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근대 회화(近代繪畵)

영운 김용진 필 열매(穎雲金容鎭筆實果)

鄕香 2013. 1. 28. 22:19

 

40세에 이르러 그림을 시작한 김용진의 작품 기조는 士大夫의 餘技로서 이룩한 문인화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技보다는 정신이 앞서고 높은 文氣가 서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군자를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이 열매를 주제로 한 이 화첩은 수준 높은 운치를 보이는 좋은 그림들입니다. 그 <열매> 두 폭은 "畵窓淸供"이라는 화첩 속에 8폭이 들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입니다.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65년대 전후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절에 따라서 영그는 나무 열매를 싱그럽게 표현해 냄으로써 계절에 대한 감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세계가 문기를 내포하고 있듯이 이 일련의 그림들도 구도나 賦彩 등에서 기교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비의 본래 정신의 품격을 느끼게 합니다. 영운(穎雲)은 조선조 후기의 秋史를 비롯하여 말기에 성행했던 문인화가의 화풍을 받아서 수묵 위주의 묵란.괴석 등 文氣짙은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김용진(穎雲 金容鎭1882~1968)의 자는 성구(聖九), 호는 영운(穎雲)·향석(香石)·구룡산인(九龍山人). 특진관(特進官) 김흥규(金興圭)와 대원군의 외손녀인 임천조씨(林川趙氏)의 3남으로 고종19년에 태어났으나 참판 김정규(金貞圭)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조부인 김병국(金炳國)이 영의정을 지내는 등 당시의 세력층인 안동김씨 문중을 배경으로 20대 초반 수원군 군수 및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40대까지 유유자적하며 거문고에 일가를 이루는 등 풍류 생활을 하다가 1919년 이도영(李道榮)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며, 1930년대에는 서화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9년에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서예부 심사위원과 고문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으며,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의 명예회장과 한국서예가협회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과실 / 實果>

韓國 近代 / 穎雲 金容鎭(1882~1968)筆 / 紙本淡彩 23.5×35cm / 個人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