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다. 어려서 숙부 만성(晩成)에게 수학하고,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 되었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찬집청기사관(纂輯廳記事官)을 겸하여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했다. 1707년 봉교(奉敎)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했으며, 이듬해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1711년 이조정랑으로서 문학을 겸했다. 이어 형조참의·병조참의·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뒤 1716년 동부승지로 승진했다. 이때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둘러싼 시비가 일어나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논박했다. 1719년 부제학을 거쳐 한성부우윤으로 있다가 균전사(均田使)로 영남지방에 내려가 당면한 토지정책을 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러나 곧 다시 등용되어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던 중 소론의 재집권으로 삭탈관직당한 데 이어 신임사화로 숙부 만성이 옥사하자 정계에서 물러나 인제(麟蹄)의 설악으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재집권하자 부제학에 복직하여 대제학·이조참판을 지냈다. 그러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성립되면서 다시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했다. 이후 여러 번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군흉(群凶)을 몰아낼 것을 주청한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두 사양하고 용인의 한천(寒泉)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길러내는 데 전념했다.
이재초상(李縡肖像)
조선시대(18~19세기) / 筆者未詳 /비단채색 97×56.5cm / 국립중앙박물관所藏
'조선시대(朝鮮時代) > 옛 인물초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자 미상 조말생 초상(筆者未詳 趙末生 肖像) (0) | 2012.01.16 |
---|---|
조문명 초상화(趙文明肖像畵) (0) | 2009.12.29 |
성주 이씨 파조 이조년 초상(星州 李氏 派祖 李兆年 肖像) (0) | 2009.10.26 |
- 채용신필권기수초상화(蔡龍臣筆權沂洙肖像畵) (0) | 2009.03.23 |
- 서헌순 초상화(徐憲淳 肖像畵) (0) | 2009.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