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고대의 숨결이 흐르는 제천시

鄕香 2015. 7. 25. 16:39

물 좋고 산세 좋은 아담한 도시 제천, 요즘 남쪽 벌판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제천堤川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이름의 시원始原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의림지에 뿌리 두고 있습니다. 堤川 義林池는 密陽 守山堤, 金堤 碧骨堤, 尙州 恭儉池와 더불어 우리나라 四大 저수지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벽골제나 수산제 그리고 공검지가 일부 방죽만 남아 명분만 잇고 있는 것에 비해 의림지는 온전한 저수지로 그 아래 펼쳐져 있는 논밭에 생명수를 공급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유일한 고대 저수지로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문화와 구 시가지를 슬기롭게 보전하여 개발로 치닫는 다른 도시와 차별하여 격조 높은 문화도시로 치유의 도시로서 특성화 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마을을 이뤄온 아기자기 오밀조밀한 舊시가지를 한국적 시가지로 보존하고 그 남쪽 벌판에 구시가지와 대조적인 새로운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의림지와 구시가지의 서쪽에 바이오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제천시의 정책은 일찍이 2011년 3월6일 이 사람이 제천시 산악연맹카페에 올린 사진과 글이 시정에 반영 된 것에 참으로 영광되고 바람직한 일임에 갈채를 보냅니다. 훗날에 가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의림지와 그 아래 농경지와 이어지는 구시가지 그리고 구시가지에 점철하듯 솟아 있는 7개의 7字形을 이루고 있는 獨峰이 토속신앙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있는 이러한 천혜의 조건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농경문화의 발상지적 문화의 도시로, 관광의 도시로, 치유의 도시로, 진정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유일무이한 독특한 한국적 도시로 자리매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마름 열매》

호숫가에 마름 열매가 부표처럼 떠 있습니다. 저 어려서 보릿고개다 뭐다 해서 먹는 것에 힘겨웠던 시절, 논에서도 어렵잖게 보았던 마름은 구황식물 중 하나였습니다. 논에서 채집했던 마름은 여기에 게시한 마름보다 크고 양적으로 먹을 만 했습니다. 단단한 검은 겉껍질을 까면 뽀얀 속살이 나오는데 고소한 맛이 있었지요. 산에서 따먹을 수 있는 고염 맛과 비슷했습니다.  

 

 

〈마름의 줄기와 잎〉

 마름은 번식률이 좋아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고 합니다. 그 번식력을 자연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곤충이 딱정벌레랍니다. 딱정벌레는 마름 잎을 엄청 좋아한답니다. 우측에 빨강색깔의 딱정벌레가 잎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요즘은 논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지만, 전국의 연못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한해살이 물풀입니다. 뿌리는 진흙 속에 박고 줄기는 가늘고 길게 자라서 물 위에 뜹니다. 물속의 잎은 깃꼴로 가늘게 갈라지고 물위에 뜬 잎은 줄기 위쪽에 모여납니다. 잎자루는 연한 털과 공기주머니가 있고, 8-14cm 입니다. 공기주머니는 긴 타원형 또는 피침형으로 길이 1-3cm 정도입니다. 잎몸은 길이 3-4cm, 폭 3-5cm의 마름모꼴 비슷한 삼각형이며 잔 톱니가 있습니다. 잎 앞면은 토란잎이나 연잎처럼 윤기가 있고, 뒷면은 잎줄 위에 긴 털이 있습니다.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물위로 나온 꽃자루 끝에 1개씩 7-9월에 피며, 흰색으로 지름 1cm 쯤 됩니다. 꽃자루는 짧으나 나중에 길게 되며, 겉에 털이 납니다. 꽃받침잎, 꽃잎, 수술은 각각 4개, 암술은 1개에 열매는 핵과이며, 겉이 딱딱하고, 납작한 역삼각형으로 높이 1.2-1.7cm, 폭 2.9-4.4cm, 검은색으로 중앙부가 두드러졌습니다. 양쪽에 길이 1.2-1.6cm의 뿔이 2개 있습니다.

 

 

마름속屬 식물은 고여 있는 물이 있는 곳에 분포하고 번식력이 커서 잡초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면, 마름속 식물은 원래 유럽과 아시아의 온대 및 아열대지역에서만 자랐는데, 북아메리카로 전파된 마름은 동부 지역에 잡초처럼 한 호수를 다 덮어 버리기도 한답니다. 이는 원래 분포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천적이 있어 개체군의 크기가 조절되는 반면에 새로운 서식지로 전파되었을 경우 천적이 없어 생육 조건만 맞는다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고 마는 것이지요. 본 분류군인 마름의 경우 잎을 갉아먹는 딱정벌레인 Galerucell birmanica와  Pyralidae과의 나방이 가장 흔히 마름의 잎을 갉아먹어 마름 개체군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 어려서는 논에도 마름이 많이 있어 역삼각형에 2개의 뿔이 달린 마름 열매를 줏어다 검고 딱딱한 껍질을 까면 보얀 속살이 있는데 맛이 고소하여 먹을 만 하였습니다. 구황식물이기도한 마름의 잎은 어린아이의 머리가 헐었을 때, 열매껍질은 이질, 설사, 탈항, 치질 등에, 줄기는 위궤양을 치료할 때 쓰인다고합니다.  

 

 

 

호수의 서쪽을 의미하는 湖西라는 충청도의 다른 이름은 의림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큰 제방을 의미하는 奈堤라는 제천의 옛 이름도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림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는 설과 조선시대 현감인 박의림이 쌓았다는 설이 전해져 왔으며 , 지명분석에 근거한 삼한시대 축조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습니다. 기록으로는 세종실록에 의림제라고 하고 정인지에 의해 두 차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항일운동기인 1914~1918년까지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으며, 1972년의 장마에 둑이 무너진 것을 이듬해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설은 거북바위를 돌려 놓아 부자집이 몰락하였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탁발승을 홀대하여 부자집이 몰락하고 그 자리에 저수지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또한 의림지에 있는 큰 이무기가 가끔 나와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었는데 어씨 성의 오형제가 이무기를 잡은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게 되었다는 '어장사참사가魚壯士斬蛇歌"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의림지는 그 역사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古代 우리나라의 3대 수리시설로 벽골제나 수산제는 일부 둑만 잔존하여 명분만 남아 있으나 의림지는 현재도 289정보의 제천평야에 용수를 공급하는 唯一無二한 살아 숨쉬는 저수지입니다. 오늘날에는 제천의 경승지로, 순조 7년(1807년)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는 호반과 제방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십그루의 거대한 소나무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의림지의 특산물로 해빙기에만 볼 수 있는 빙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의림지 제방 위에 소나무, 버드나무 숲인 堤林은 "堤川縣地圖"와 '義林池圖' 등 고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예로부터 의림지와 함께 아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어오고 있고 '燕子岩', 용바위, 홍류정지 등 전통적 사연에 얼긴 자연 또는 시설물이 함께 경관적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이 팔뚝만큼 큰 고기가 보입니다. 그 모양새로 볼 때 산천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의림지의 본래 이름은 '임지'라고 합니다,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별칭하였으니 그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義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왕 때 樂聖우륵이 시축하였다고 하고, 일설에는 그로부터 700년 뒤에 현감 박의림이 축조하였다고도 합니다.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정인지가 충청도 관찰사 재임 때 수축하였고 다시 세조 원년(1455년)에 제찰사가 되어서 크게 보수하였으며 그 뒤 1910년부터 5년간에 걸쳐 보수하였고, 1972년 대홍수로 둑이 무너지자 이듬해 복구하였습니다. 호반 둘레 1.8km, 만수면적158.677㎡, 저수량 600만㎡, 수심 8~13m의 큰 수원지로서, 몽리면적 289 정보의 농지를 거느리며 현재도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제천 의림지와 제림/堤川 義林池와 堤林》

 

 

명승 제 20호, 제천堤川 의림지義林池는 제천 벌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로 제방을 따라 소나무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라 불립니다. 수심 8m, 둘레 1.8km 제방과 호반 언저리에 영호정映湖亭, 경호루鏡湖樓와 수백 년의 고령에 절묘하게 비틀고 꺽인 절지折枝로 아름다움을 더한 엄청난 크기의 소나무 수십 그루가 숲을 이루며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계절 따라 독특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방죽 따라 기라성처럼 줄지어 서 있는 황금빛 줄기에 기묘하게 틀어지고 꺾인 가지의 구성미와 웅대한 자태, 짙푸른 솔잎이 내뿜는 건강미와 비취색의 맑고 잔잔한 물결로 미소 짓는 호반이 아우러져 천상의 아름다움을 빗어내고 있습니다.   

 

 

 

《전설傳說》

옛날 이 자리에 부자집이 있었는데 어느날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그런데 이집 주인은 탐욕스럽고 심술 또한 사나웠다. 한동안 대꾸도 없으면 스님이 발길을 돌리려니 했는데 탁발스님은 가지않고 목탁만 두드리고 있었다. 이에 심술이 난 집주인은 두엄 더미에서 거름을 한 삽 퍼다가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그것을 바랑에 받아 넣고 선머리를 한번 조아리더니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황을 집안에서 보고 있던 며느리는 얼른 쌀독에서 쌀을 한 바가지 퍼다가 스님을 뒤쫓아가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 스님은 그 쌀을 받더니 며느리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터이니 그러면 빨리 산속으로 피하되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그 소리를 듣고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안에서는 집주인이 하인을 불러 놓고 쌀독의 쌀이 축이 났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자기가 스님이 하도 딱해 퍼다 주었다고 아뢰었다. 시아버지는 크게 노하여 며느리를 뒷방에 가두더니 문에 자물쇠를 채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울리고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광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더 요란하게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더니 잠겼던 광문이 덜컹 열리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탁발승의 말이 생각나 얼른 광속을 빠져나와 동북쪽 산골짜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려가던 며느리는 집에 남아 있는 아들이 생각이 나서 뒤돌아 보지 말라던 스님의 말을 잊고 집이 있는 쪽을 뒤돌아 보았다.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해갔으며 집이 있던 자리는 땅속으로 꺼져내려 온통 물이 괴고 말았다.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며느리가 변해서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燕子岩) 근처 어디엔가 서 있다고 한다.

 

 

변함없는 푸르름, 고고한 자태, 그 존귀함에 일찍부터 선인들은 소나무를 君子 또는 선비의 기개로 표현하였으며 조선 시대 화백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닮은 호숫가에 선비의 기개를 자랑하는 호젓한 소나무에 매료된 한 여인이 열심히 앵글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또 하나의 조화로움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최대한 살리고 이용해서 산과 산 사이 좁은 곳에 제방을 쌓아 조성한 의림지의 모습입니다. 정면 산자락 끝에 제방과 소나무들이 호수를 감싸고 있습니다.

 

 

(의림지를 등에 업고 바라 본 삼한길)

의림지 제방 아래 펼쳐진 289 정보의 농경지를 관통하는 농수로를 산책로와 농기구차로 자전거도로 등 다목적 복합도로를 새롭게 증설한 모습입니다. 이 길은 경작지를 가로질러 농경지 남쪽 끝에 위치한 칠성봉七星峰의 머리인 제1봉 독송정獨松亭까지 1직선으로 이어졌습니다. 농경지대 중간 동쪽 농경지대와 서쪽 농경지대 안에 의림지로부터 물을 공급 받아 저장하는 두 개의 중간 저수지가 있습니다. 동쪽농경지에는 '솔방죽'이 있고 서쪽 농경지에 '뒤뜰방죽'이 있습니다.

 

 

제천 의림동과 청전동 ~ 신림간 東에서 西로 놓인 도로가 농경지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도로상에서 의림지와 용두산을 바라 보고 담은 1차로 완공된 삼한길의 모습입니다.   

 

 

 청전동~신림 간 도로의 허리를 지나 제 2차 공사 중에 있는 삼한길입니다. 제1차 공사가 끝난 지점에서 독송정까지의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한쪽에 수로를 복개한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산책로, 자전거도로, 트랙터 및 경운기 같은 농기계가 다닐 복합도로를 새로 건설하는 중입니다. 고대 농경발상지답게 의림지와 그 아래 펼쳐진 전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살리고 농경문화발상지적 교육문화공원으로 보완해서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도시와는 차별화 된 자연치유 및 자연과 고대의 농경문화가 숨 쉬는 독특한 도시로 거듭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솔방죽' 입구에서 의림지 쪽으로 한창 공사 중인 삼한 길의 모습입니다. 옆 콘크리트 길은 의림지로부터 흘러내리는 水路를 복개한 모습입니다. 바로 마주 보이는 산들이 의림지에 수원을 공급하는 용두산과 백곡산의 까치봉입니다.    

 

 

全 국토가 이상기후로 가뭄에 논과 밭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있는데 제천 벌은 벼가 푸른 물결처럼 싱그러울 수 있는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의림지입니다. 古代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저수지로서 변함없는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방죽』

의림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물길을 타고 제천평야 중심으로 흘러들어 바둑판 모양의 수로를 통해 농경지에 고루 배수 되고 여분은 동쪽 농경지 가운데에 위치한 '솔방죽'저수지와 서쪽 농경지 중앙에 위치한 '뒤뜰방죽'저수지로 물이 공급 저장됩니다. 두 중간 저수지에 담긴 물은 의림지로부터 바로 공급되지 못하는 외곽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거나 가뭄 시기에는 물을 주변경작지에 적절히 공급합니다.

 

 

가을도 아닌 철에 코스모스가 꽃을 피웠습니다.

 

 

솔방죽 안쪽 쉼터입니다. 호수 북쪽 둔덕 평지에 화장실, 정자 등 편의시설물과 자연학습장 야생화꽃밭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솔방죽 위로 호수를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방죽위에 세워진 정자입니다.

 

 

호수의 수생식물이나 곤충, 철새, 갈대 등을 관찰할 수 있는 시설물입니다.

 

 

솔방죽 서쪽 풍경입니다. 수면과 방죽이 고즈너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솔방죽 동남쪽입니다. 갈대가 무성하여 수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대 숲에는 오리들의 천국입니다.  

 

 

남쪽 방죽 안쪽 모습입니다. 호수에 사토가 누적되어 호수가 땅이 되었습니다.

 

 

솔방죽 자연학습장에 핀 나리꽃

 

솔방죽 자연학습장의 일부 모습입니다.

 

금강초롱꽃

 

메꽃 뿌리는 굵은 철사모양으로 뻗는 뿌리줄기 넝쿨식물로 뿌리줄기는 고소하고 달착지근하여 내 어려서 많이 캐 먹었던 구황식물입니다.

 

 

솔방죽 동쪽 옆 논에 심은 연蓮입니다. 소나무 한 그루 있는 것이 솔방죽의 제방의 일부입니다.

 

 

연봉우리가 두 손모아 올리 듯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풍성한 연잎 너머로 솔방죽에 물을 보내주는 의림지의 水原인 용두산과 백곡산의 까치봉이 보입니다. 그 산자락 사이에 의림지가 있습니다.

 

 

《큰까치수염》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본 솔방죽 호수안에 갈대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밤꽃이 시든 자리에 밤송이가 돋아나고 있습니다.

 

 

솔방죽 동쪽 야생화 학습장입니다.

 

 

다시 솔방죽 입구 농수로에 서서 제천시가지 방향을 담은 사진입니다. 삼한길공사가 논을 매립한 상태로 진행중입니다.

 

 

가뭄에도 이처럼 벼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마주보이는 용두산과 백곡산 계곡에서 흘러내려 의림지에 담긴 물이 제천벌에 고루 공급이 되어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늘에 이른 역사이며 농경문화발상지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습니다.

  

 

뒤뜰방죽에서 제천시내 서쪽 방향을 담은 풍경입니다. U자 형태로 낮은 지대에 수림을 이룬 계곡은 경기도 한탄강처럼 지층이 푹 꺼진 형상입니다.

 

 

『 뒤뜰방죽 』

의림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물길을 타고 제천평야 중심으로 흘러들어 바둑판 모양의 수로를 통해 농경지에 고루 배수 되고 여분은 동쪽 농경지 가운데에 위치한 '솔방죽'저수지와 서쪽 농경지 중앙에 위치한 '뒤뜰방죽'저수지로 물이 공급됩니다. 두 중간 저수지에 담긴 물은 외곽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거나 가물 때 물을 경작지에 적절히 공급합니다.  

 

 

이 저수지는 오랜 세월에 물길과 함께 흘러온 모래가 쌓여 자연적으로 매립된 것을 지난 해(2014년)에 준설하여 새롭게 복원한 것입니다.

 

 

백곡산을 바라보고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담은 뒤뜰방죽의 풍경입니다.

 

 

 

뒤뜰방죽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담은 풍경입니다.

 

 

뒤뜰방죽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담은 풍경입니다.

 

 

제천시 남쪽방향의 풍경입니다.

 

 

백곡산을 바라보고 담은 풍경입니다. 산 밑에 세명대학교 건물 일부가 보입니다.

 

 

농경지 남쪽 독송정 조금 지난 위치에서 의림지로 뻗은 농수로를 담은 풍경입니다. 이 지대는 아직 공사가 이뤄지기 전입니다.

 

 

『북두칠성봉 중 제1봉 독송정/北頭七星峰 第一峰 獨松亭』

의림지 제방에서부터 시작한 삼한길은 제천평야 몽리면적 289 정보의 농경지 중앙을 관통하여 이곳 독송정에서 멈추며 제천의 또 다른 명물인 산맥 없이 단독으로 솟아 있는 7개의 봉우리가 7字의 북두칠성 형태로 제천시내에 獨峰으로 點星되어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북두칠성과 같아 옛날부터 7개의 이 봉우리를 북두칠성봉이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자연적 현상입니다. 

     

 

『북두칠성봉 / 北頭七星峯』

《忠淸道邑誌》券5 〈堤川郡邑誌 1863~1907〉중 堤川郡地圖 이 지도에 보면 의림지와 마을 사이 七星峯이 표시되어 있는 데 7자의 머리를 북쪽의 의림지에 두고  입곱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7자 형태로 솟아 있어 이 봉우리들을 한데 묶어 북두칠성봉이라고 합니다.

 일곱개의 獨峯을 7字形으로 나열하면 기존의 순차와 달리 다음과 같이 나열됩니다. 제3봉 星峯, 제1봉 獨松亭, 제2봉 燕召, 제4봉 要美峯, 제5봉 紫美峯,제6봉 衙後峯, 제7봉 丁奉山 순이어야 맞는 것이 이닐가 싶습니다.   

 

 

용두산과 백곡산 사이 계곡아래 의림지가 있고 그 아래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농경지 남쪽 끝자락에 칠성봉의 머리에 해당하는 독송정을 시작으로 연소봉, 요미봉, 성봉, 자미봉, 아후봉, 점봉산으로 이루어진 7개의 독봉獨峯들이 점찍어 놓은 듯이 제천시내에 솟아 있어 이를 북두칠성에 비견하여 북두칠성봉이라고 합니다.

 

 

 

 

《 독송정 / 獨松亭 》

제천 칠성봉의 머리인 제1봉 독송정입니다. 의림지를 북쪽에 두고 그 아래 펼쳐진 제천평야지대 농경지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제천시가지와 경계선상에 위치합니다.

 

 

 의림지방향 농경지 북쪽 삼한길은 지난 해(2014년)에 완공이 되었고, 지금은 농경지 남쪽 부분 독송정까지의 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독송정 일대는 더욱 넓혀 공원조성을 위해 터를 마련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2 봉 연소봉 / 第二峰 燕召

제1봉 독송정과 연소봉 중간지점 농로(農路)에서 담은 연소봉의 측면의 전경입니다.

 

『제 2봉 연소봉 / 第二峰 燕召

제1봉인 독송정의 동쪽에 자리한 제2봉은 제천군지에는 연소봉이라 부르고, 북두칠성에 의한 별자리 이름은 거문봉巨門峯이라 하며, 천상의 상좌로 보면 천선봉天璇峯이라 불리운다. 제1봉 독송정과 1km정도 떨어져 있고 봉우리 전체에 낙엽송과 잡목이 숲을 이루었고 제천시 청전동 61-1번지 청전대로변에 위치한다. 

 

 

정상부 풍경

 

 

정상부 북쪽 끝에 있는 묘지 '대한제국 말에 참봉을 지낸 분의 묘임. 묘비명 "參奉 延日鄭公永玉之墓"

 

 

연소봉 정상 북단의 모습.

 

 

제1독송정과 제2봉 연소봉 중간 농로에서 바라본 독송정과 제3봉 성봉을 담은 풍경입니다.

 

 

제3봉 성봉 / 第三峰 星

제3봉 성봉은 제천군지의 이름이고 북두칠성에 의한 별자리 이름은 녹존봉이라 하며 천상에 상좌로 보면 천기봉이라 불리운다. 잔나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제천시 청전동 416-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제3봉 성봉 옆으로 새롭도로를 내고 주변은 산뜻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 의림지 방향으로 담은 제3봉 성봉의 모습입니다.

 

 

《제4봉 요미봉 / 第四峯 要美峯》

요미봉은 북두칠성에 의한 文曲峯이고 천상의 상좌로 보면 天權峰이라 불린다. 원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150m 정도 서쪽, 청전두진백로아파트 자리에 있었으나 현재의 자리 제천시 청전동 652번지에 복원하여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독송정, 연소봉, 성봉, 요미봉의 4개의 봉우리가 국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요미봉으로 올라가는 계단.

 

 

요미봉 정상부

 

 

요미봉 서쪽은 일대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제5봉 자미봉 / 第5峯 紫美峯》

자미봉은 북두칠성에 의한 별자리는 廉貞峯이고 천상의 상좌로 보면 玉衡峯이라 한다. 청주지방법원제천지원 뒤편에 위치하고 주택 등 건축물이 들어서 있어 표지석만 명맥을 유지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紫色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기 까지 귀품있는 색으로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주었다. 고관들의 관복의 색깔도 이 자색이며 궁궐과 홍살문, 사찰 기둥에도 자색의 칠漆을 도료로 사용하였다. 제5봉 자미봉의 이름으로 볼 때 자줏빛 아름다움과 무관치 않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 봉우리에 자주색 꽃을 피는 나무가 많았음일까! 아니면 봉우리 정상부에 나무가 없이 황토가 드러났거나 자줏빛 색깔의 바위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을까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아름다운 이름이 아닌가 싶다.

 

 

 

 

 

《 제6봉 아후봉 / 第5峯 衙後峯》

 

 

칠성봉 가운데 여섯번째 봉우리인 아후봉은 아사봉 또는 아뒤봉이라고도 불리며 제천시 중앙에 위치 하여 이 봉우리에 공원을 조성한 후부터 중앙공원이라고 부른다. 아뒤산이라 불린 것은 조선 태종13년(1413년)충주목 제천현이 되면서부터인데 관아의 뒤에 있는 봉우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제천縣의 동헌은 현재 우체국자리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607년 왜적에 의해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후 제일교회 자리에 옮겨지어 300년간 지내오다 1907년 丁未義兵시 일본군에 의해 읍내 전역이 방화로 관아 역시 전소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후봉衙後峯은 관아 뒷산이었기에 때문에 1896년 乙未義兵擧事時에는 남산(정봉산)전투의 지휘사령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충의루忠義樓》

 

충의루에서 내려다본 북쪽 의림지 방향 풍경.

 

 

제6봉 아후봉衙後峯(중앙공원) 정상 모습.

이 공원은 제천시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공원이 있는 이 곳은 옛날에는 아사봉이라고 하였는데, 천상의 북두칠성 정기를 이어받아 용두산 남방 넓은 평원에 솟아 있다는 북두칠성봉 7개의 봉우리중 가장 뚜렷한 독봉이다. 이 고장 제천지역이 내토奈土라는 명칭으로 불려진 삼국시대이래 관아가 이 봉우리의 남쪽에 있었다하여 아후산으로, 그후 시대의 흐름과 어휘의 변화에 따라 아뒤산, 애뒤산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제천지역 里程의 지리적 기준점基準點이 이곳에서 정해졌다는 기록과 이 봉우리에 시체를 암매장하면 제천에 큰화재가 발생하여 유골을 파낸 적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 신성시 되어 왔으며, 수천년동안 제천지역의 역사적 성쇄과정을 지켜본 봉우리로 1896년경에 전개되었던 제천지역의 의병활동의 중요한 지휘거첨이 되었으며 1989년 지금의 공원으로 조성되어 서민의 의견을 거친 후 중앙공원으로 명칭이 정해졌으며 현재 시민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아후봉 정상 남쪽 모습.

 

 

아후봉 정상 동쪽 모습

 

 

중앙공원은 오르는 길이 3군데 있는데 이 오르는 길은 정문격으로 남쪽 방향에 있다. 다른 한 곳은 북쪽에 있으며, 그리고 동쪽 중앙로 인도 옆에 있다.

 

 

《 제7봉 정봉산 / 第七峯 丁奉山》

북쪽 입구에서 바라본 제7봉 정봉산의 모습이다. 주변 언덕진 주택지를 올라와서 정상부를 담은 사진이니 봉우리 자체는 낮을 수밖에 없

다.

 

북쪽에서 바라본 정봉산 정상의 모습.

 

 

마지막 7봉인 정봉산은 북두칠성에서 끝머리로 국자의 자루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제천교육청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7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다. 다른 여섯개의 봉우리가 모두 峯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비해서 정봉산이라 하여 山으로 불리는 것이 특징이다. '남산'이라는 또다른 이름이 있고 1896년 5월 25일 을미의병 당시 중군장中軍將인 안승우 선생과 종사 홍사구 의병이 일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남산 격전지이다. 현재 시민들의 체육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제천시 화산2동 191-84번지에 위치한다.

 

남쪽에서 올라온 방향 북쪽을 담은 사진이다.

 

제7봉 정봉산 정상에서 제천시 중심가인 중앙공원(아후봉)과 의림지 쪽 용두산을 바라본 정경이다.

 

정봉산에서 제천시 동쪽을 바라본 정경이다.

 

 

정봉산에서 제천시 서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올라올 때는 북쪽 입구로 올라왔으나 내려가는 이 길은 남쪽 제천시교육지원청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교육청 건물 뒤가 정봉산 정상이다. 정상에 있는 나무 끝부분이 보인다.

 

 

정봉산 남쪽 기슭에 제천시교육지원청 건물이 들어선 곳으로 내려와 돌아서서 본 풍경이다. 이렇게 제1봉 독송정부터 제7봉 정송산까지 7봉우리를 모두 밟으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반대로 제7봉에서부터 제1봉 독송정까지 일곱 봉우리를 모두 밝으면 예쁜 딸을 얻는다고 한다.  

 

 

2015년7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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