 절리 되어 떨어진 돌들이 큼직한 바위를 이루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두타산과 무릉계곡은 그대로 無我之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불치의 암이 성행하는 세상, 나무에게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싶은 생각이듭니다. 소나무 줄기에 생긴 모습이 하도 기이하여..
두타산과 청옥산을 잇는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이르러 왼쪽 폭포를 이루었고 청옥산 또 다른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려 오른쪽 폭포를 이루어 두 폭포가 마주보며 한 沼로 떨어져 쌍폭포를 이루고 있는 절묘한 풍경입니다.
(쌍폭의 왼쪽 폭포)
<용추폭포>
용추폭포는 청옥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내리며 3단의 斷崖에서 세 개의 폭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상, 중단 폭포는 항아리 모양으로 되어 있고 하단 폭포는 둘레가 30m 정도 큰 검은 웅덩이를 이루는데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하단 암벽 오른쪽에는 정조21년(1797년) 12월에 龍의 덕을 바라면서 삼척부사 兪漢儁의 글씨라고 알려진 '龍湫'가 석각되어 있고 바위 前面에 "別有天地 戊寅 暮春 廣陵歸客" 글이 陰刻 되어 있고, 무인년 끝 봄에 광릉으로 돌아가는 길손이 무릉계의 뛰어난 경치를 표현한 글도 있다는데 폭포 일대의 근접을 금지하고 있어 확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용추폭포 10m 아래쪽 계류에 있는 바위위 오른편에 "府伯 李寅元,' 왼편에 '巡使 李光正' 이라는 큰 글자는 삼척부사를 지낸 이인원과 순찰사 이광정입니다. 모름지기 직책으로 보아 정삼품 또는 종삼품의 순찰사를 맞이한 종삼품 부사가 용추폭포로 접대 차 이곳에 왔다가 기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발가락 바위>
용추폭포 앞산은 바위봉우리인데 용추폭포 철다리에서 바라보면 발가락 모양의 바위가 드러나 보이는 이 봉우리를 만물상이라고 부릅니다.
철조다리에서 발가락 바위를 보고 돌아서면 보이는 용추폭포의 풍경.
용추폭포 아래 계곡의 모습.
<선녀탕> (상류 쪽)
쌍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50m 정도 아래 선녀탕으로 흘러듭니다. 선녀탕은 溪流 兩岸이 마치 높게 축대를 쌓은 듯한 바위지대 가운데를 소 여물통처럼 깊게 파낸 듯이 생겼는데 그 깊이가 5m, 폭2.5~3m에 이릅니다. 물에 담긴 하늘이 각진 얼음을 띄워 놓은 양 이채롭습니다.
<선녀탕> (하류 쪽)
선녀탕 위에는 두타산에서 내려온 길과 용추폭포로 가는 길을 연결한 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다리위에서 사진으로 담은 모습입니다. 하늘을 담아 形而上學的 文樣을 그렸고 수면에 편린처럼 물결을 넣었습니다.
오르내린 산행으로 발길은 무거운데, 계곡을 끼고 가는 마음은 물소리 새소리에 한낮의 여정보다 더욱 맑고 상쾌합니다.
<장군바위>
선녀탕에서 조금 옥류동 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왼편에 거대한 기암 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용맹스런 장군의 얼굴을 닮았다 하여 장군바위라고 부릅니다.
<병풍바위>
수직 절리로 이루어진 바위의 표면들이 마치 남성의 기상을 표현한 듯이 아름답게 펼쳐진 바위들의 조화가 병풍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습니다. 장군바위와 나란히 이어져 있습니다.
옆 산자락에도 길에도 할석이 많습니다. 산행 길에는 더욱 많았지요. 절로 노래 한 소절이 웅얼거려 집니다. "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꽃 피던 길에 첫사랑 불 태웠고 지난여름 그 사랑에 궂은 비 내렸다오. 종달새 너래따라 한세월 흘러가고 뭉게구름 쳐다보며 한 시절 보냈다오 잃어버린 지난 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갈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 최희준 님의 노래 '길'이지요. 일찍부터 젊은 내게 우수를 심던 그 양반 지금은 어디서 어찌 지내시는지..
관리사무소에 이르기 전에 계곡의 암반지대에서 잠시 쉬며 둘러본 주변의 풍경입니다. 소나무 한그루 계곡의 허연 암반에서 獨也靑靑 합니다.
옥류동으로 불리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지대입니다.
계곡 암반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오늘 산행의 시작과 끝냄을 마무리 짓는 삼거리입니다. 왼편으로 오르기를 시작으로 두타산성-두타정상-박달재-박달재계곡-용추폭포-무릉계곡-삼거리 원점에 이르는 14.4km에 9시간의 자연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였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무릉계곡 첫 풍경이요 아쉬움의 긑 풍경, 큰 바위 사이 경사진 암반을 엷은 막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빛 속 아담한 암반에 3단을 이룬 표면이 그대로 비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떠오른 여인의 흰 세모시적삼.. 그 속으로 보일 듯 말듯 내비치는 뽀얀 살색이야 말로 섹시의 극치입니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와 하늘아래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접고 보더라."
예, 또 오지요, 다음에는 "하늘문-문간재-칠성폭포-연칠성령고개-망군대-고적대를 오를 생각입니다.
2016년5월31일.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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