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원삼국 三韓時代(馬韓.辰韓.弁韓

영산강유역의 문화 (石室墳의 展開)

鄕香 2011. 1. 28. 11:29

 

3세기에 발생하여 4~5세기에 걸쳐 성행한 옹관고분은 나주 반남지역에서 거대분구와 화려한 부장유물로 最盛期의 고분문화를 형성하였고 5세기 후반에 이르면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장주체가 변화된 石室墳이 나타나게 됩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석실분은 입지와 분구형태, 석실구조 등 기존의 토착묘제인 옹관묘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그 축조집단의 성격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은 475년 이후부터 공주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그 구조와 부장유물이시기에 따라 변화되고 있습니다. 영산강유역에서 조사된 석실분도 5세기 중.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시기적으로 백제의 석실분 사용기와 일치하지만 석실의 구조에 있어서 백제 중심지역과 영산강유역의 석실분은 차이점이 보입니다. 공주지역 석실분은 평면형태가 方形이고 석실의 네 벽을 가운데로 크게 좁혀 중심부분에 한장의 판석을 덮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부여지역에서는 장방형의 평면의 평천정 석실분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의 경우에는 초기 석실분부터 편면이 장방형이고 천정은 석실의 장변 두 벽을 약간 안으로 기울이지게 한 다음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석을 덮는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영산강유역 석실분들에서 보이는 이러한 몇 가지 특징들은 석실 내부에 옹관이 안치돤 나주 복암리 3호분의 최근 조사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옹관묘 축조집단과 석실분 축조집단이 계통적으로 어떤 연관을 갖는가의 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옹관묘의 유구와 석실분의 유구가 동일분구 내에서 확인되는 조사 예가 근래 늘어나고 있습니다. 靈岩 水山里 조감고분이나 務安 九山里 호동고분의 분구내부에는 옹관과 석실유구가 근접해 있으면서 옹관묘가 석실분의 영향을 받아 변화도는 과정이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석실분과 관련하여 최근 조사되고 있는 前方後圓墳의 성격에 대한 연구도 점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주 복암리3호분 전경 / 羅州 伏岩里3號墳 全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