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서악지역 진흥왕, 문성왕, 진지왕, 헌안왕릉(慶州 西岳地域 國立公園)

鄕香 2011. 11. 22. 12:08

 

<석상 石人像>

진지왕릉(眞智王陵) . 진흥왕릉(眞興王陵) 우측 옆에 조선시대에 통정대부(通訓大夫)를 지낸 사람의 묘 앞에 세운 문인석(文人石)입니다. 좌측 문인석은 두 팔을 가지런히 내려 두 손을 겸손하게 모은 자세에 도톰한 볼에 얼굴이 영기가 있고, 우측의 석상 역시 도톰한 입과 볼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 팔을 접어 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이 여성스럽습니다. 표정이 귀엽고 크기도 100cm 정도의 아담하고 흔치 않은 석상입니다.  좌측 석상 뒤에 보이는 무덤은 진지왕과 진흥왕의 능침입니다.

 

 

선도산(仙桃山 해발 380m)은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 서악(西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악동, 효현동, 충효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많은 신라고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김유신장군묘, 법흥왕릉, 진흥왕릉, 등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과 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무덤인 서악고분군(사적142호) 통일신라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마애삼존석불입상(보물 제62호)가 있는 곳입니다.

지도상 위치에서 선도산 정상 근처(약1.5km) 선도성모사(仙桃聖母祠)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 있는 곳으로 가는 초입 구릉에는 많은 왕릉과 주인을 알 수 없는 봉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러한 고분군을 지나 굽이굽이 가파른 산길을 1.3km를 오르니 선도성모사당(仙桃 聖母祠)과 마애삼존불입상(磨崖三尊佛立像)이 계신 곳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慶州 西岳里三層石塔)보물 제65호>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모전탑 계열에 속합니다. 높이는 4.06m로 서악서원(西岳書院)의 뒷편 선도산(仙桃山)기슭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덩이 여덟 개를 2단으로 어긋물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1층 몸체 남쪽 문틀 양쪽에 인왕상(仁王像)을 돋을새김 하였고,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두어 마치 전돌을 쌓아 올린 형세로 만든 것이며, 몸돌에 비해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이 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탑(模塼石塔)형식의 유형분포를 조사 연구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경주 남산리 동탑을 모방한 듯하며 시대와 조각수법에서 다소 떨어집니다. 

 

 

<신라 제46대 문성왕릉(文聖王陵)사적 제178호> 경주 서악동 산 92-2.

삼층석탑 뒤 선도산(仙桃山) 능선의 고분군 중 한 능으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眞興王) . 헌안왕릉(憲安王陵)과 함께 선도산의 남쪽 구릉 아래쪽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문성왕은 신무왕(神武王)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문성왕(文聖王?~857/재위839~857 )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이며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 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였고,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 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 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능의 크기는 지름 20.6m 높이 5.5m 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 진지 . 문성 .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신라 헌안왕릉(新羅 憲安王陵 사적 제179호>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861 재위 857~861, 김의정)의 능침이다. 진흥왕릉(眞興王陵)과 함께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에 위치해 있다. 지름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헌안왕은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은 왕이다.

헌안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의정(誼靖) 혹은 우정(祐靖)이다.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이고, 어머니는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 혹은 昕明夫人) 김씨이며, 할아버지는 예영(禮英)으로 원성왕의 아들이다. 슬하에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다음 왕인 경문왕의 비가 되었다. 그리고 궁예(弓裔)는 헌안왕의 서자로 알려져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金明)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使行)하였고, 왕위계승쟁탈전이 일단락된 뒤, 즉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 뒤에는 병부령(兵部令)을 거쳤다가 다시 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된 듯하다. 그리고 857년에 서불한(舒弗邯, 角干)으로서 조카인 문성왕의 유조(遺詔)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져서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膺廉: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孔雀趾)에 장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신라 진지왕릉(新羅眞智王陵)사적 제178호>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576~579 )의 陵으로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며,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居柒夫)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측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에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政亂荒淫)을 이유로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것과,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577년에 이찬(伊飡) 세종(世宗)이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新羅中古期의 對中認識(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5, 1980)

 

 

 

<신라 진흥왕릉(新羅眞興王陵)사적 제177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진흥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등의 순수비(巡狩碑)를 세웠습니다.

 

 

< 24代 진흥왕(眞興王)534~576 >재위540~576.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아래쪽에 위치한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의 陵이다. 진흥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하여 구진(仇珍), 비태(比台), 탐지(耽知), 비서(非西), 노부(奴夫), 서력부(西力夫), 비차부(比次夫),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比斯伐:지금의 창녕)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阿羅加耶:지금의 함안)와 비화가야(非火加耶:지금의 창녕)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에 백제와 연합하였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大耶州: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에 비열홀주(比烈忽州:지금의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로

임명하였는데,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듯하다.

이와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赤城碑)가 이를 말하여주고 있다.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선,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奈勿王系)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중고왕실(中古王室)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奉佛)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549년에는 양(梁)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모셨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祗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都城佛敎的性格)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 1, 700여권을 진(陳)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능가승만경 능 伽勝經" 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護國佛敎)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시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중흥의 군주였기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그리고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 진흥왕의 陵은 업적에 비해 다른 왕릉에 비하여 협소하다. 봉분의 크기는 지름 20m, 높이 5.8m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李基白, 韓國硏究院, 1978).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李基東, 韓國硏究院, 1980) . 眞興大王의 偉業(李丙글, 韓國古代史硏究, 1976).眞興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Ⅰ, 1913).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今西龍,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선도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옆에 있는 이 크고 작은 고분들은 이제까지의 왕릉들(진흥왕릉.진지왕릉.헌안왕릉.문성왕릉)이 있는 능선 옆 다른 능선에 위치한 고분들이며, 무덤의 주인이 누군인지 밝혀지지 않은 봉분들입니다.

 

 

 1km 정도의 평범한 흙산의 구비지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정상을 알리는 푯말이 보입니다. 보고자 하는 마애여래삼존입상(磨崖如來三尊入像)이 있는 선도암(仙桃庵)은 300m 남았네요.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慶州西岳洞 磨崖如來三尊入像)보물 제62호>경주시 서악동 산92-1 .

 

 

신라 사람들은 경주의 서쪽인 선도산(仙桃山) 정상부근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생각하고 이곳에 아미타 삼존불(阿彌陀 三尊佛)을 새겼습니다. 조각하기 힘든 암석에 높이 6.85m나 되는 거구의 여래입상(如來立像)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아미타여래 입상을 본존으로 하여 왼쪽에는 불상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있는데, 두 보살상은 마애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옮겨온 화강석으로 다듬어진 것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 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모양만 다를 뿐 관세음보살상과 동일합니다. 조각 솜씨로 보아 7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회청색 석회암으로 된 암벽면에 새겨진 본존불은 돌의 특성으로 갈라지고 거의 떨어져나가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성모사(聖母祠)>

선도산에는 선도 성모(仙桃 聖母)라는 설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가 아직 건국되기 전 중국 황실에 사소(娑蘇)라는 공주가 있었답니다. 공주는 바다 건너 진한(辰韓)땅에 와서 이곳이 좋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황제는 공주에게 편지를 써서 솔개의 발에 묶어 동쪽 진한 땅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솔개는 구름 위를 날아 바다를 건너 진한 땅에 도착하여 사소공주 방 앞에 앉았습니다. 아버지 황제의 편지에는 「사랑하는 사소야! 솔개가 앉아 머무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아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소는 아버지가 계시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솔개를 날렸습니다. 솔개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더니 선도산에 앉았습니다. 사소공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곳에 집을 짓고 선도산을 지키는 지신(地神)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사소공주를 선도산에 계시는 지신이라 하여 「선도성모(仙桃聖母)」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26대 진평왕 때는 안흥사(安興寺)라는 절에 지혜(智惠)라는 여승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잘 섬기고 남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착한 여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법당이 낡아 수리를 해야 하나 힘이 없어 방법이 없던 중, 어느 날 선도성모가 찾아와서 "내가 서있는 자리 밑을 파 보면 황금 10근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법당을 수리하고 여러 천신들을 잘 모시고 동쪽에 토암산, 남쪽에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에 태백산 등 오악의 산들을 만들어 해마다 봄, 가을 두 계절 10일에 법회를 베푸는 것을 잊지 말아라."라고 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여승은 성모사에 가서 성모상 밑을 파 보았더니 황금 10근이 나와 절을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 54대 경명왕은 매 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 선도산에서 매 사냥을 하다가 매를 잃어버렸습니다. 신하들을 풀어 아무리 찾아도 매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할 수 없이 성모(聖母)에 「만약 매를 찾게 해 주신다면 벼슬을 드리겠습니다.」하였더니 어디선가 매가 날아와 상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경명왕은 성모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선도성모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이라 전하기도 합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성모사와 마애삼존불의 전경)

 

 

2011년 11월8일 <鄕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