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베트남10. 황궁 후에성.

鄕香 2016. 3. 25. 17:57
후에는 흐엉강 좌우 즉 남북으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지며 남쪽에는 신도시가 들어섰고 '다이노이(大內 dại nội )' 로 불리는 북쪽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전통 구시가지가 위치한다. 비록 베트남 전쟁 당시 1968년 구정 대공세 때 미국의 폭격으로 황성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쪽 유적지는 전체적으로 1993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래 사진은 단순히 깃발을 달아 올리기 위한 건축물이다.  

베트남 응웬왕조 역대 왕 (阮王朝 歷代 王)

1.세조(世祖)고황제(高皇帝)->지아 롱[嘉隆],느웬푹안[阮福暎] 1802~1820.

2.성조(聖祖)인황제(仁皇帝)->민 망[明命],느웬푹키에우[阮福晈] 1820~1841.

3.헌조(憲祖)장황제(章皇帝)->티에우 티[紹治],느웬푹트웬[阮福暶] 1841~1847.

4.익종(翼宗)영황제(英皇帝)->트 득[嗣德],느웬푹티[阮福蒔] 1847~1883.

5.공종(恭宗)혜황제(惠皇帝)->연호 육덕(育德).1883년 즉위하자마자 요절.

6.히엡호아[協和]황제 느웬푹탕[阮福昇] 1883.

7.간종(簡宗)의황제(毅皇帝)->키엔 푹[建福],느웬푹하오[阮福昊] 1883~1884.

8.선종(宣宗)출황제(出皇帝)->함 응이[咸宜],느웬푹민[阮福明] 1884~1885.

9.경종(景宗)순황제(純皇帝)->동 카인[同慶],느웬푹피엔[阮福昪] 1885~1889.

10.트안 티[成泰]황제 느웬푹치에우[阮福昭] 1889~1907.

11.주이 턴[維新]황제 느웬푹황[阮福晃] 1907~1916.

12.홍종(弘宗)선황제(宣皇帝)->카이 딘[啓定],느웬푹투안[阮福昶] 1916~1925.

13.바오 다이[保大]황제 느웬푹티엔[阮福晪] 1926~1945.



후에성은 응우옌 왕조의 궁성으로 1804년, 제1대 世祖 지아롱 황제(嘉隆, 느웬푹안[阮福暎] 1802~1820) 때 프랑스의 건축가 보방(Vauban)에 의해 설계되고 짓기 시작하여 1832년에 완공된 황궁이다. 궁은 외성과 내성그리고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京城)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수성(守城)에 용이한 흐엉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해자(垓子)라는 수로를 둘렀고, 내성은 황성(皇城)으로 부른다. 황제의 생활공간인 훼성은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하여 자금성(紫禁城)이라고 한다. 



깃탑(旗塔)은 1807년 지아롱 황제 때 3단으로 쌓은 16m 높이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40m 높이의 깃대를 세웠으나 베트남 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1969년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아열대 기후로 인해 이끼가 번식하여 고풍스럽지만 음침하다.



외성 안에는 거대한 깃대탑이 세워져 있고 외성 바깥쪽에 적군의 접근은 막기 위해 흐엉강으로부터 끌어들인 물이 담긴 해자(垓子)가 있다.



오문 오봉루는 응우옌 왕조 제2대 임금 '민망 황제(明命, 느웬푹키에우[阮福晈] 1820~1841)가 창건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12대 카이딘 황제(啓定 ,느웬푹투안[阮福昶] 1916~1925)가 再建하였다고 한다.

황성으로 들어가려면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고 보이는 오문(午門)이라는 성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문(午門)과 오봉루(五鳳樓)의 모습이다. 오문의 한자로 볼 때 한낮의 태양을 향한 남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봉루는 바오다이 황제(保大, 느웬푹티엔[阮福晪] 1926~1945)가 1945년 8월 호찌민 혁명군 임시정부에 자리를 내주던 역사적인 자리이며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을 선포한 곳이다.  

후에 황성은 정사각형으로 외성은 한 변의 길이 2,235m, 성벽의 높이 5m, 해자의 넓이는 30m, 깊이4m라고 한다. 




성밖에서 해자에 놓인 이 다리를 건너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해자(垓子)와 그 위 석교와 남문인 오문(午門)과 오봉루(五鳳樓)의 정경이다. 정면에 방형(方形)으로 된 문이 셋이고 좌우측에 2개의 아취형의 문이 있는데, 정면 가운데는 황제만 다닐 수 있는 문이고 그 좌우는 文武벼슬아치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좌우에 있는 아취형의 문은 병사와 말, 코끼리 등이 들고나는 문이라고 한다. 오봉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형의 큰 못이 있고 그 위에 다리를 놓아 태화전으로 갈 수있다.



《정직탕평 正直蕩平》오문(午門)을 들어서면 바로 방형의 못(池)이 있고 그 위에 중도교라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위에 세운 삼문(三門) 모양의 패방(牌坊)이 세워졌는데, 가운데 皇道 위에는 ' 正直蕩平'이라는 한자가 있어 조선시대 영조 임금이 당파를 다스리기 위한 정치이념 탕평책을 떠올리게 한다.



오문 앞 못의 일부 정경.



'정직탕평 正直蕩平'문구가 있는  삼문(三門) 모양의 패방(牌坊)을 지나 오문을 보기 위해 돌아서보니 그 패방(牌坊) 위에 '거인유의 / 居仁由義'라는 글귀가 있다. 



다시 돌아서 보니 태화전 앞에 두 번째 패방 龍紋柱三門(우리나라의 홍살문 같이 이해?)위 가운데에는 高明悠久라는 글귀가 있다. 높고 밝은 종묘사직 오래토록 멀리 이어지길 염원한 것인가 .. 뒤편 같은 위치에 "중화위육 中和位育" 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문(午門)을 들어서면 바로 방형의 연못이 있어 오문과 황궁 앞뜰 간의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에서 연못의 일부를 담은 사진이다.



태화전 앞뜰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두 번째 패방(牌坊) 위에는 "중화위육 中和位育" 이라는 명문이 있다. 올바른 관료를 키운다. 그런 뜻인가..



태화전 뜰 좌우측에는 상상의 동물상이 몸은 앞을 향한 채 고개를 틀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아니 태화전을 침입하려는 모든 악귀를 감시하는 것일까..    





중국의 자금성의 태화전을 모방했다고 하는 이 태화전은 황제위식 황실의례 등 큰 행사를 거행하던 곳으로 정면9칸에 이층지붕에 황금색 기와를 올린 건물로 용마루에는 십여 마리의 용을 장식한 이 건물은 1805년에 世祖 지아롱 황제에 의해 건축된 것을 1833년 현재의 위치에 옮겼는데 베트남전쟁으로 반파된 것을 1970년 중수하였다고 한다. 태화전 앞 뜰은 상하 이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품계석(品階石)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하단 뜰에는 종9품에서 정5품까지 전진 배열되어 있다. (從九品 品階石)



정오품 품계석(正五品 品階石)까지는 하단에 위치해 있다.



태화전 바로 앞 상단 좌우에 세워져있는 정1품에서 종3품까지의 품계석이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경복궁 근정전 앞 품계석보다 작다.



태화전 안에 전시된 여러 황제의 도장 어보(御寶)이다.



황제의 어보(御寶)와 국새(國璽)




태화전 옆 담장너머 옛 병사들의 행렬이 보인다. 우리나라 궁궐 수문장교대식 같은 행사라도 하는지..


  

좌무(左廡) 우무(右廡)라는 전각 앞 한편에는 무게1489kg . 1500kg의 거대한 청동용기(靑銅皿器)가 있는데 왕실의 만수무강을 위해 주조되었다고 한다. 바라진(外反) 구연(口緣)에 실타래 모양의 고리가 4개 달렸고 상부에 테두리모양으로 넝쿨무늬의 띠를 돌린 후. 구연에서 직선으로 바닥까지 내려온 동체(胴體)에는 직사각형 액자틀 모양 안에 여러 종류의 동물과 꽃나무 문양을 세 줄로 빈틈없이 돌려 장식하고 밑 언저리에 다시 넝쿨무늬를 돌렸다. 굽이나 대각은 없는 평저(平底)이다. 덧붙여 역적 죄인을 쪄서 죽이는(蒸殺)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현지인의 이야기도 있다.     



태화전(太和殿) 뒤에 위치한 황제의 집무실인 근정전(勤政殿) 터 좌우로 좌무(左廡), 우무(右廡)로 불리는 전각이 있다.  



황제의 집무실인 근정전은 전쟁의 災害로 인해 사라지고 그 터만 보인다.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 우무(右廡)이다.



좌무(左廡)라는 전각 양 옆에 회랑이 남아 있는 이 건물은 근정정의 부속 건물로 황제를 보필하는 지밀내관이나 궁녀들이 거처하던 곳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좌무 전면 양 끝 벽에 자기로 된 문양의 모습으로 원형의 喜자와 네 귀에 박쥐를 표현했는데, 화목과 번영을 기원하는 길상문(吉祥文)이다.

이러한 길상문은 漢字문화의 영향이 끼친 동양의 전형적 마인크래프트(Minecraft)라 할 수 있다.



우무(右廡)라는 전각 양 옆에 딸린 회랑의 내부모습이다.



다시 전동차를 타고 세조묘(世祖廟)로 갑니다.




묘문 양 옆에는 우리나라 해태를 연상시키는 상상의 동물상이 지키고 있다.



태화전(太和殿) 동서쪽에 위치한 세조묘(世祖廟)로 들어가는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묘문(廟門)이다. 삼문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문 위에 廟門이라고 글씨가 있고 문 사이 4개의 벽에는 가운데 두 곳은 용이 있고 좌우에는 소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모든 그림이나 문양은 사각형으로 파인 틀 안에 돋을무늬기법으로 새겨 넣은 모양처럼 보인다. 



묘문(廟門)의 안쪽 모습이다. 가운데 두 벽은 바깥문양과 같은 용문이지만 양 가에는 소나무대신 꽃 핀 매화나무가 표현되었다.



묘문에서 들여다본 현림각(顯臨閣).



현림각은 17m 높이의 삼층의 전각으로 1층은 5칸, 2층은 3칸, 3층은 1칸으로 응우옌 왕조의 전각 중 제일 높다고 한다.



 응우옌 왕조 제2대 민망 황제는 1824년 응우옌 왕조에 공헌한 인물들을 기리고 왕조를 영예롭게 한 선조들께 존경하는 뜻을 담아 이 건물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명을 내렸다고 한다. 전각 안의 천장과 현림각(顯臨閣)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현림각을 나서니 세 발 달린 청동 솥 너머 바로 보이는 건물이 세조묘이다.



현림각(顯臨閣) 에서 좌측을 보니 청동으로 만든 솥(鼎)이 4개가 나란히 배치되어있다.



현림각(顯臨閣) 계단에서 우측을 보니 좌측과 동일하게 청동으로 만든 솥(鼎)이 4개가 나란히 배치되어있다.



좌우 8개의 솥(鼎)과 중앙에 있는 1개의 큰 솥을 합하면 九鼎이 된다.  다른 8개의 솥(鼎)은 크기가 같으나 중앙에 있는 솥(鼎)은 높이가 2.3m에 2톤이 넘는 솥으로 가장 크며  "응우옌 왕조를 세운 시조(始祖) 지아롱 황제의 정(鼎)으로 1835년 민망 황제 때 주조하였다



구정(九鼎)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있다. 순(舜)나라 때 임금의 명을 받들어 황하(黃河)의 치수(治水)임무를 받고 공사를 하였으나 실패하여 피살된 곤(우禹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수(治水)의 임무를 맡은 '곤'의 아들 '우'가 치수에 실패한 아버지의 교훈을 거울 삼아 직접 공사현장을 감독하면서 13년만에 홍수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 후 순(舜)임금이 죽자 우(禹)가 나라를 이어 받아 하(夏)나라를 세우고 우왕(禹王)이 되었다. 이어 천하를 아홉 개의 주(九州)로 나누고 각 주의 특산물에 따른 공부(貢賦)를 정해주어 통치의 자원으로 삼게하였다. 이를 우공구주(禹貢九州)라 하였다. 우공구주는 형()·양()·옹()·예()·서()·양()·청()·연()·기()의 9주를 의미한다. 이때 우왕의 성덕(聖德)에 감읍한 구주의 수장들이 각 주에서 생산되는 금속을 바쳤고 우왕은 이를 모아 9개의 정(鼎)을 만들었으며 대대로 제위(帝位) 전승의 보기(寶器)로 삼았다. 이후부터 정(鼎)은 왕위의 상징적 기물로 자리매김 되어으며 구정은 하나라를 거쳐 상나라와 주나라로 전승되었다고 하며 구정(九鼎)을 소유한다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정통성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세조묘 앞의 이 구정도 응우옌 왕조의 정통적 부동성의 상징이겠지만, 이 구정은 시조(始祖) 지아롱 황제의 치세 때에 구정을 한 번에 제작하여 황제의 정통성을 살린 것이 아니고 세조묘에 모신 아홉 황제를 각각 나타낸 아홉개의 정(九鼎)으로  高鼎, 仁鼎, 鄣鼎, 英鼎, 議鼎, 順鼎, 宣鼎, 諭鼎, 玄鼎,이라는 이름이 있다.




세조묘앞에서 현림각을 바라본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동물형상이 달린 뚜껑이 있는 청동 향로가 올려져 있는 단상(香壇)은 세조묘 뜰아래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세조묘(世祖廟) 앞뜰에 마련되어 있는 큰 향로와 그 뒤 단상위에 뚜껑 덮인 향합(토는 작은 향로)과 그 좌우에 꽃이 꽂힌 화병이 올려져 있다.



세조묘 안 정중앙에는 응우옌 왕조를 세운 시조(始祖) 지아롱 황제의 위패를 모신 제단이다.


응우옌 왕조 (阮王朝)는 1대 세조(世祖 高皇帝) 지아 롱 (嘉陵), 느웬푹안(阮福暎1802~1820) 이 건국하여 마지막 황제 제13대 바오다이(保大) 황제 느웬푹티엔(阮福晪1926~1945)에 이르기 까지 143년을 존치하였으나 이곳 역대 황제를 모시는 사당에는 9명 황제의 위패만 모셔졌다. 남은 4명의 황제는 프랑스식민지기간에 재임기간이 3개월도 못 미친 황제였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波瀾萬丈한 역사라 하겠다. 36년간 일제에 강점당했던 우리의 아픔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정치행각을 보면 한심하고 통탄스런 일이다. 근본적으로 침략국이 나쁘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라기보다 개인의 권력과 영달에 눈먼 인간들이 정치랍시고 벌이는 짓거리로 외국으로부터 침략의 틈을 주는 이러한 행태를 좌시하는 국민들의 자업자득일 수도 있다.





"세조묘" 현판 아래 시조(始祖) 지아롱 황제의 위패를 중심으로 모두 아홉 황제와 황후의 위패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세조묘(世祖廟) 내부의 모습이다. 세조묘에는 재위 기간이 며칠 또는 몇 개월로 짧았던 황제의 신위는 모시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묘 전각 전면의 모습을 중간에서 측면으로 본 모습이다. 세조묘 전각 하단에는 깨진 도자기의 조각을 붙여 장식했고 그 앞에는 일렬 황대로 陶瓷로 빗은 座臺위에 코발트염료를 담뿍 찍어 그려 넣은 무늬의 빛깔도 짙은 청화백자화분이 인상적이다. 17세기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청화백자를 사옹원 광주분원에서 생산하였으나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코발트 염료가 값이 하도 비싸 사림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그 대책으로 발명된 것이 철화백자와 동화백자이다.



세조묘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



독우문(篤祐門) 도타움을 더한다는 문을 거쳐서..



 독우문(篤祐門)을 나와서 돌아보니 육경문(毓慶門). 문은 하나인데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이름이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세조묘 구역을 나서기 전의 정원풍경이다.



기다리고 있는 전기자동차를 타고 연수궁 대비전으로..  



연수궁(延壽宮) 후원의 한 모습이다. 연수궁도 정궁과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여행사의 기획에 따라 빠르게 돌아가는 일정으로 스쳐가는 통에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지금 생각하니 기억도 없다. 이 황궁을 돌아보고 생각과 느낌을 가지려면 하루는 족히 걸리겠는데 한 시간에 후다닥 쫓기고 끌려 다닌 안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



연수궁(延壽宮)은 대비의 궁으로 지아롱 황제 때인 1803년에 지었다고 하며 오래토록 장수하시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라고 하겠다.   



땅위로 솟아있는 뿌리의 모습도 그렇고 밑동부터 여러 갈래로 자란 나무줄기의 모습도 일찍이 보지 못한 모습이다.  



다시 차를 타고 하이번 고개를 거쳐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해수관음보살이 있다는 영응사로 출발하기 전의 여백의 시간이다.



2016년 2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