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도읍지 (百濟 都邑址)

鄕香 2006. 4. 7. 23:57

백제문화는 도읍을 몇 차려 옮겨간 도읍의 시기에 따라 3기로 나누는데 고고학 . 미술사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백제 유적 . 유물의 절대연대 설정에도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 시기 구분은 서울의 명칭에 따라 한성(漢城)시대(4세기초~475년) . 웅진(熊津)시대(475~538) . 사비(泗)시대(538~660)로 나누어집니다.

 

한성(漢城)시대의 행정 중심지였던 漢城 또는 위례성(慰禮城)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한 위치나 유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風納洞土城이나 夢村土城이 유력한 후보지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은 한강남안에 강과 평행하게 이루어진 긴 네모꼴의 토성으로 삼국사기의 사성(蛇城)에 비정되고 있습니다.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한 것으로 둘레 약 2km에 달합니다. 이 토성에서는 적심돌(積心石)이 있는 건물터와 대형 연못이 확인되어 한성백제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이 분명해졌지만, 대규모의 궁궐터 . 관청터 등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두성의 주변인 가락동(可樂洞) . 석촌동(石村洞)일대에는 백제 초기 지배세력의 무덤이 집중 분포하고 있습니다.

 

백제는 475년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현재의 공산성(公山城)은 조선시대에 다시 돌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지만 그 동남편으로 연결되면서 다져쌓기한 토성이 있습니다. 성안의 서쪽 고지대인 평탄대지에서 적심돌을 갖춘 백제 건물터와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어 한 때 이 성이 왕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적심돌 건물터 중 제1건물터는 가장 큰 것으로, 동서 24m, 남북 14m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성은 미리 계획을 세워 건설된 도성입니다. 따라서 도성은 앞시대에 비하여 완비된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사비 주위의 자연구릉을 연결하여 나성(羅城)을 쌓고 주변에는 방어 거점용의 많은 산성을 쌓았으며, 사비 도성의 북쪽인 백마강(白馬江)변에 있는 부소산에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복합된 산성을 쌓아 긴급시 대피처로 이용하였습니다. 

부소산성은 지형상 군사용 방어시설로 여겨지며 부소산 남쪽지역에 왕궁과 관청 등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는 좌우에 75cm 너비의 하수구를 설치한 너비 10.7cm의 남북대로와 너비4m의 동서대로가 엇갈려 지나가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부소산 기슭을 따라 네모꼴 자연석을 4~5단 쌓은 일직선의 축대(築臺)는 당시 구획된 도성의 북쪽 경계로 보이며, 배수구내에서는 왕실의 제사용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넓은 지역에 걸쳐 성토부지가 있고 기와로 터를 만든 건물터(瓦積基段建物址), 돌로 네모지게 쌓은 연못, 샘터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연못은 동서로 긴 네모꼴이며 깬돌로 정교하게 쌓았고, 연못자리 동쪽지역에서는 남북과 동서로 엇갈린 도로망 유적의 일부가 확인되었습니다. 연못 . 도로유적 . 건물터 및 석축시설은 모두 동일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규칙성은 사비시대의 도시계획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백제의 성곽에는 나무울타리(木柵)시설도 보이는데 서울 몽촌토성, 대전 월평동(月坪洞), 공주 금성동(錦城洞), 천안 백석동(白石洞)등지에서 조사되었습니다.