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대왕 / 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1
《단경왕후 신씨/온릉》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
《장경왕후 윤씨/희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서삼릉 내
《문정왕후 윤씨/ 태릉》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313-19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위치하는 靖陵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1488 - 1544, 재위1506-1544)임금의 陵이다.
中宗은 성종19년(1488) 3월5일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성姓은 李, 휘諱는 역懌 아명은 구등은금이(仇等隱金伊)이시다. 성종25년(1494) 4월6일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지셨고 신수근의 따님이신 愼氏(단경왕후)와 혼인하셨고, 13세가 되는 해에 출궁하셨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의 오라비이므로 연산군과 중종은 이복형제임과 동시에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연산군 12년(1506년) 9월2일 연산군 폭정으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반정(중종반정)에 성공함에 따라 반정세력에 의해 異腹 兄인 연산군이 폐위된 후 1506년 9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셨다. 따라서 신씨도 왕비에 오르셨다. 이에 반정세력들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따님인 단경왕후를 궁에서 내쫓을 것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왕비 신씨를 폐위하여 사가로 내보내셨다. 이후 윤여필의 따님을 장경왕후로 책봉하였으나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셨고, 다시 윤지임의 따님을 문정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셨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았고 鄕約을 실시하여 유교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키고 서적 편찬 사업도 활발히 진행하여 인쇄술의 발달에도 기여하였으며,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개혁을 도모했으나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과 맞지 않았고 반정 세력 간에 정치적 혼란만 거듭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1544년 세자인 仁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에 돌아가셨다.
사 후 서삼릉에 있는 제1繼妃인 장경왕후(章敬王后 禧陵) 서쪽 언덕에 모셔졌으나, 명종17년(1562년) 제 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이장되셨다.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는데, 옮긴 능도 장마철이면 침수를 면치 못했다. 《 선조실록 》의 " 정자각 앞이 지세가 낮아 장마가 질 때마다 강물이 넘쳐 섬돌 밑까지 들어오므로 재실에서 배를 타고 왕래하였다." 라는 기록으로 그 피해를 알 수 있겠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文定王后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홀로 안장되셨다. 중종의 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는 거창 신씨 수근의 딸이자 연산군 부인 신씨의 질녀로 중종 반정 때 폐위되어 사가로 쫓겨 나갔다가 영조때 복위하면서, 溫陵(경기도 양주시)에 모셔졌다. 이로서 중종과 세 분 왕비,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능은 모두 따로 흩어지게 되었다.
《중종대왕릉역 中宗大王陵域》
〈중종대왕 정릉 비문 中宗大王 靖陵 碑文〉 (前面文)
朝鮮國 中宗大王 靖陵
〈중종대왕 정릉 비 中宗大王 靖陵 碑〉 (음기 陰記)
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皇明弘治元年戊申三月五日誕生 初封晉城大君 正德元年丙寅九月二日卽位
嘉靖二十三年甲辰十一月十四日傳位于仁宗同月十五日昇遐 乙巳二月葬于高陽禧陵
嘉靖四十一年壬戌九月四日移葬于廣州宣陵東岡乾坐之原 在位三十九年 壽五十七 皇朝賜諡恭僖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八年乙亥二月 日立
〈중종대왕 정릉 비 음기 中宗大王 靖陵 碑 陰記〉 〈역문 譯文〉
중종공휘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은 명나라 홍치 원년(1488) 3월5일 탄생하셨다 처음에는 진성대군에 봉해졌고, 원년(1506)9월2일 왕위에 오르셨다. 가정 23년(1544) 11월14일 인종에게 양위하시고 같은 달 15일 승하하셨다. 을사년(1545) 2월 고양 희릉에 장사지냈다. 가정 41년(1562) 9월4일 광주 선릉 동쪽 언덕 동남향 둔덕으로 이장되었다. 재위 39년, 수령57세이셨으며 명나라에서는 시호 공희(恭僖)를 보냈다. 영조 31년(1755년) 2월 일 세움
〈중종대왕 정릉 비각 中宗大王 靖陵 碑閣〉
〈정자각 丁字閣〉 한자 丁자 모양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종대왕 능침 정경
석물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된 조선 전기 양식으로 문양이 아름답고 장중하다.
12각의 병풍석 면에는 蓮花文, 雲文, 瑞氣文, 菩薩像, 十二支神 등이 새겨져 있다.
12각의 12면석 하나로 구름무늬를 바탕으로 12지 중 卯가 자리하고 있다. 卯는 12간지 중 동남쪽 05시~07시 방향을 경계하는 지신이다.
면석과 면석이 만나는 모서리 각으로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면석 위 테두리석(만석)에는 瑞氣를 품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中階에 위치한 문인석文人石
下階에 위치한 武人石
석마의 위치가 석인 한 발짝 뒤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총탄에 뺨은 움푹 파이고 코는 문드러졌지만
그 자리를 뚝심으로 지키고 있는 武人石의 갑주 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곡장 뒤에서 바라보니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야산과 논밭이었던 곳에 틈새 없이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숨조차 못 쉬겠다.
〈재실 齋室〉
이 재실은 제9대 성종 임금과 제11대 중종 임금의 능에 딸린 재실이다 이곳은 제관들의 제사 준비와 왕의 휴식을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원래는 성종대왕과 중종대왕 능에 각각 재실이 있었으나 대한제국시절에 2개소의 재실을 현재의 1개소로 합쳐 지었다.
2005년 4월22일~11월28일까지 크게 보수를 하였고 2006년.4.1부터 관람객들에게 개방 관람토록 하고 있다.
재실 대문
재실 뒤편 모습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 소재.
《온릉 溫陵》
〈中宗의 元妃 端敬王后〉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따님으로 연산군 5년(1499년) 당시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府夫人이 되셨고, 1506년 반정세력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왕위에 오르니 중종이시다. 따라서 부부인 신씨는 왕비가 되셨다. 그러나 아버지 신수군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비에 오른지 7일 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 중종10년(1515년)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단경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단경왕후는 생전에 복위되지 못하고 폐비의 신분으로 71세에 세상을 떠나 친정인 거창 신씨 가문의 선산(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인 지금의 자리에 묻히셨다. 이후 182년이 지난 영조15년(1739년)에서야 단경왕후로 복위되고 묘를 능으로 올려 그 이름을 온릉이라 하였다. 溫陵은 폐비의 신분으로 조성되었던 묘에서 능으로 승격 된 능이어서 병풍석, 난간석, 무석인을 생략한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단경왕후 신씨는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이시다.
〈中宗元妃 端敬王后 碑文〉(前文)
朝鮮國
端敬王后溫陵
〈中宗元妃 端敬王后 碑文〉(陰記)
恭昭順烈端敬王后愼氏 中宗大王元妃 成化二十三年丁未正月十四日誕生 正德元年丙寅正位中壼未幾遜于私第
嘉靖三十六年丁巳十二月七日昇遐 葬于楊州西山長興面水回洞亥坐之原 壽七十一英宗己未復位上諡
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四月 日 立
〈中宗元妃 端敬王后 碑陰記〉(譯文)
공소순열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대왕의 원비(첫 번째 왕비)이시다. 성화23년(정미년1487년) 1월14일에 탄생하시어 정덕 원년(병인년 1506년)에 중곤(왕비)의 자리에 오르셨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사제로 출궁되셨다. 가정36년(정사년 1557) 12월7일에 승하하여 양주 서산 장흥면 수회동 해좌(북북서) 언덕에 장사지냈다. 71세를 사셨다. 영종(영조) 기미년(1739)에 복위되시어 시호를 올렸다. 숭정 기원 후 180년(정묘년, 1807) 4월에 세우다.
중종대왕 원비 단경왕후 능침
곡장 뒤에서 바라본 능침
단경왕후 온릉 情景.
〈祭室〉
제실 지붕 우측은 팔작 처마이며, 좌측은 맞배 처마로 되어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 소재 2023년 3월24일 -鄕-
《희릉 禧陵》
〈中宗의 繼妃 章敬王后 尹氏〉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서삼릉 내 소재.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여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가 옆에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능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조선 제11대 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尹氏 1491~1515) 의 陵이다. 장경왕후는 坡原府院君 尹汝弼의 따님으로 중종 원년(1506)에 淑儀가 되셨고 그 이듬해에 왕비가 되셨다. 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맏아들인 仁宗을 낳고 산후의 병으로 25세에 경복궁에서 승하하셨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 위치)
〈정자각丁字閣〉
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따른 것이다.
〈장경왕후 희릉 비각 章敬王后 禧陵 碑閣〉
〈장경왕후 희릉 표비 章敬王后 禧陵 表碑〉(前面)
朝鮮國 章敬王后禧陵
〈장경왕후 희릉 비 음기 章敬王后 禧陵 碑陰記〉 (後面)
宣昭懿淑章敬王后尹氏 中宗大王繼妃 弘治四年辛亥七月六日誕生 正德元年丙寅 選封淑儀 丁卯冊封王妃
乙亥三月二日昇遐 閏四月葬于廣州獻陵右岡 嘉靖十六年丁酉九月六日移葬于高陽南原堂里艮坐之原
壽二十五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六年立
〈장경왕후 희릉 비 음기 章敬王后 禧陵 碑 陰記〉 〈역문譯文〉
선소의숙장경왕후 윤씨, 중종대왕 계비, 홍치 4년(1491) 신해 7월6일 탄생, 정덕원년(1506) 병인에 숙의로 책봉되고, 정묘(150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을해(1515)3월2일에 승하하여 윤 4월에 광주 헌릉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가정 16년(1537) 정유 9월6일에 고양 남쪽 원당리 간좌 언덕에 이장하였다. 수는 25세, 숭정 기원 후 126년(1753) 세움. 숭정 기원 후 1년(1628년)
〈장경왕후 희릉 비각 章敬王后 禧陵 碑閣〉
장경왕후 능침
곡장 안 봉분 뒤는 낮은 지대를 2단으로 높여 담(曲牆)을 높였고 봉분에 병풍석 없이 바로 12각의 난간석을 돌리고 좌우에 각각 망주석을 세우고 석호와 석양을 배치하였으며 정면에 혼유석을 두었다
장명등의 상부는 기와골 형태의 보개에 복발과 용차를 구현하고 그 사이에 구슬모양을 염주처럼 둘러새겼고 용차 위에 또 염주처럼 구슬을 돌린 그 위에 보주를 올렸다
우동隅棟 끝 전각轉角에는 귀꽃이 새겨져 있다. 화창火窓 아래에는 구슬무늬선과 안상 귀꽃이 정연하게 규칙적으로 새겨져 불교미술을 보는 듯하고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망주석望柱石〉
이 망주석 또한 연봉오리의 받침 모양으로 귀꽃이 새겨진 연꽃잎을 바탕으로 두고 그 아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발을 드리운 듯하고 팔각 기둥을 기어오르는 문양이 새겨진 細虎가 표현되어 있다 하단부는 팔각 각 면마다 안상을 두고 연화문을 돌려 새긴 망주석으로서는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겠다.
《태릉 - 泰陵》
(中宗의 繼妃 文定王后 尹氏)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313-19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여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가 옆에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능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 임금의 2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1501-1565)의 능이다.
문정왕후는 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따님으로 중종10년(1515년)에 2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승하하시자 중종 12년(1517)에 왕비로 책봉되셨고, 중종과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으셨다. 1545년 아들 明宗이 仁宗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인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20세에 이르자 대신들을 모은 자리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철렴(撤斂)한다며 남긴 말씀이 있다.
「나는 본래 불민(不敏)한 사람이다. 일찍이 서책(書冊)을 보니, 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大王, 중종·인종)이 연이어 승하하였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하여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였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고 학문이 고명하여져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사(政事)를 재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귀정하고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니, 대신들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성상을 잘 보도(輔導)하여 태평스런 정치에 이르도록 힘쓴다면 매우 다행하겠다. 부덕한 나로서는 비록 폐습을 바로잡아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 하였으나, 잘못되는 일이 많아 끝내 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인심에 반드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하여 보건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니 지금 귀정하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이 계획은 실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 뜻을 대신들에게 직접 말하고자 접견한 것이다."」
문정왕후가 다스린 8년 동안 윤원형(尹元衡) 등 왕후의 친척이 되는 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좌지우지하였다. 한편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던 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승려가 되는 시험인 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 진흥에 관심을 쏟으셨다. 그후 명종20년(1565)에 65세로 창덕궁 소덕당에서 돌아가셨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 중중의 능인 정릉을 강남으로 옮기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곁에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비가 오면 침수 피해를 입는 일이 잦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능을 쓸 수 없어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태릉이라 하였다. 태릉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에는 방위에 맞춰 12지신상과 글자를 함께 새겼다. 문·무석인 등의 석물은 다른 릉에 비해 크기가 장대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이며 귓볼에 귀고리 구멍이 있다.
《정자각丁字閣》
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그 까닭이 있다.
《문정왕후 태릉 표비 文定王后 泰陵 表碑》 (前文)
朝鮮國 文定王后 泰陵
《문정왕후 표비 文定王后 表碑》 (陰記)
聖烈仁明文定王后尹氏 中宗大王繼妃弘治十四年辛酉十月二十二日誕生 正德十二年丁丑冊封王妃 嘉靖四十四年乙丑四月七日昇遐 七月十五日葬于楊州南蘆原面壬坐之原壽六十五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六年立
〈음기 역문 (陰記 譯文)
성렬인명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대왕의 계비로 홍치 14년(연산군 7년, 1501) 신유 10월 22일 탄생하시어 정덕 12년(중종12년, 1517)정축에 왕비로 책봉되시고 가정 44년(명종 20년, 1565) 을축 4월7일에 승하하시어 7월15일에 양주 남노원면 임좌(북북서) 언덕에 모셨다. 향년65세이셨다. 숭정 기원 후 126년(영조 29년, 1753)에 세우다.
〈중종대왕 계비 문정왕후 태릉 비각 中宗大王 繼妃 文定王后 泰陵 碑閣〉
조선 역대 왕릉의 석물을 압도하는 문정왕후 능침
봉분의 병풍석이 높고 장중하다
봉분과 병풍석과 모든 석물들이 다른 왕릉은 물론 태조 건원릉의 석물보다 장중하고 크다.
능침의 규모에서 당시 외척의 권세가 엿보인다.
上階의 망주석과 中階의 장명등 그리고 문인석, 장명등은 개석의 우동 끝 전각 모서리 8곳에 귀꽃을 새겼고 그 위에 종모양의 노반을 덮고 염주문을 돌리고 복발을 올리고 다시 구슬문을 돌리고 보주가 표현되어 있다. 화창 밑으로는 팔각 각 면마다 안상을 내고 앙련과 안상 복련 안상 족배 등 문양이 화려하기 그지없고 문양 양식에서 불교조각양식이 엿보인다.
下階의 무인석과 말,
모든 석물의 문양 양식이나 새김수법과 형태에서 중종의 靖陵과 매우 유사하다.
문인석
총탄에 코가 깨지고 눈빛에 슬픔이 서렸네
능침 아래에서 바라본 정경.
2009년 7월16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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