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서책 (文.書.帖.冊.)

사궤장겸기로회지도(賜几杖兼耆老會之圖)

鄕香 2011. 12. 22. 14:19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원익(1547~1634)이 1623년(인조 1)에 궤장(책상과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연을 베풀었던 일을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에 수록된 것입니다. 사궤장제(賜几杖制)는 품계가 일품(一品)에 이르고 70세 이상 된 자로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할 때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리면서 계속 관직에 머물게 하려는 제도로서 노대신에게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궤장제 때 왕이 교서(敎書)와 함께 술·음식·악공을 하사하고 국가행사로 연회를 베풀어주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기신(耆臣)으로서 기로연을 베풀었습니다.

화면의 상단에 '賜几杖兼耆老會之圖'라는 전서체의 제목을 쓰고 그 아래에 이원익의 집 뜰에서 행해진 기로연의 장면을 묘사하였습니다. 중앙에 설치된 삼산형(三山形)의 차일 아래에는 궤장이 놓여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나뉘어 앉은 기신들은 음식을 먹으며 처용무(處容舞)를 관람하고 있습니다. 이원익은 가운데로 나와 한 기신으로부터 술잔을 받고 있고 차일 밖에는 시중 드는 사람들과 악공들이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래 글씨는 궤장 하사 행사에 참여한 여러 기로회원과 관료들의 관직과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늘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사궤장연첩(賜机杖宴帖)

조선시대(1623년/인조 1년) / 비단에 채색 (絹本彩色) 62.5×48.8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