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청량산 청량사 (경북 봉화.명호면.북곡리)

鄕香 2010. 4. 6. 22:12

산, 그 자체만을 말하자면 전북에 마이산이 있다면, 경북에는 청량산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산이 모두 퇴적암으로 인한 특이한 지질의 생김으로 지질학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지만, 산세로 볼 때는 全北의 馬耳山은 글자 그대로 두 개의 봉우리가 합쳐 말의 귀와 같다는 것으로 인한 것이고, 청량산은 산세가 기이하고 절묘한 바위들의 형세와 가파른 산세에도 불구하고  골짜기마다 맑고 서늘한 물이 풍부하며 곳곳에 샘물이 솟아 넘치니 淸凉山 이라는 이름에서 참으로 걸맞습니다. 기암괴석에 어우러진 휘어 비틀어진 아름다운 곡선의 짙푸른 소나무는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으며, 그 절묘한 아름다움을 보노라면 내가 곧 신선이고 이곳이 선계였습니다.      

 

 

청량산을 감아 도는 이 물의 水源이 바로 청량산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청량산은 물이 많았습니다. 산이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에도 골마다 청량한 물이 폭포처럼 곤두박질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청량산으로 가는 문이라는 현판이 달린 웅장한 門이 그렇게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입장료가 없어서만은 결코 아닙니다. ㅎㅎ

 

좀 가다보니 아담하고 산뜻한 청량사 일주문이 반깁니다. 근래에 세운 듯 담백하고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화사한 단청이 없어서 일까요.

 

수정보다 맑고 투명한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편린들이 조각조각 반짝이며 은하수처럼 은빛 속삭임으로, 어릴 적 동요처럼 그리움으로 파랗게 돋아 오릅니다. 아, 보기만해도 생기로움이 솟아나는 연두 빛 초록의 싱그러움이여, 자연의 아름다움이여~~

 

퐁퐁 포르륵 ~~~ 퐁  그 어떤 음율도 이 보다 고울 수는 없을거예요. 이렇듯 고운 자연의 소리가 곧 천상의 노래요 동시가 아니겠어요.

 

청량사 가는 길 초입은 잠시 이런 콘크리트 길이지요. 길지는 않고요. 한 서너 마장 쯤 됩니다. ^^

 

청량사가는 가파른 길에 쉬엄쉬엄 이리저리 올려다보니 산봉우리들이 참으로 잘 생겼습니다.

 

이쪽저족 보노라니 힘든 줄 모르겠어요.

 

매우 가파른 골짜기에 물이 급살을 탑니다. 물이 완만히 흐르는 곳도, 고이는 곳도 아닌 곳으로 저리 빠른 속도로 흐른다면 얼마나 수원이 풍부한가를 짐작이 갑니다. 원만한 산은 이 정도의 경사라면 물이 흐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변이 습한 기운도 전혀 없는 쾌척한 환경입니다.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인데, 거리 표시가 없군요. 청량사는 저 만치 50m 전방에 보이지만,  먼 거리가 아니라면 응진전이나 입석을 둘러보고 청량사로 가고 싶었거든요.  

 

立石이 어느 정도 가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들어선 길에, '산꾼의 집'이란 건물이 나타납니다. 뜰에는 온갖 옛 잡동사니들로 가득했습니다. 없는 건 주인 뿐~~~

 

한참을 가도 입석은 보이지 않고 침팬지 얼굴처럼 생긴 바위산 봉우리만 보입니다. 정식 이름은 연화봉의 한 枝峰인 것 같습니다.

 

높은 봉우리 앞에 낮은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마치 훈장 앞에 모여 앉은 초동 어린이처럼 보입니다.

 

 

아득히 먼 아늑한 곳에 정자가 호젓한데, 뒷산엔 잔설이 희끗희끗 웃습니다.

 

바위산 봉우리지만 뾰족함이 없어서인지 부드럽고 포근하게 아늑함을 줍니다. 넉넉한 여인의 품속처럼.... 

 

한참을 처다보고 있노라니 평온함에 잠이 옵니다.

 

둥근 봉우리에 잔잔한 나목의 잔가지를 아늑하게 감싸 안은 푸른 솔가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길게 가르지른 소나무 가지가 버텨내는 그 힘의 응력에 그저 놀라울 뿐 ...

저 아래 청량사가 아슴아슴 졸고 있습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 .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8)에 의해 중창된 고찰입니다.

本殿은 琉璃寶殿이며, 금탑봉 아래 應眞殿은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참을 둘러보며 가도 입석은 보이지 않기에 되 집어온 길목에 청량정사와 산꾼의 집이 나란히 정답습니다.

 

청량정사(淸凉精舍)는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사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입니다.

그 뒤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이황(1501∼1570)은 ‘동방의 주자’라 불릴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간 사람으로 그는 숙부인 이우를 따라 이곳에 와서 학문을 익혔으며, 또한 여기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국문시가인 ‘도산십이곡’을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청량정사 옆에 있는 건물로  "산꾼의 집"이란 간판이 보입니다. 茶라도 한 잔할 양으로 살펴보니 문은 굳게 잠기고 온갖 옛 풍물만 가득 모여 도란도란 옛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청량사로 들어서는 길은 가파르다 보니 토사방지를 위해 이렇게 침목을 박아 깔았습니다. 또한 샘물이 많다보니 길옆에 기왓장으로 수로를 만들어 물에 길이 질척이지 않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사찰 경내에도 이렇게 맑은 물이 철철~~ 대개 물이 많으면 주변이 습한 법인데, 이 청량산은 습한 환경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연유는 地質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나무를 밟고 오르는 감촉이 어느 길보다도 즐겁고 경쾌하네요. ^^

 

청량산(淸凉寺)에는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봉, 의상대라는 명칭이 남아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蓮臺寺라는 寺刹과 淸凉寺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사찰로 오르는 길옆 바위틈새에 이처럼 샘물이 흘러 고여 넘칩니다.  

 

安心堂

사찰 입구 옆에 제법 운치있는 찻집이 있습니다. 이름도 편안한 '안심당'  마침 전통찻집이란 푯말이 있어 들어서려니 문은 잠겼고 주인이 없어 아쉬웠지요.

 

굳게 닫힌  찻집 문, 찻집은 있으나 茶香은 묘연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사월 초파일이 가까웠나 봅니다. 곳곳 마다 알록달록 연등이 아릅답습니다.

 

 

초입에는 기왓장으로 물길을 내었더니 여기는 통나무에 홈을 판 대통으로 물길을 냈습니다.

 

이곳이 청량사 사찰내에서는 가장 넓은 장소입니다. 산이 가파르다 보니 사찰 곳곳에 축대를 쌓아 터를 잡고 寺屋을 지었습니다.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

 

 

삼라만상을 일깨우치는 4대법물이 있는 범종각이지요. 법고. 범종 . 운판 그리고 목어가 지금은 침묵에 싸인 채 고요만 흐릅니다.

 

평풍처럼 산을 등에 두르고 산사는 축대 한 층, 연등 한 층, 그렇게 몸치장을 하고 님(佛)을 기다립니다.

 

 

경북 유형문화재제47호인 유리보전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특이하게도 종이재질을 이용한 紙佛로서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 성취의 영험이 있는 약사도량입니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입니다. 그리고 공포栱包는 外一出目 內二出目의 형식으로 첨차檐遮의 짜임이 고졸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蓮花形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前面 중간 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枓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사찰 경내 동편인데요 장독대가 운치가 있습니다.

 

상당히 가파른 지대이건만 계곡에 물기가 촉촉합니다.

 

山神은 본디 우리의 토속신앙인 것을 불가에서 포용한 신이지만 산신당은 늘 높은 윗자리를 차지하고 온 사찰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ㅎㅎㅎ ^^

 

佛心을 보듯 빗질도 정갈한 절 마당에 하늘을 덮은 분홍빛 연등이 이채롭습니다.   

탄불을 축하 함이 수많은 염원과 간절함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곱고 화사하게 피어 밝히고 있듯이 세상 어둠고 응진 곳에도 이리 밝혀 주소서... 

 

탑만 없었다면, 하늘에 절이라도 하고 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祭壇처럼 느껴집니다.

 

장독대를 기와(瓦當)로 마치 벌집처럼 정교하게 담을 둘렀습니다. 보시기에 괜찮지요? 입맛도 당기고요. ^^

 

축대가 연등인지 연등이 축대인지 그 비례가 절묘합니다.

 

되 돌아 가는 길에 물줄기가 대롱을 타고 내리며 배웅을 합니다.

 

茶 한잔이 못내 아쉬워 돌아보니, 安心堂이 無心으로 말없이 無香만 피워냅니다.

 

오르지 못한 봉우리가 다음을 기약하라는 듯 고운 빛으로 눈길을 줍니다.

 

이것이 바윗돌인가  범벅 응고된 콘크리트인가 참으로 우주의 무한한 힘이여 능력이여 신비함이여,  티끌 같은 나의 존재여~~~

 

 

자갈과 모래를 섞어 만든 콘크리트 같은 모양의 퇴적광상물(堆積鑛床物)의 바위, 백악기(중생대 말기 약 1억 4천만년~ 6천만 년 전)에 바람과 유수로 생긴 퇴적암, 만의 세월에 형성된 이 불규칙한 덩어리들,  햇살은 암벽에 수 없이 박힌 자갈들에 복사되어 번득이는 광채의  눈으로 손짓합니다, 수억 년을 이 자리에 버티고 서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넓은 가슴으로 안겨오라고, 빠져나간 차돌들의 자리매김으로 자란 바위손이 녹갈색의 푸름으로 손짓합니다.

 

 완만한 고갯길 구릉 가운데 산 모양의 우뚝 솟아있어 산을 인위적으로 만든 모형처럼 보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입니다. 사람들은 "입석立石"이라고 부르네요.

 청량사를 내려와 차로 고개를 오르니 도로 가운데 이렇게 있는 '입석'을 산에서 절에서 찾겠다고 헤맸습니다요~~~ ㅎㅎ

 

볼 것도 볼 곳도 많은데 갈 곳은 멀고 날은 저물어가니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섭니다.

 

봄볕처럼 포근함으로 감싸오던 청량산이여, 맑고 푸르러 서늟하고 시원한 물이여, 아쉽구나 다시 오마~~~

 

 

아름다운 山河여 淸凉이여 신선한 바람이여 나 이에 머물지 못함이 서럽지만은 않았노라. 내 마음 이에 있나니... 

 

 

길은 어두워 가는데 나그네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에헤야 가다 못가면 이 밤을 어이할꼬...  2010년 3월 어느 날에,  鄕

 

 

『淸凉精舍』

본 건물(建物)은 송재 이우(松齋 李瑀)(1469∼1517)가 건립(建立)하여 질(姪) 온계(溫溪), 퇴계(退溪) 서(壻) 조효연(曺孝淵), 오언의(吳彦毅)를 가르치던 건물(建物)로서 그후 문순공(文純公)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이 이곳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도(修道)하며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하던 곳이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이곳에서 저술(著述)하였다고 합니다.
건물(建物)은 정면(正面) 5간, 측면(側面) 1간반 규모(規模)로서 좌측퇴간(左側退間)은 통간(通間)으로 온돌방(溫突房)을 들이고 나머지 사간(四間) 전면(前面)은 반간(半間)을 퇴간(退間)마루로 넣고 좌래간(左來間)과 어간(御間)은 이간통(二間通)으로 폐쇄(閉鎖)된 마루방을 들였습니다. 마루방은 바닥을 우물마루로 하고 전면(前面)에 사분합(四分閤) 들문을 달아 필요시 개방(開放)을 가능(可能)하게 배려(配慮)하였고 배면(背面)은 머름을 들이고 쌍여닫이 판장문(板墻門)을 달았습니다. 우래간(右來間)과 퇴간(退間) 역시 이통간(二通間)으로 온돌방(溫突房)을 들였습니다. 전면(前面)에 반간(半間) 정도(程度)의 퇴(退)를 내어 좌우측(左右側)의 동선(動善)을 용이(容易)하게 배려(配慮)하면서 원주(圓柱)를 세워 격을 높이려 하였습니다. 좌측(左側) 온돌방(溫突房) 전면(全面)과 마루방 배면(背面)에 퇴(退)를 달아 내고 전면퇴간(前面退間) 우측(右側)은 판벽(板壁)과 판문(板門)을 달아 관리사(管理舍)와 통(通)하게 하였습니다. 가구법(架構法)으로는 내진주(內陳柱) 위에도 주두(柱頭)를 얹고 중도리(中道理)의 지주(支柱)는 주상(柱上)에 공아(拱牙)를 쌓아 하중(荷重)을 받게하고 종량(宗樑)은 판대공(板臺工)에 공아(拱牙)를 끼웠습니다. 
<진성 이씨 관리 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