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여주(강천보)간 국토종주남한강자전거도로를 달리다가 이포潽 인증센터 앞에서 옆에 있는 37번국도 건너 야산에 파사성이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 "파사(婆娑)라는 이름에 끌려 오늘의 반환점 여주 강천보 찍고 돌아오는 길에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파사(婆娑)는 신라 초기 왕격인 제5대 이사금 파사와 무관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의 추측은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파사성(婆娑城)은 사적 제251호로 지정면적 35,504㎡, 높이 6.25m의 산성으로 한강 중류의 여주군 이포(梨浦)에서 2㎞쯤 내려가면 강 건너 동쪽으로 해발 약 230 m의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야산의 산성으로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으며 일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현지의 전설에 의하면, 이 城은 신라 파사이사금(이사금=왕 / 재위 80~112)때에 築城하여 '파사성(婆娑城)'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산도 '파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史記에 보면,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의 성은 박씨이며, 3대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물이 뛰어나 5대 이사금에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비계(妃系)가 김씨 한기부(漢기部)의 유력자임은 ‘파사이사금‘이 유찬(楡湌)의 못으로 사냥 갔을 때 이찬 허루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이어 허루는 주다(酒多:나중에 角干)가 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겠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4대 탈해이사금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7년에 가소성(加召城), 마두성(馬頭城)을 쌓았으니,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최초의 축성(築城)기록이다. 94년에 가야 군사가 마두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1,000여명의 기병(騎兵)을 사용하였으니,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01년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으며, 102년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 : 지금의 安康, 안강 南 또는 울진)과 실직곡국(悉直谷國 : 지금의 三陟)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해 준 뒤에 다시 움직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押督國:지금의 慶山)도 항복해 왔다고 한다. 108년에는 다벌국(多伐國:지금의 대구, 혹은 義昌)과 초팔국(草八國:지금의 草溪 혹은 杞溪)을 합병하였다. 》 이와같이 그 어디에도 '파사이사금'이 파사성을 쌓았다는 문헌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기록보다도 더 확실하게 전해오는 것이 전설일 수도 있습니다.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 있어서는 고려사람(김부식.일연) 즉 기득권층이 저술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할 뿐이기에..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
길이 이정도면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늘하나 없는 강가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숲으로 들어서니 나무들이 뿜어내는 숲의 향기에 지친 몸이 활력이 솟아나는 듯합니다.
가파르고 빗물에 흙이 파여 지골(地骨)이 드러난 길이어서 자전거를 끌지도 못하고 둘러메고 겨우 산성 입구인 남문지 앞까지 왔습니다. 땀으로 목욕 한 번 잘했습니다.
<남문지/南門址>
남문지에는 門樓를 세웠던 고주형초석(高柱形礎石)2개와 평주초석(平柱形礎石)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성곽의 일부는 한강 연안에 까지 돌출되어 있어 상류, 하류 그 어느 곳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라 하겠습니다.
남문지에서 서쪽(왼쪽) 정상부를 향해 뻗어 올라간 성벽의 모습입니다.
이 城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로 전해지는 것은 조선조 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섭 의암(僧軍總攝 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둘레 1,100보의 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합니다.
성 안쪽의 모습으로 여러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자리(址)입니다.
남문지를 향해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이포보' 상류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벽의 모습에서 옛 성벽과 복원한 것이 확실하게 구분됨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으로 뻗은 성벽의 모습입니다.
보수되거나 개축하지 않은 본디의 성축으로 철옹성같이 견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상 근처입니다. 무너져 내린 성벽을 새롭게 복원한 모습입니다. 원형에 가깝게 비교적 잘 복원되었습니다.
파사산의 정상이자 파사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입니다.
푯말에서 보듯이 서북쪽 340m 아래에는 축성의 주인공인 옛 장군의 초상을 石刻한 것이라고 일컫는 조각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상입니다. 거대한 암벽에 오목 새김(陰刻) 한 것으로 相好(부처님의 용모)와 동체의 균형이 잘 맞아 당시의 마애불로서는 주목되는 불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마애불의 부근에는 평평한 대지가 있어 기와조각이 수습되는데 이 곳 파사성과 관계있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상에서 바라본 2보루(堡壘)의 모습입니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한강의 이포보가 조망됩니다.
어렴프시 여주시가도 보입니다.
파사산과 이 산성은 그 모습이 원추형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이 산에 딸린 다른 봉우리가 없이 우뚝 외봉으로 자리한 산이어서 이 산정에 오르면 발아래 사방이 굽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강 상류, 하류를 감시하며 敵軍을 제압할 수 있는 천연적 요새라고 하겠습니다.
양평 쪽으로 흐르는 강물줄기와 역광으로 인하여 산이 희미하게 잡혔습니다. 산 정상 높이 230.5m의 낮은 산 임에도 멀리 용문산이 바라보입니다.
남문지로 흘러내리듯 이어진 성벽의 모습이 마치 뱀의 형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상 30m 아래 동문지와 남문지로 갈리는 길목입니다.
남쪽에서 바라본 정상의 모습입니다.
독봉(獨峰)으로 이루어진 곳이어서 나무만 없다면 사방팔방을 시원하게 관망할 수 있어 적을 살피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옛날 60년대 초 내 고향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 21번지,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너편 높은 지대가 야산이었는데 이 산의 길이 당시 그 길과 흡사합니다. 이런 모습의 산이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동이었습니다. 고향은 그곳에 있지만 볼 수 없는 내 고향 압구정동 배꽃이 만발하고 종달새 지저귀며 진달래 곱게 피던 그 때 그 곳 그 모습이 참 그립네요. 이 산길을 걷자니...
보이는 와당편(瓦當片)의 문양들은 깃털 모양의 집선문(集線文)이라고 부릅니다. 삼국시대 5세기경에 유행하던 문양으로 서울 아차산 일대와 아차산성에서도 많이 보인 것과 같은 문양들입니다.
와당에서 붉은 태토로 만든 기와(赤泥瓦當)는 고구려 와당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산성도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세력을 남으로 확장할 시기에 고구려가 점령했던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성내공터에는 빗물에 깎인 곳마다 와당편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건물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양의 암키와와 수키와의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빗물에 패인 길에도 기와조각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성에는 출입문 자리가 남아 있는데 천서리(여주군 대신면 천서리)를 벗어난 곳에 東門址가 있고,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를 면한 곳에 南門址가 남아 있습니다. 이 자리는 남문 터입니다. 발굴조사가 중단되고 빗물에 지표가 쓸려 붉은 살이 드러난 채 여기저기 석재와 와당편이 딩굴고 있습니다.
허기지고 몸도 지치고 파사산성을 쫓기듯이 둘러보고 나들목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국토종주남한강자전거도로로 들어서 양평역을 향해 패달에 발을 올립니다.
2013년 9월15일 양평역~강천보(여주)~양평역 간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잠시 이탈해서 둘러본 파사산성.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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