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사진

2012년1월28일 삼각산 산행

鄕香 2012. 1. 29. 00:47

 

 

서울 토박이.. 그렇다 조상 대대로 서울을 떠나 살이를 해 본 적 없는 집안의 서울 촌놈이 그 무슨 역마살이 끼어 몇 해를 두고 산으로 들로 바람처럼 뜬구름잡고 헤집고 다니다가 무슨 까닭인지 고향을 떠나 일면 붙이도 없는 충청도 작은 도시 제천으로 와서 생활한지도 두 해가 가고 있다.

 

이렇게 이 고장을 오게 된 것의 까닭이라면 그 이유일 수 있는 것은 내 어려서의 서울 풍경을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연신내 맑은 시냇가 금빛 모래에서 모래무지를 잡고, 왕십리 길가 초가집 벽을  헐고 낸 조그마한 식당에서 해장국이나 백반을 사먹던 그 구수함, 정릉 아래 길음동 복개천에서 피라미를 잡던 일, 동대문 용두동비행장 논에서 미꾸리, 우렁이를 잡던 일, 길가 가로수 밑에 수북히 쌓인 십구공탄(연탄)재, 금호나루나 서빙고나루 건너 샛강 은빛 모래에서 자라를 잡던 추억들이 내 고향 서울에서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 향수를 피부로 느끼고 만지고 보고 먹을 수 있는 곳, 옛 서울의 모습, 내 고향을 이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북한산이 보고 싶었던 겁니다.

삼십여년을 등 뒤에 두고 생활한 북악산, 30여년의 직장생활을 물러나고 어언 7년을 아름산과 "아띠"의 님들과 다정했던 북한산이 보고 싶어 '아띠'의 북한산 산행공지를 보다가 향내 은은하고 혀를 감칠리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헤네시" 선호도나 맛으로나 단연 '레미마틴', '까뮤' 등과 꼬냑을 대표하는 그 멋진 이름을 가진 '헤네시 대장'이 마음에 끌렸습니다.

 

제천에서 07시:00분 열차를 타고 청량리 09시20분 도착하여 지하철 1호선과 3호선, 6호선을 번갈아 이용하여 독바위역에 도착하니 10시10분 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선한 이름, 향기로운 이름, 감칠맛이 혀에 감기는 그 '헤네시' 대장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체격 좋고 준수함이 단연 돋보이는 잘 생긴 분이 보이기에 인사를 나누니 역시 '헤네시 대장님이십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보는 눈이 살아 있구나 싶어 흐뭇하고 즐거웠습니다.

 

일행을 둘러보니 어제 본 신청자 수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중 반가운 한 분 봉주르대장 정말 반가웠습니다. 오늘 이 산행길인 비봉 - 사모바위 - 문수봉 길은 몇 해 전 겨울에 처음 산행하던 길이고 정들었던 , 학다리님, 진주님, 미모사님, 날으는 곰님, 해송님, 벽영님 바람꽃님, 등 등 많은 분들과 예쁜 추억을 영글리던 길이었습니다. 해송님, 그리고 세상을 달리 하신 진주님을 제외 하곤 지금은 어찌 보내는지 알길 없지만, 이 길은 나에게 참 많은 상념을 주는 산행 길이었습니다.

 

그런 회상에 젖다보니 일행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홀로 산행도 했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산행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뵙고 인사를 나눈 '여로'님의 배려와 다정함에 즐거웠고 문수사 지나 '헤네시대장'님을 재회 했으나, 여로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또 일행을 잃어 여로님과 함께 이곳저곳 음식점을 찾아 봤지만, 결국은 인사도 못 드리고 열차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헤네시' 대장님 한 잔 술이나마 나누지 못해 미안합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불광동 정진공원 운동장에서 등산 전 몸풀기.

 

스트레칭도 하고,

 

 들머리 <정진공원>

 

족두리봉 방향으로 진입,

 

오늘 산행코스 : 불광동 독바위역-정진사-향림단-대머리바위(일명 전두환바위)-비봉능선(사모바위)-문수봉-대남문-문수사-구기동통제소.

 

(북한산 정진공원 지킴터)

 

(향림단)

 

 

향로봉 방향으로,

 

 

바위산에 사람꽃이 피었네.

 

<헤네시 산행대장>

 

 

 

 

<전두환봉우리>

 

 

<비봉 / 碑峰> 진흥왕순수비(模造)와 두 사람이 보입니다.

 

 용출봉과 의상봉 넘어 원효봉, 염초봉에 이어 멀리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가 보입니다.

 

 비봉능선과 사모바위 뒤로 문수봉이 보입니다.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이 나란히 보이고 그 뒤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나란히 보입니다.  

 

 

 

 비봉과 문수봉

 

 

 

동쪽에서 본 비봉과 진흥왕순수비 그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사모바위>

 

 

 

 

사모바위 주변.

 

동쪽 사모바위에서 본 비봉

 

동쪽에서 바라 본 사모바위와 비봉.

 

서울시내와 남산 위 남산타워가 아스라이 보입니다.

문수봉으로 가는 비봉능선길

 

내림길

 

<금강문>

 

 

문수봉으로 오르는 암벽, 철책을 잡고 오르기도 힘이 듭니다.

 

지나 온 비봉능선.

 

이렇게 오름은 계속 이어지고..

 

 사모바위에서 문수봉으로 오르는 길. 돌아보니 사람들이 힘겹게 따라 오르고 있습니다.

 

문수봉과 능선.

 

 

문수봉 정상 (文殊峰)

 

문수사 건너 보현봉 입니다.  

 

문수봉에서 본 사모바위와 비봉능선,

 

아래 <문수사> 건너 보현봉 능선입니다.

 

 

 

 

 

<북차산성 . 북한산성 / 北汊山城 . 北漢山城> (사적162 호 )

이 산성은 1711년(숙종 37년)에 북한산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유사시에 대비해 한양 외곽에 성을 쌓자는 논의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산성입니다. 당시 완성한 성곽의 길이는 7,620보(步) 즉 21리 60보이며,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축성방식을 달리하여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곽시설에는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를 세 곳(동장대 . 남장대 . 북장대)에 만들었고, 성문 6개소(북문.대동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대서문), 암문(暗門) 6개소, 수문 1개소를 두었습니다. 성을 쌓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문제로 삼았던 식수 문제는 99개소의 우물을 파서 해결하였고, 저수지도 26개나 만들고, 8개소의 창고를 두었으며, 성 안에는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을 여러 곳 두었는데, 승군 총섭이 머물던 중흥사는 규모가 136칸에 달했습니다. 1712년(숙종38년)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 규모의 행궁과 140칸에 이르는 군창(軍倉)을 지었습니다. 근래 훼손되었던 대서문.대남문을 보수하였고,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동장대 등은 다시 지었으며, 성곽과 여장 등도 보수 정비하였습니다. (소재지 : 종로구.은평구.성북구.강북구 일원)

 

 

(대남문 / 大南門)

 

 

 <대남문(大南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37년)에 지어졌습니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碑峰)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입니다. 성문 하부는 홍예(虹霓)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했고, 상부(上部)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로 되었습니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된 것입니다.  

 

 

<文殊寺>

서울의 진산인 三角山 정상에 자리한 문수사는 고려 예종(高麗 睿宗)4년(1109년)에 대감탄연국사(大鑑坦然國師)가 개산(開山)하였고, 국사께서는 주위의 절묘한 기암괴석과 경관 천연동굴에 매료되어 이곳을 불법의 유연찰토(有緣刹土)로 정하고 절(佛宇)을 지어 문수암(文殊庵)이라 하고 천연동굴(天然洞窟)을 문수굴(文殊窟)이라 이름(命名)하였다고 합니다.

대감탄연국사(大鑑坦然國師)께서는 참선과 교학(敎學)을 두루 하여 국사로 책봉(冊封)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조 제일가는 명필가(名筆家)로써 그의 필적(筆跡)은 청평(淸平) 문수원기(文殊院記)와 예천북룡사비(醴泉北龍寺碑), 북한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청도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가 오늘날까지 전합니다. 고려불교 중흥의 핵심인 '태고보우국사'께서도 이 동굴에서 정진삼매 중 청의동자(靑衣童子)로부터 茶 한 잔 얻어 마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로 수많은 고승석덕(高僧碩德)의 주석처(住錫處)가 되었으며 신령한 영험도량으로 알려져 오대산 상원사, 고성(固城) 문수사와 함께 우리나라 문수보살 3대 성지로 알려져 국내제일의 기도도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의종(高麗 毅宗)21년(1167년)에 王이 친히 登程하였고, 조선조 문종(朝鮮朝 文宗)원년(1451년)에 문종의 따님이신 연창공주(延昌公主)가 重創하여 한때는 왕가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도 그의 부친이 오랫동안 後嗣가 없어서 이곳에서 기도(祈禱)로 얻어진 인물이고, 이승만(李承晩) 처대 대통령도 그의 자당(慈堂)께서 이곳에서 기도로 얻어진 인물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4.19 직전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히 등정하여 문수사(文殊寺)의 사액(寺額)을 남기고 寺內大衆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어 현재 보존되어 있습니다.

 

 

  <窟寺 內部>  어떤 종교든 믿음은 마음에 빛이다.

 

문수사와 대남문 갈림길, 하지만, 두 길은 대남문에서 만난다.

 

하산 길에 올려다 본 문수봉

 

여기서 머뭇거리다 일행을 잃어 뒤풀이도 못했지...

 

 

안국동사거리, 건너편에 일본문화원과 운현궁이 보인다.

 

산행이 끝나고 나서  뒤풀이로 저녁을 해결하려고 생각을 가졌는데, 님들을 잃어 할 수없이 지리에 밝고 추억어린 광화문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행 버스로 이곳 안국동으로 왔다. 산행 중 몇 조각의 떡만 먹었기에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 생각난 곳은 박물관 광화문시절 자주 다니던 설렁탕집, 지난 날 직장예비군 비상훈련으로 새벽같이 나오면 지정된 식권을 주었는데, 바로 이 안국동 사거리에 있는 '만수옥'이라는 설렁탕전문집이었다. 그 시절도 그립고 설렁탕 맛도 괜찮은 만수옥에 들어서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 시절, 그 젊음에...    

 

 

깔끔한 김치, 깍두기에 은은하고 담백하고 맑은 토종 소고기국물의 맛은 30년이 지나도 변함없건만, 주인할머니는 세상을 달리 하시고 그 며느리가 할머니되어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 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