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外國)/옛 프랑스 도자기(프랑스)

1 . 파이앙스 도기 (Le Faience)

鄕香 2010. 3. 24. 15:46

 

프랑스에서 토기 제작의 역사는 일찍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로마 제국 점령기에 골족(로마식으로는갈리아라고) 도공들에 의해 제작된 정교한 거푸집 장식의 적색도기는 그 우수성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야만족의 침입은 이러한 도기 제작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중세의 수 세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에는 이탈리아 피엔자로부터 '파이앙스'라 불리는 새로운 도예 방식이 전해졌다.

이는 산화주석이 첨가된 불투명한 유약을 기포가 많은 질흙의 도기 위에 시유하는 것이 었다.

이러한 시유 기법은 이미 9세기경에 시리아의 아랍인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기법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백색 바탕 위에 대단히 선명한 색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을 모사하는데 매우 적합했다.

콘라드 형제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공들이 이주하면서 16세기 말 느베르 시에서는 최초로 정규적인 파이앙스 요업소가 자리잡게 되었다.

콘라드 형제는 화가 쥴 검방의 도움을 받아 당시 두 가지 양식을 유행시켰다.

첫째는 화가들이 캔버스를 다루듯이 성서나 신화적 장면을 파이앙스 도기의 표면에 채색하여 옮긴 것이고,

두번째는 백색 바탕을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여 청색과 황색으로 채색된 가벼운 장식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었다.

 

1630년경 느베르에는 극동에서 시작된 또 다른 양식이 소개되었다.

이 또한 이탈리아계 도공의 중개로 전해진 것으로 짙고 옅은 청옥색의 꽃과 동물 문양들이 그것이다.

꽃 문양 그릇들은 오늘날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양이 당시에 매우 희귀했을 것이라라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문양들은 결코 유럽에까지 확산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파이앙스 도기에는 당시 도공들이 능력을 발휘하여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해낸 중국인물상의 예처럼,

중국 자기에 나타난 장식 의장을 직접 모방한 것들도 나타났다. 결국, 백색 바탕 위에 파란색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이 17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느베르에서는 대단히 괄목할 만한 또 하나의 전형적인 장식을 개발하였는데 파란 바탕에 백색 문양을 그리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빼어난 도기들에 그려진 문양들은 종종 이스탄불의 시장에 내놓기 위해 이즈니크에서 제작된 터키 도자기를 모방하고 있다.

17세기 느베르의 파이앙스 도기는 놀라운 급성장기를 맞이하였으며 요업소들은 번창하고 증가하였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수요에 따른 엉청난 양의 생산품을 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는 저하되었다.

 

1644년 루앙에는 에드므 뽀트라의 주도 하에 새로운 요업소가 설립되었다.

이 곳도 역시 백색 바탕에 청색과 황색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이탈리라적인 제작 방식의 모방에서 시작하였지만,

이내 '자스'를 뜻하는"브로드리"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발전하여 놀라운 성공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기법은 물레로 성형한 원형의 용기 가장자리에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고안된 삼각형 문양을 일컫는다.

원래 이 문양들은 중국 항아리에서 목과 어깨의 장식으로 흔히 활용되던 꽃잎파리 장식의 원리를 모방하고 있었으나,

루앙의 도공들은 이 기법을 접시테두리에 넣거나 또는 장식의 원형으로 삼겠다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창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우선 청옥색으로 장식되었던 이것은 곧 바로 보다 효과가 뛰어난 붉은 벽돌색으로 가필되었다.

이렇게 해서 루앙의 요업소들은 보다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자, 금은 세공인들의 창의성을 모방하는 한편 주로 식기를 위주로 하는

실용 도기의 형태를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1720년경 파이앙스 도기에서 청옥색의 유행은 사라졌지만 중국의 영향은 여전하였다.

이 때부터 "파미유 베르트"라는 녹색조를 띤 중국산 자기의 매력에 고취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 '카키에몬' 가문 도공들의 작품을 한국도자기로 착각하여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때때로 프랑스에서는 일본 카키에몬 도공들에 의해 창조된 양식을 모방한 도자기들을 '한국적 장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세기 내내 루앙과 생스니와 같은 그 밖의 요업소들은 비록 그 장식의 창안과 의미를 항상 이해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동양의 도자기를 모방하였다. 

18세기에 프랑스의 파이앙스 도기 생산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주요 도시들에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작업장이 분포되어 있었고,

이들 작업장은 일상 용도를 위한 백색 도기와 장식이 많이 들어간 고가의 재품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각각의요업소들마다 지역적 용도에 걸맞는 고유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지만 모두 동일한 유행에 따라 제작에 임하였다.

마찬가지로 마르세이유 요업소 또한 17세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청옥색 도기를 제작하였고,

1700년에서 1740년 사이에 재유행한 다채색 장식 역시 사용되고 있었다.

1750년까지 프랑스 도공들은 파이앙스 도기를 '드 그랑' 다시 말해서 성형된 기물에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입혀 동시에 높은 열로 구어 내는

제작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고온 소성 방식으로는 도기 표면에 나타낼 수 있는 색은 백색, 청색, 황색, 녹색, 자흑색(산화망간) 황토색의 6가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부터 독일에서 사용되던 '저온 소성'의 번조법을 발견한 덕분에 하얗게 미리 구운 파이앙스 도기에 문양을 그리고 다시 약한 불에서

굽는 저온 소성법응 터득하게 되었다.

이 방식을 이용하게 되면서 단지 750도의 낮은 온도에서도 여러 가지 색채를 구워낼 수 있었고

장미빛처럼한결 더 까다로운 색을 내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파이앙스 도기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 . 프랑스 예술진흥협회〉협찬 : 코제마

  <프랑스 도자 명품전시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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