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가야 유물(伽耶遺物)

가야 신라에 병합시기의 양식문화

鄕香 2009. 8. 27. 13:22

 562년 대가야의 멸망이후 가야지역은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급격히 신라문화를 수용하게 됩니다.

신라의 지방제도인 군(郡)-성 . 촌(城 . 村)으로 편제되고 신라양식의 토기와 굴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 유행합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어 갈 무렵 가야의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토기들은 신라양식으로 완전히 통일되면서 같은 토기문화로 바뀌어 갑니다.

 

통일양식토기란 6 -7세기경 신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넓힌 한강이남과 강원도지역과 가야의 전 지역에 걸쳐 출토되는 같은 모양과 종류의 토기를 말합니다. 이 토기들은 굽다리가 짧고무늬도 단순하며 규격화된 같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껴묻히는 양상도 비슷하여 낮은 굽다리접시(短脚高盃)와 목꺽인항아리(附加口緣長頸壺)를 주된 조합으로 하여 출토됩니다.

 

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 백제의 그것을 본받아 가야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만들어집니다. 가야의 굴식돌방무덤은 돌덧널무덤의 그것처럼 긴네모꼴의 평면구조이지만, 신라에 통합된 뒤에는 네모꼴로 바뀝니다.

합천 저포에서는 D-1호의 긴네모꼴돌방이 E지구의 네모꼴돌방으로 바뀌고 있어 이러한 평면구조의 변화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주검을 여러 차례에 걸쳐 묻을 수 있음으로 부부나 일정 범위의 가족을 같은 무덤에 묻게되는 등 장례습속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김해 구산동 고분을 들 수 있는데, 하나의 돌방과 딸린돌덧널 및 딸린무덤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덤길을 통해 세 차례에 걸친 매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무덤에서는 6세기 후반견의 통일기 양식토기와 철기 및 꾸미개가 출토되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가야의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김해 禮安里고분군, 합천 산가면 良田里古墳群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통일기양식문화의 전개는 가야문화가 신라문화에 통합되는 과정으로서 지역마다 특색을 띠고 다양하게 펼쳐진 가야문화가 하나의 통일된 신라 지방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먼저 거대한 봉분의 축조가 사라지고 토기나 철기 등많은 유물을 껴묻어주는 풍습도 없어지게됩니다. 

 

이 무렵 낙동강하류에서는 껴묻거리 가운데 비실용적인 아주 작은 살포나 덩이쇠가 묻혀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토기의 겉면에 대간(大干) . 말(末) . 정물(井勿) 등의 문자가 새겨진 것들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지방에서도 문자를 사용하는 계층이 늘어나고 문자의 해독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형고분이나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던 화려한 무늬가 장식된 허리띠가 통일기양식문화로 접어들면 단순하면서 같은 모양으로 통일되고 보다 작은 무덤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방의 유력자들이 신라로 부터 의복을 하사받아 입게 되면서 널리 사용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야 제국(諸國)은 신라에 통합되는 방식과 과정의 차이에 따라 신라가 베푼 지방지배의 통치양상도 지역마다 지방마다 差別化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금관가야 세력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가야의 지역사회는 신라에 통합된 뒤에도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문화 역량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김해 구산동 고분(金海 龜山洞 高墳)

 

 

 

 

 

 

 

 

청동칠주령(靑銅七珠鈴)

伽倻5世紀/釜山 福泉洞21 - 22號墳/ 높이21.9cm,지름17.6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